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독자의 목소리

74호(2010.04.19.)/문화생활 2010. 4. 30. 10:15 Posted by mednews



 

독자의 목소리

이번에 의대생신문을 읽으면서 변화된 점에 많이 놀랐습니다. 일단 신문이 좀더 체계적으로 틀이 잡힌 것 같았어요. 그리고 많은 기사들이 유익했지만 (사회적, 정치적으로 본 의사관련 이슈 등) 제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건 ‘수상한 의대생’이었습니다. 의대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던 시를 쓰는 일이 너무 멋있어 보였거든요^^. 저도 문학에 관심이 많은데, 이렇게 등단까지 한 의대생이 계신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낸 용기도 부러웠어요. 앞으로 더욱 더 이상한(?) 의대생 많이 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당.ㅎ

- 영남의대 박주연

'74호(2010.04.19.) > 문화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소식  (0) 2010.04.30
니체적 환자와 레비나스적 의사의 만남  (0) 2010.04.30




 

니체적 환자와 레비나스적 의사의 만남
『어느 의사의 고백』

 의학과 철학. 정말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이 두 학문 사이에 슬금슬금 다리를 놓으려 하네요. 여기에 ‘아니 의학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고, 철학은 머리만 굴리는 주관적인 학문인데 무슨 연관이 있느냐’며 반문하실 분도 많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어느 의사의 고백』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의학을 바라본 책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학에 있어 윤리적인 토대를 마련해 보려는 노력이 담긴 책이지요. 저자인 알프레드 토버는 의사이자 철학자입니다. 토버는 과학에 삼켜진 현대의학이 환자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잃어가는 것을 매우 염려했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대안으로, 그는 대인관계에서의 윤리가 의료의 기초로 확립되어야 하며, 임상과학은 의학의 도구로써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대인관계의 윤리-여기서는 의사-환자간 윤리-를 세우는 데에 있어, 토버는 니체와 레비나스를 롤모델로 제시했습니다. 이번 스터디에서는 이 두 철학자의 사유가 어떠한 것이며, 이것이 어떻게 의사-환자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레비나스의 얼굴

 레비나스는 1905년 리투아니아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경험했고, 세계 1,2차 대전을 겪는 와중에는 가족을 잃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레비나스는 어째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 원인을 ‘타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의 부재’에서 찾았습니다.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해 있던 전체주의적 사고는 타자를 자신의 마음대로 이해되는 대상- 즉 내 자신의 사고체계로 ‘환원된’ 대상-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타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이뤄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에 대한 대항으로, 레비나스는 타자를 올바르게 존중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그의 관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얼굴의 현현’이라는 개념입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는 타자와 마주할 때 ‘얼굴의 현현’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얼굴은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때 타자는 고통스러운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나 집을 철거당한 철거민들, 가난해서 밥을 굶는 어린학생들을 볼 때 ‘불쌍하다’ 혹은 ‘저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데는 논리적인 사고과정이 필요하지 않지요. 따라서 얼굴이란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서 내 자신이 느끼는 어떤 감정’과 비슷합니다. 또한 그런 약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마음속 한 구석에는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얼굴의 현현은 일종의 윤리적인 명령이며, 연민이나 동정과 같은 감정보다 나와 타자 간의 윤리적 관계를 훨씬 더 견고하게 엮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째서 이런 타자의 철학을 강조했을까요? 실증주의적 과학에 기반한 현대의학은 종종 환자를 ‘질병’으로 환원시켜 연구의 대상으로 여기곤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세태에 반감을 표합니다. 그는 레비나스를 통해서 의사가 환자와 마주할 때 보아야 할 것은 질병이 아닌, ‘얼굴’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특히 관계 설정에 있어 타인의 고통을 큰 요인으로 여긴 것을 감안하면,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은 의사-환자 관계의 윤리모델의 적절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니체의 자아, 니체의 몸

 이제 저자가 주목한 또 다른 관념 - 니체의 자아에 대해 알아봅시다. 니체의 자아관념은 참 특이합니다. 근대까지만 해도 자아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나 자신의 배후에는 어떤 일관된 자아가 존재하며, 이 자아가 나의 말과 행동, 삶 전체를 좌우한다고 보았지요. 니체는 이러한 전통적인 자아 관념을 부정합니다. 그가 생각했던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의식과 의지, 혹은 감정들의 복합적 활동에 대한 개념적 총합’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기분 좋을 때의 나, 나쁜 생각을 하는 나, 분노하는 나 등 다양하지요. 하지만 이들은 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한 조각들일 뿐, 그 중 어느 것도 참다운 ‘나’는 아닙니다. 바꿔 말하면 니체는 어떤 행위나 현상을 만들어내는 일관된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쯤 되면, 이런 의문점이 생겨날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주체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주체는 소멸되어 버린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니체는 ‘몸’을 제시합니다. 니체는 있어서 몸이란,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힘들 간의 내면적 투쟁과 경쟁이 발현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힘들 간의 투쟁과 경쟁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그는 ‘건강하다’라고 말했지요.
 이러한 니체의 자아관념에는 타자에 대한 설명, 특히 상호 간 윤리적 책임에 대한 요소가 빠져있습니다. 때문에 그의 자아관념을 의사-환자 관계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이것을 의료윤리와 관련짓기 위해서는 좀 다른 길을 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니체의 건강

 위에 언급했던 니체의 몸 개념을 건강과 관련지어서 확장해봅시다. 니체의 몸은 다양한 행위를 유발하는 힘들의 복합체입니다. 이런 다양한 힘들을 적절히 조절하느냐는 몸의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지요. 니체는 그 힘들 간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 혹은 그렇게 노력함으로써 다양한 균형의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건강으로 정의합니다. 그는 ‘병이 있다’거나 ‘병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질병과 건강 모두 어떤 균형점을 찾아가는 선상에 놓인 것으로 간주하고,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이러한 니체적 관점에서는 환자가 질병을 지닌 객체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다만 잠시 몸이 평정을 잃었을 뿐, 자기 자신의 의지로써 다시 조화로운 몸으로 돌아 갈 수 있는 ‘다소 불균형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러한 건강개념은 자율성을 중요시하는 요즘 환자들의 인식과 잘 맞아들어가는 면이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자율성을 이유로 니체의 관념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환자는 스스로의 컨트롤의 부재로 인한 발병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올바르지 못한 식습관이나 방탕한 생활, 건강유지를 위한 노력의 부재 등에 대해 환자에게 전적인 책임을 묻는다거나, 특히 전염병 환자의 경우 벌을 받은 사람, 즉 죄인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니체와 레비나스, 환자와 의사

 그런데 이 시점이 바로 니체의 주체적인 건강개념과 레비나스의 관계론이 융합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스스로의 몸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나온 환자의 자율성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 자율성을 빌미로 질병의 책임을 전적으로 환자에게 지우는 것은 타인, 즉 환자의 ‘얼굴’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레비나스가 제시한 다른 모든 자아-타자의 관계에서처럼, 의사가 환자의 ‘얼굴’을 보는 것은 환자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에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니체적 건강을 잃은 환자가 레비나스적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니체의 ‘주체의 해체’ 개념은 의사-환자 관계의 전제(건강과 질병의 정의)를,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은 의사-환자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틀을 제시해주는데, 결국 둘 다 의료윤리의 기반으로써 중요한 구성요소라 할 수 있겠지요.

 니체와 레비나스. 언뜻 보면 의학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을 끌어들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인간적인 의학을 위해서이지요. 환자를 단순히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질병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현대의학은 의학의 본질-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에 도전장을 내밀음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반세기가 넘게 의사로 살아온 저자 역시 이를 절실하게 느껴왔겠지요. 의학의 윤리적 토대를 마련해 보려는 그의 노력은 비인간적인 의학에 대한 대항입니다. 의학의 핵심 중 하나인 의사-환자 관계가 어떠한 철학에 기반 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그는 니체와 레비나스라는 원석(原石)을 조심스레 내어놓았습니다. 매우 거친 형태이긴 하지만, 의학의 윤리적 기반으로써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원석 그 자체로는 단단한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돌을 균형에 맞추어 수많은 각도로 깎았을 때에야 비로소 눈부신 빛을 발하게 되지요. 글을 읽으시는 모든 독자 분들께 엄숙하고 아름다운 세공을 부탁드리면서 스터디를 마칩니다. 

■ 포럼 참가자_ 김정화(한림), 정세용(연세), 이예나(순천향), 김민재(순천향)
■ 포럼 일시 및 장소_ 3월 28일 강남역 유익한 공간   ■ 정리_ 김정화 기자/한림 <eudimonia89@e-mednews.com>

'74호(2010.04.19.) > 문화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소식  (0) 2010.04.30
독자의 목소리  (1) 2010.04.30




 

의학서의 저자들 : 2회 - 닥터 턴슬리 해리슨

 해리슨, 로빈스, 가이톤, 그리고 홍창의... 의대생이라면 누구나 봐야 하는 교과서들의 제목을 장식한 이 분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의대생신문에서는 올해 6회에 걸쳐 의학교과서의 저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파헤칩니다. 지난번 가이톤에 이은 그 두 번째 순서로 내과학 교과서의 저자, 해리슨을 만나봅니다.

해리슨가(家)의 정신은 계속될 것이다

 닥터 틴슬리 해리슨(Dr. Tinsley Randolph Harrison)은 미국 알라바마 의과대학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그를 기리는 동상도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건물 또한 학교의 명물이다. 이러한 신적인 존재 닥터 해리슨이 바로, 50여년간 전 세계 의학도들의 필수 지침서인 『해리슨 내과학(Harrison's Principles of Internal Medicine)』의 편집자이다.
 이렇게 역사에 남을 위대한 업적은 그 혼자만의 노력과 열정에 의한 당연한 결과라 볼 수도 있지만 닥터 해리슨의 경우에는 한 천재의 영감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해리슨가(家) 대대로 지켜온 의사 집안이라는 자부심과 자식들을 훌륭한 의사로 키우겠다는 정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 대대로 새로운 지식을 갈망했던 해리슨가는 선대에서 갖지 못했던 환경을 후손들에게 제공해 주려는 노력이 대단했다. 자식을 능력 있는 의사로 키워내려는 해리슨가의 정신이 닥터 해리슨과 그의 업적, 해리슨 내과학을 탄생시켰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닥터 해리슨은 6대에 걸쳐 자자손손 의사생활을 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리슨가 초대 의사인 그의 증조할아버지부터 소개해나가겠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닥터 틴슬리 해리슨(John Tinsley Sr.)이 살던 때에는 체질설이 만연했다. 즉, 피, 점액, 황담, 흑담의 4가지가 균형이 흐트러지면 병에 걸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의사들이 일부러 출혈이나 구토를 유발시켜 질병을 치료하려 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러한 치료는 도리어 환자에게 더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기에는 물론 정식 의사 자격증도 없었다. 해리슨의 증조할아버지 역시 의사 자격증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버지니아 의과대학에서 짧게나마 수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수련과정을 마치는 것보다 결혼 생활을 택하였기 때문에 미처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의사로 활동한 것 외에도 목화 농장의 소유주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 덕에 두 아들들(닥터 해리슨의 할아버지)을 의과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19세기 초반 당시 대부분 미국 의과대학은 등록금만 내고 마지막 학기말고사만 출석을 하면 졸업장을 줄 정도로 허술했다. 닥터 해리슨의 할아버지들 또한 이런 식으로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닥터 해리슨의 할아버지, 존 틴즐리 주니어(John Tinsley Jr.)의 경우에는 형과 같이 의과대학을 다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남부 연합군 편에 지원하였다. 그런데 곧 북부 연합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 천운이 따랐다. 북부 쪽에서 그의 뛰어난 의술을 알아보고 북부 쪽 군의병으로 일 해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남부 연합군을 향한 충성심으로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의사로서 의술을 펼치고 싶은 욕망이 컸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 조건 하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 그 첫째 조건은 1) 양키들(북부 연합군)보다 남부파 쪽 환자들을 먼저 치료할 권리였고 둘째는 2) 남부 연합군의 상징인 회색 바지를 입고 일할 수 있는 권리였다.
 남북전쟁 이전만 해도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를 뽑거나 종기를 째는 것 같은 간단한 작업 외에는 수술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닥터 해리슨의 할아버지같이 의사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수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수술경험이라는 의사로서의 귀중한 자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은 참담했지만 덕분에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가진 능력 있는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그로스 해리슨(Groce Harrison)- 닥터 해리슨의 아버지- 또한 의사의 길을 걸었다. 1893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 1기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존스 홉킨스대 졸업장 보다는 사랑을 택하였다. 또, 나중에 볼티모어에서 좀 더 심도 있는 수련과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자신은 가족을 3년이나 내팽겨 칠 수 없다며 포기하였다. 그 정도로 가정을 중시했다. 대신 아들이 ‘의학계의 대부’가 되도록 모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20세기 의학에서는 황금의 시기에 드디어 틴즐리 란돌프 해리슨(Tinsley Randolph Harrison)이 태어났다. 그동안 청진기, 검안경이 발명되고 미생물학, 방사선, 면역학과 화학치료 요법 등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또한, 학부생 실습제도가 도입되고 병원에는 과별로 세분화된 레지던트제도가 시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존스 홉킨스와 같은 몇몇 큰 학교에서 재단의 후원이 상당해 지면서 교육과정이 탄탄해지기 시작했다. 의과대학, 수련과정, 의료과학기술 등 모든 면에서 황금의 시기였다.
 그리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1922년에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다시 홉킨스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를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바로 펠로우쉽을 거쳐 부교수로, 또 교수로 임명되었다. 록펠러 재단의 후원을 받아 해외 리서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알리바마 대학에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거기서 첫 의과대 학장을 맡기도 했다.
 방대한 양의 내과학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이 바로 현재 총 12종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내과학의 정석이라 불리는 해리슨 내과학이다. 의학 전 역사를 통틀어서 이 책만큼 많이 팔린 내과관련 교재가 없을 정도이다. 1978년 그가 운명하고 나서 편찬된 제9판에서부터 원래 ‘내과학의 기본원리’(Principles of Internal Medi-cine)이었던 책 이름을 해리슨 내과학(Harrison's Principles of Internal Medicine)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내과학 개념서로서 ‘해리슨’을 손꼽는다.
 건물과 동상 등 닥터 해리슨을 위한 기념비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가 갈고 닦아 온 의학의 역사를 닥터 해리슨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들의 피와 땀과 노력을 아는 그에게 뭇 기념비들보다도 다음 세대의 닥터 해리슨, 다음 세대의 의학 혁신자들이 펼칠 의술 들이 더 기대되고 자랑스러울 것이다. 위대한 해리슨가의 정신은 계속 될 것이다.

문정민 기자/중앙
<moon_jm@e-mednews.com>




 

테디의 의대정복 - 연재종료 셀프 인터뷰

지난 1년 반 동안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할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우리에게 공감과 웃음을 주었던 ‘테디의 의대정복’이 이번 호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컷 속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셀프 인터뷰를 통해 들어봅니다.

▶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 안녕하세요, 충남의대 본과 4학년 박재범이라고 합니다. 87년 12월생입니다.
‘테디’라는 닉네임으로 일부 인터넷상에서는 알려져 있고, 화성인 바이러스에 나갔던 것으로도 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 같네요. 혼자 그린 만화를 게재하는 게 취미이구요. ‘테디의 우주정복’, 그리고 블로그에서 연재중인 ‘테디의 의대만화’ 등 이 대표작입니다. 의대생 신문에서는 1년 반 동안 의대생 신문에 ‘테디의 의대정복’을 연재했습니다.

▶ DC에서부터 처음 연재하신 걸로 아는데, 연재하게 된 계기는?
- 아... DC에서는 원래 이런저런 부끄러운 짓들을 하면서 살았었습니다. 사진 같은걸 올리고... 그러다가 원래 어릴 때부터 취미였던 만화그리기를 올렸는데, 이게 생각보다 일부 계층에서 인기가 좀 있어서, ‘테디의 우주정복’ 이라는 조악한 웹툰을 연재했었습니다.
특별히 계기랄 것은 없고 원채 만화를 그리는 걸 좋아해요. 그때그때의 감정 같은 거나, 그날 있었던 일 같은 것도 만화의 한 컷으로 슥슥 그리는 버릇이 있을 정도니까요.

▶ 테디는 뭔가요? 왜 테디인가요. 그 외의 캐릭터도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 테디는 제가 어릴 때부터 집에 있던 곰 인형을 본 따서 그리던 게 이어져 온 거구요. 어릴 적에 생각없이 지은 이름인 탓에, 저렇게 특징없는 이름이 되었네요. 네이버에 테디를 검색해도 가수가 나오고, 박재범을 검색해도 가수가 나와요. 오타쿠 의대생이라고 치면 그때서야 나오는 것 같아요.
만화에 종종 등장하는 캥거루 같은 거는 제 의대 동기 캐릭터입니다. 만화에서 테디의 절친한 파트너인 머리에 풀 난 호빵같이 생긴 거는 제 고등학교 후배가 그려주셨던 캐릭터입니다. 몇 년간 잘 쓰고 있습니다. 을지의대 본과 2학년 백재원 양에게 오랜 감사를 표합니다.

▶ 1년 반 동안 전국 의대생 신문에 연재하시면서 소감은?
-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맨날 이런 거 질문할 때마다, ‘정말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식상해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의미 있었는데 뭐라고 하나요. 네, 아무튼 3일전에서야 아이디어를 짜고 그렸습니다. 첫 화는 재미없다고 하시는 분도 많았지만, 점점 반응은 괜찮아졌던 것 같아서 응원도 많이 받고 그랬습니다.
전국 의대에서 제 테디를 봐주신다고 생각하니까 좋았어요. 그치만 PK 실습을 돌면서부터 바빠졌고, 졸업반 되면서 만화를 그릴 시간이 점점 적어졌네요. 그만둬서 넘 아쉬워요.

▶ 앞으로의 활동 계획
- 의대만화라는 것도 블로그에 연재를 했었으나, 몇 달 전부터 다 잠정적 중단 상태입니다. 인턴 끝날 때까지는 당분간 그리기는 불가능해보이네요.
그 때가 되면 테디라는 캐릭터는 다 잊혀지겠지만, 그냥 지금까지라도 재밌게 봐주신 분이 있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 앞으로의 꿈, 하고 싶은 말씀은?
- 일 잘하고 똘똘한 좋은 의사가 될게요. 의대생 신문사, 사실 MT도 한번밖에 안가고, 지방이다 보니 모임도 못가서 항상 만화만 보낼 뿐이어서 죄송스러운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신문 만드는 거 진짜 노력 많이 하시고, 열성적으로 하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언제나 응원하고 있어요. 저는 졸업반이라 떠나지만, 의대생 신문 번성했으면 좋겠어요. 독자 여러분들, 신문사 여러분들 다 자비 털어서 발행하는 신문이에용ㅠ 재밌게 봐주시고 관심 많이 가져주세요. 감사합니다. 의대생 신문사 사랑해요.

※ 저의 더 많은 만화를 보고 싶으신 분은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 작가 작품 블로그 : http://blog.naver.com/teddylisk

박재범 기자/충남 <teddylisk@e-mednews.com>


 

일차의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제너럴 닥터’ 정의식 선생님 인터뷰

 까페 클리닉으로 유명한 홍대 앞 제너럴 닥터에 새로운 의사가 왔다. 가정의학과 전문의인 정의식 선생님이 그 주인공이다. 정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가정의학과를 도입하신 윤방부 선생님 밑에서 펠로우십을 마치고 전주 예수병원, 영동세브란스 등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지난 20년간 대학에서 그리고 개업의로서 우리나라에 바람직한 일차 의료 도입을 위해 노력했던 그가 제너럴 닥터에 오게 된 사연을 들어보았다.

 가정의학과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의과 대학 재학 시절 본과 3학년 때 실습을 도는데 평생 하고 살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과가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에 윤방부 선생님이 미국에서 가정의학과 수련을 하고 한국에 돌아오셨어요. 그 분이 예방의학 시간에 들어오셔서 가정의학 강의를 하셨는데 그때 가정의학과가 상당히 장래가 불투명한데도 불구하고 ‘아 이거라면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정의학과는 ‘primary care’를 하는 곳인데, 이걸 굳이 한국말로 하자면 '일차의료' 정도가 되겠죠. 저는 이 일차의료라는 것에 굉장히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일차의료에 대해서 설명부탁드려요.
 - 일차의료를 하는 사람은 일단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남녀노소 구분없이 환자를 만나요. 환자의 상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거기에서 문제를 발견해내서 도와주고 내가 다 못 도와주면 내가 속한 팀의 도움을 받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큰 병원으로 보내죠.
 사실 우리나라는 지금 일차의료랑 이차, 삼차의료의 구분이 잘 안 되어 있어요. 일차의료라고 하면 이차, 삼차 의료와 비교해서 하등하고 굳이 진료를 안 받아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죠. 일차 의료를 하는 의사와 각 세부 전공의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효율적으로 짧은 시간에 환자를 도와줘야 되는데 현실은 개인병원과 종합병원들이 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대학병원에 가보면 일차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우루루 가 있고 전문가 집단의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들이 개인 병원을 진전하고 있는 경우도 볼 수 있죠. 그러다보니깐 비용, 시간적인 면에서 부작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고요.

 개업의로 근무하셨을 때 경험이 제너럴 닥터에 오게 된 계기 중의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 일차의료에서는 환자에게 접근하는 바람직한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지속적인 의료인데 환자하고 한번 관계를 맺으면 지속적으로 교류를 하는 겁니다. 정보도 주고 교육도 하고 예방접종도 하고 정기검진도 하고.
두 번째는 포괄성입니다. 내, 외과를 아우르는 포괄성을 포함해서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할 수 만 있다면 영적으로도 즉, 모든 면을 통합해서 환자를 보는 겁니다.
 지난 10년 동안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두 가지 시도를 해 봤어요. 처음에는 포괄성을 염두에 두고 개업을 했죠. 장비들을 갖춰놓고 모든 질병을 두루 다루려고 했는데 결국은 환자들이 개인병원보다는 주위에 있는 큰 종합병원을 선호했어요. 다음에는 지속성을 목표로 했습니다. 처음에 가족 주치의로 일하고 싶다고 써 붙이고 시작했는데 꼭 아플 때가 아니어도 정기검진이나 상담,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그 개념이 생소해서 그런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전문의로서 의원인 제너럴 닥터에 오게 되신 이유는요?
 - 앞서 말했듯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해봤던 두 가지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해서 가정의다운 진료를 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해야 하나 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승범 원장이 까페 클리닉이란 걸 열었는데 같이 해보자는 뜻을 전해왔어요. 처음에는 의아했죠. 까페 클리닉이라고 하니까. 엉뚱하죠? 여러 번 방문해서 의논하고 진료하는 모습도 보니까 이렇게 기발한 방법으로 환자들에게 새롭게 접근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제너럴 닥터에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도 있고, 일반의도 있는데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하나요?
 - 특별히 역할 분담이랄 것은 없습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수련을 받지 않은 일반의보다는 효율적으로 환자를 볼 수 있죠. 일반의는 전문의와 비교해서 처음에 환자를 볼 때에는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있고요.

 고령화가 이슈인데, 노인들을 위한 일차진료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 좋은 질문입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는 것은 일차 진료가 아닙니다만 혼란스러운 우리나라의 의료 제도에서 노인들은 일차진료를 경험해 보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썩 내키지 않아합니다. 당연한 것이 우리나라에 일차의료가 제대로 자리 잡힌 적이 없는데 어느 누가 그렇게 진료를 해 왔겠어요. 노인들은 다른 병원들처럼 아픈 데를 묻고 약 처방해주고 끝나는 익숙한 진료를 원합니다. 하지만 가정의들은 다른 병원들처럼 진료하려고 가정의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일차의료라는 개념을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노인들에게는 그게 힘들다는 점이 안타까운 현실이죠.

 의사가 될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여러 종류의 의사가 있어요. 의과 대학 졸업할 때쯤 부딪히는 문제가 기초에 남을 것인가 임상을 할 것인가 이고 만약 임상을 하기로 정했다면 일차의료를 할 것인가 전문의를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하죠. 일차의료하고 다른 단과들 사이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어요. 환자를 보는 시각도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도 다르고 접근 방법도 다르죠. 우리나라가 각 세부 분야별로는 꽤 발전이 잘 되어 있는데 일차의료 부분은 불모지 상태입니다. 일차의료는 illness를 care하는 곳이고 다른 단과들은 disease를 cure하는 곳입니다. 의사가 될 사람들로서 일차의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혜미 기자/서남
<manar@e-mednews.com>




 

모두에게 유익한, ‘유익한 공간’

 스터디, 동아리 모임을 할 장소를 찾고 있는 A씨, 편안한 분위기의 북카페를 찾고 있는 B씨, 번잡한 강남역에서 조용히 공부할 공간을 찾고 있는 C씨, 기부를 해보고 싶은데 아직 시도해보지 못한 D씨, 제3세계 어딘가에서 배고픔에 눈물짓는 어린이 E. 남자친구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만 장소가 없어 고민하던 F씨. 이 모두에게 유익한, ‘유익한 공간’이 있다. 
 유익한 공간은 ‘유익(有益)한’ 이란 의미 외에도 ‘UHIC(유익한 공간을 운영하는 아동구호사업 NGO 국제아동돕기연합의 영문약자)+an(~한 사람을 의미)’을 담고 있다. 이곳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고, 모든 수익은 ‘국제아동돕기연합’의 기아 및 질병퇴치활동, 아동 지원 활동, 아동 교육 지원 활동,성병 및 약물남용 방지 사업등의 복지사업에 쓰이고 있다.
 마당과 2층으로 이뤄진 이곳은 세미나와 스터디를 할 수 있는 세미나룸과 2~3명이 가볍게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친구와 조용한 공간을 찾기에도, 여러 명이 모이기에도 적당하다. 스터디 모임은 별도의 공간 이용료 없이 예약만 하면 음료나 식사에 대한 금액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이용된다.
1층 한쪽 벽면은 사람들의 기부를 통해 구입한 책들이 가득 차있어 이용 도중 자유롭게 읽어볼 수 있다. 또 키친 스튜디오를 예약하면 친구들과 따뜻한 느낌의 작은 부엌에서 직접 요리도 할 수 있다. 유익한 공간에 방문한다면 ‘국제아동돕기연합’이 발행하는 월간 잡지 <Ue>도 만나볼 수 있다.

·찾아가는 길 : 강남역 7번 출구 CGV 옆 까페골목을 따라 직진 후 ‘유나이티드 문화재단’ 옆 분홍색 마당 이 있는 2층 건물(02-3453-0744, 02-3446-8442)
·요금안내 : 커피와 차(리필가능) 3000원, 아이스티, 탄산음료, 카푸치노, 까페라떼 등 3000원부터 5000원. / 카레류 : 5000원부터 8000원. / 파스타와 피자 : 10000원부터 13000원. / 키친 스튜디오 : 3시간 이용 시 7만원(조리도구, 식사도구, 기본양념 제공)

박소현 수습기자/이화
<lamia31@e-mednews.com>




 

수(秀)상한 의대생 2회

 시간이 흐를수록 homogeneous(균질, 동일)해져 가는 우리들. 하지만 남다른 생각으로 자신의 끼와 재능을 펼치는 heterogeneous한 의대생들도 강의실에 존재합니다. 2010년, 의대생 신문이 6회에 걸쳐 빼어난(秀) 재능과 남다른 생각을 가진 그들을 지면에 소개합니다. 이름하여 수(秀)상한 의대생! 그들의 생각의 좌표를 함께 따라가 봅시다.

의대생, 음악으로 소통하다

2집 뮤지션 미즐리, 의대생 이준형의 이야기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아시아드 경기장에 조금은 특이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양방언이 작곡한 크로스오버 피아노 협주곡 <프론티어frontier>였다. 재일교포 출신인 음악인 양방언은 니혼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한 의사로,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활약하는 크로스오버 작곡가이다. 음악과 의학, 두 가지를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양방언씨처럼 큰 간극이 존재하는 두 분야에 도전하는 의대생이 있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 미즐리(Misely)이다. 중앙의대 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준형씨는 미즐리라는 예명으로 2장의 정규 앨범과 1장의 싱글 앨범을 낸 실력파 뮤지션이다. 봄의 문턱에서 뮤지션 이준형씨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Misely, 음악을 시작하다

 미즐리는 이준형씨가 사용하는 예명으로 Misty를 어감이 좋게 변형한 것이다. 중학교 시절, 인터넷 음악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지은 닉네임이 미즐리라고 한다. 미즐리라는 이름을 그의 처음 곡에 새기면서 그의 음악적 인생도 시작되었다.
이준형씨가 음악을 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이다. 컴퓨터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프로그램을 만지다가 우연히 접한 음악프로그램이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프로그램 상에서 나타나는 것이 신기했어요. 한 음, 두 음 컴퓨터 화면의 오선을 채우면서 음악을 통해 나를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때부터 저의 이야기를 음악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나 봐요.”
 음악에 빠져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실용음악을 전공하던 이준형씨는 갑자기 진로를 선회하게 된다. 전문 음악가의 길을 버리고 의대에 진학한 것이다. 자신도 진리라고 믿었던 음악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의대에 진학한 이유는 무엇일까? “점점 음악을 하면 할수록 음악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비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많은 프로듀서들에게 현재 음악 시장에는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프로듀서들의 현실적 조언 때문에 다시 수능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하던 만큼만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운 좋게 의대까지 오게 되었네요.”

Misely, 앨범을 내다

 남들처럼 예과를 보내던 준형씨에게 새로운 목표가 주어졌다. 아마추어 음악 사이트에 한, 두 곡씩 올리던 자작곡을 모아 앨범을 발매할 결심을 준형씨 스스로 한 것 이다. “예과 때, 놀면서 취미 삼아서 다른 음악 동호회나 아마추어 음악인을 위해 작곡해주면서 적당히 알바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음악적으로 도태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순간 무서웠죠. 음악에게 잊혀진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그때부터 제 자신을 재정비하기 위해 1집 앨범 발매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2007년 1집, 2009년 싱글 앨범을 냈다. 그의 완벽주의 성격 때문일까? 두 장의 음반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준형씨 스스로 모든 작업을 다 수행했다고 한다. “보통 작곡가들은 앨범을 제작할 때, 일을 분담해서 합니다. 하지만 저는 첫 앨범이어서 완벽하게 저의 색깔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저 스스로 작곡, 믹싱, 마스터링 등 많은 과정을 수행했습니다. 많이 힘들었지만 제 음악을 담았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미즐리 1집은 우리가 듣기엔 조금은 낯선 일렉트로니카로 구성되었다. 거의 모든 곡이 보컬이 없는 미디음악이었다. “1집 앨범이 가장 미즐리스럽다고 해야겠죠. 그래서 사실 대중이 듣기에는 많이 낯설었을 겁니다.”

Misely, 다시 공부하다

 본과에 올라가면서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도 조금 줄었다. 여유 시간이 없는 빠듯한 본과 1학년 생활을 하면서, 그는 음악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는 악상을 밀어내고 의학 공부를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힘들었던 해부학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음악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장 기다렸던 순간이었어요. 음악을 한동안 못해서 많이 힘든 시기였어요. 공부도 잘 안되고, 그렇다고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방학 동안 원 없이 음악만 했죠.”
 이런 음악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을까? 그는 2009년 성공적으로 디지털 싱글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번 앨범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미즐리스러운 앨범이었지만, 조금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음악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던 그의 음악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제 음악이 알려지게 된 건, 전 씨야의 멤버, 남규리씨 덕분이에요. 제 곡 <Grazie Il Mattino>를 남규리씨가 싸이월드 미니홈피 배경 음악으로 등록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어요. 남규리씨와 아무런 친분도 없는데, 제 곡을 자신의 미니홈피에 등록한 것이 무척 신기했어요.”

Misely, 사람과 이야기하다

 의대 생활 5년 째, 대학 생활을 하면서 준형씨는 사람과의 소통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의대 밴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여럿이서 하는 음악을 보았다. 미즐리의 음악에서는 주연이었던 준형씨가 밴드 내에서는 주변 세션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여럿이 만들어가는 음악을 배웠다고 한다. 이런 느낌을 살려서 준형씨는 2집 앨범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번 앨범은 제 음악 세계에서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앨범입니다. 그 동안 제 음악적 욕심 때문에 대중에게 낯선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이번 2집 앨범은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라나는 앨범이었으면 해요”
 2010년 3월 발매된 미즐리 2집 <fast& slow>에는 유독 보컬 곡이 많다. 사람들과 음악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준형씨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되도록 많은 분들이 들어주시고, 저에게 다양한 피드백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타이틀곡인 <DADA Dance>가 보컬곡인 이유도, 가사를 통해 미즐리의 음악에 조금 더 쉽게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냈는데, 이젠 세상에서 사람들과 음악으로 소통하고 싶어요.”
 끝으로 이준형씨에게 의대생으로서 음악인의 삶을 물어보았다. “의대생에게 음악은 하나의 탈출구에요. 각박한 의대 사회에서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음악은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입구이기도 합니다. 저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음악을 통한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 ‘의대생 이준형’이 아닌 뮤지션 ‘Misely’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뮤지션 ‘Misely’, 힘든 시기에도 음악의 끈을 놓치 않은 그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그의 음악적 지평이 이번 2집 앨범을 통해 더욱 넓어지길 기대해본다.

※ 미즐리 미니홈피: cyworld.com/misely

취재: 정환보 기자, 문지현 수습기자
정리: 정환보 기자/중앙
<chungwhp@e-mednews.com>




 

제중원, 한국의료의 역사

한국 최초의 근대의료기관이자 의학교육의 장

 제중원의 1대 원장 알렌이 의학도 황정에게 묻는다. “만약 앞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먼저 치료할 건가요?” 황정이 대답한다. “더 아픈사람을 먼저 치료하겠습니다.” “좋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다면요?” “그 또한 더 아픈사람을 먼저 치료하겠습니다.” 최근 TV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제중원’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구한말 이루어진 한국의료의 시초인 제중원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제중원의 시작과 발전

 한국에서 서양식 의료기술의 본격적 도입은 국립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에서 이루어졌다. 광혜원은 미국 선교사인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 고종의 윤허를 받아 1885년 2월 29일 서울 재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광혜원의 설립에는 당시 구한말의 역사적 배경이 관련되어 있다.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알렌은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주었다. 서양의학의 효과를 입증한 이 일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서양 의술이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곧이어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된 그는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고, 고종이 이를 윤허하여 설립된 것이 광혜원이다. ‘광혜’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서 일반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3월 12일 광혜원은 더 많은 백성들에게 널리 혜택을 주자는 취지 아래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이름을 바꾼 후, 왕실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초기의 제중원은 정부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동시에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전자는 재정지원과 행정을, 후자는 의사와 간호사의 파견 및 진료, 병원 운영 등을 담당하였다. 개원 첫해에만 10,000여명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당시 서양의학에 몰리는 백성들의 관심은 엄청났고, 보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제중원은 1887년 구리개(현재 을지로 부근)로 이전, 병원의 규모를 확대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여성 의료를 개선하기 위해 1886년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미국에서 파견된 여의사인 애니 엘러스(Annie J. Ellers)가 치료를 담당하였다.
 초대 원장이었던 알렌 이후 제중원의 운영이 헤론(J. W. Heron), 빈튼(C. C. Vinton)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체계가 해이해지면서 병원의 운영은 난관을 겪게 된다. 1893년 7월, 새로 부임한 에비슨(Oliver R. Avison)은 정부에 제중원의 정상화를 위한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마침 운영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었던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제중원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완전한 사립기관이 된다. 1900년 에비슨은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L. H. Severance)에게서 병원설립기금 45,000달러를 기부받아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편)에 병원을 세우고 제중원 대신 기증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 세브란스병원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소속으로 남아 그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다.

의료기관으로서의 제중원

 제중원은 서양의 근대의학을 기초로 한 의술을 최초로 펼쳐 조선인의 건강을 위해 큰 공헌을 하였다.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진료함으로써 온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켰고, 1895년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제중원은 방역의 총책임자로서 직원들과 함께 방역과 환자 치료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치과 진료를 진행하고,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료로 진료해주어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의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제중원에서 진료를 받는 환자들의 절반 이상이 무료로 치료받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제중원

 제중원은 조선에서 단순히 진료뿐만 아니라 근대의학교육의 시초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제중원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알렌은 예전부터 계획한 대로 조선 내 의료진 양성을 위해 의학교육을 추진하였고, 1886년 3월 29일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교육 기관인 제중원의학교가 문을 열었다. 첫 해에 학생 16명을 선발하였고 이 중 12명이 본과에 진급하였는데, 이를 한국 근대 의학 교육의 시초로 본다. 제중원의학교는 후에 세브란스의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1908년 7명의 1기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의 실존인물인 박서양도 그 중 한명이다. 제중원의 의학 교육은 4대 원장인 에비슨의 재임 시절 전성기를 맞이하여 이때 의학 교육의 체계를 다시 세우고, 해부학을 비롯한 다양한 의학 교과서를 한글로 번역해 출판하였다.
 이처럼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의료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서양의학의 불모지였던 조선에 처음으로 근대의학을 도입하여 왕족뿐만 아니라 의료의 변방지역에 있던 백성들에게도 진료를 베품으로써 국민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였다. 또 체계적인 근대의학교육을 시작함으로써 한국에 서양의학이 전파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드라마의 장면은 당시 제중원이 지위나 조건에 영향받지 않는 평등한 진료를 최우선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알렌 원장은 곧이어 황정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한가지에요. 의원은 환자를 거부해서는 안돼요. 그게 바로 의원의 처음이고 끝입니다.” 이 대사에서 제중원이 당시 어떠한 곳이었는지, 이곳의 의사들이 어떤 마음으로 환자들을 대하였는지 알 수 있다.


문서영 수습기자/을지
<celeste@e-mednews.com>




 

 “나누는 기쁨, 배우고 돌아왔죠”

국제협력의사, 올해로 16년째 아름다운 나눔

 올해 초 아이티에서는 강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한 어린이는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 열흘 가량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드러난 사례 이외에도 수많은 고귀한 생명들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었을 겁니다.
 한편 같은 시각 한국의 한 군부대, 대위 계급장을 단 군의관 K씨는 라면을 끓여먹으며 만화책을 보고 있습니다. 힘들게 연마한 자신의 의료 지식과 술기를 정말 필요한 순간 필요한 곳에서 발휘하지 못하고, 부대에 발이 묶인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이 군의관은 바로 우리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한국국제협력단 KOICA의 ‘국제협력의사 제도’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사, 치과의사 등 의료 전문 인력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국가에 파견하여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병역을 대체해 주는 것입니다.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국제협력의사 제도는 최근 들어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이름조차 생소한 이들이 많습니다. 사업이 시행된 초기에는 선발 인원 자체가 한 해에 채 열 명이 안 되는 소수였을 뿐만 아니라 현지 사정의 불확실성이나 프로그램 운영의 정비 등을 이유로 KOICA 측에서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제협력의사, 어떤 사람이 갈 수 있나요
 의사의 경우 전문의(내과, 외과, 흉부, 마취, 소아, 정형, 가정의학과)만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1차 서류전형과 2차 면접을 거쳐 선발되는데, 그 구체적인 배점요소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협력의사를 다녀온 사람의 말에 따르면 석박사 학위 등 학력이 높을수록, 미혼보다는 기혼과 같은 안정적인 생활조건을 갖추었을수록, 영어 인터뷰나 봉사 경력 등에 있어 준비가 철저할수록 역할 수행에 적합하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춘 것으로 간주하여 선발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경쟁률 역시 KOICA측에서 원칙적으로 밝히지 않아 요즘의 자료는 없지만, 약 10년 전에 외과 전문의 3명 정원에 12명이 지원한 적이 있다고 하니 만만치 않은 경쟁이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국제협력의사의 가치가 더욱 인정되고 요청이 점차 확대되어 요즘은 20~30명 정도로 인원을 확대선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만합니다. 신체검사 등급은 병역 면제에 해당하는 정도로 특별한 경우만 아니라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국제협력의사,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로 가게 되나요
 국제협력의사의 복무기간은 일반 군의관과 마찬가지로 기본 군사교육 기간을 제외하고 36개월입니다. 이 36개월 중 7개월은 국내에서 직무교육을 받고 협력지원 업무를 하면서 보내게 되고, 29개월은 국외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1개월 간 현지 언어를 비롯해 교통, 문화, 지리, 안전 및 복무와 관련된 규정 등 적응 교육과 훈련을 거친 뒤 28개월간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국제협력의사는 방글라데시, 페루, 에티오피아, 스리랑카 등 지구 곳곳으로 파견되어 근무하게 됩니다. 대개 한 파견지에 한두 명 정도의 국제협력의사만이 배치되는데, 지역에 따라 지리적, 문화적 특성도 다르고 생활여건도 다르기 때문에 어디로 갈 지를 결정하는 데에도 경쟁의 원리가 적용된다고 합니다.

 -국제협력의사,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언청이는 600명 당 한 명 꼴로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발생합니다. 간단한 수술을 통해 삶의 질을 많이 개선할 수 있는, 비교적 흔한 병이지요. 하지만 수많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언청이를 ‘하늘의 저주’라 생각하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형외과의 영역인 언청이 수술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어요. 대사관에 연락을 취해 언청이 수술과 관련된 책을 구하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현지 대학병원 성형외과 교수와 함께 방글라데시를 돌며 수술을 해 주었지요. 나중에는 ‘언청이 입술의 저주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방글라데시의 가장 유명한 잡지에 1면으로 실리기도 했어요. 떠나기 전에는 후임 협력의사와 현지 의료인에게 언청이 수술에 관련된 지식과 술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제가 떠난 빈자리가 크다면 그것은 제 소임을 제대로 못한 거거든요.”
 외과를 전공한 뒤 KOICA 7기로 방글라데시에 다녀온 박진영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현지 의료인, 후임 국제협력의사와 함께 수술을 진행 중인 박진영 선생님

 국제협력의사의 역할 중 가장 일차적인 것은 파견지역의 사람들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환경은 대체로 열악합니다. 진단이나 치료에 필요한 장비도 부족하고, 현지 의료인의 지식과 기술 역시 미비한 점이 많습니다. 의사의 수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 분야를 넘어서는 의료행위를 해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또 자신이 떠난 뒤에도 그 지역의 의료 수준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지에 나가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현지 의료인들을 교육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네팔의 경우에는 수술 시 집도는 반드시 현지 의사가 하고 파견된 국제협력의사는 보조(assist) 역할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도 있거니와, 그 지역 의료의 발전과 자립을 위해서도 이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국제협력의사는 파견된 지역마다의 법적 문화적 테두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생활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국제협력의사는 민간외교관에 준해서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포교나 정치 활동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배우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하니 그 엄격함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문화생활 등 개인적 활동은 특별히 제한되는 바가 없습니다. 또, 파견 후 1년까지는 파견 국가 내에서만 머물러야 하지만, 1년이 지나면 휴가를 이용해서 주변 국가로 여행도 가능합니다.

 -국제협력의사, 예후가 궁금해요
 36개월의 복무기간을 채우고 나면 거기서 끝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동기들 뿐만 아니라 선후배들과도 연락저와 같은 기수에 의사가 8명이 있었는데, 그 중 5명이 교수가 됐어요. 나머지 세 명은 봉사를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녀오면서 나누는 자의 기쁨을 배워 온 거죠.” 박진영 선생님의 말입니다. “8명 모두가 지식이든 능력이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길을 택한 건 우연은 아닐 거예요. 봉사란 게 그렇잖아요, 주러 가서 받아 온다고…. 교수가 된 것도 그래요. 요즘 교수 하려고 한다고 다 되나요? 국제협력의사 활동을 통해 많이 성장하기도 했고, 병원 측에서도 그 경력을 인정한 거겠죠.”
 의사들을 비롯해 현지인들과 교분을 쌓는 일이 특히 즐거웠다는 박 선생님, 그는 국제협력의사를 마친 지 6년이 지난 지금 나눔의 즐거움을 찾아 또다시 방글라데시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최성욱 기자/울산
<palpitation@e-mednews.com>




 

사형제, 5 대 4의 근소한 차이로 합헌 판결

주요 쟁점에서 큰 의견 차이 보여

 지난 2월 25일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는 사형제도가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5인의 재판관은 합헌판단을, 4인의 재판관은 위헌판단을 내렸다. 재판관들은 여러 쟁점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사형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가?

 우리 헌법은 제 10조에서 국가가 국민의 인권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도록 규정한다. 한편 제 32조 2항에서는 국가가 국가안정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하여 국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기본권을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번 판결에서 헌재는 국가는 중대한 공익보호를 위한 생명에 대한 법적 평가가 예외적으로 허용되며 이런 예외적 상황에서는 생명권 제한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합헌판결을 내린 민형기 재판관은 사형은 인간의 본능을 이용한 가장 궁극적인 형벌로 범죄 억제력이 가장 크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사형제의 범죄예방효과가 많고 적음을 떠나,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헌을 주장한 김희옥 재판관은 사형제도의 범죄 예방효과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지난 12년간 범죄율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통한 범죄예방은 절대적 종신형의 도입, 유기징역형에서 형의 상한선을 상향 조정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사형선고는 지나친 판결이라는 것이다. 범죄의 예방을 위해 사형을 실시하는 것은 국가의 목적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의견도 내놓았다.
 위헌론측은 법관이나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이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무관하게 국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하게 되며 이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합헌론측은 그들이 공직에 몸담고 있는 이상 공익을 위해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헌법이 명문으로 사형제를 인정하는가?

 이번 판결에서 헌법 제 110조 4항의 해석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렸다. 헌법조문에서 ‘사형’이라는 단어는 ‘비상계엄하의 군사재판은 단심으로 할 수 있다. 다만, 사형을 선고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구절에서 단 한 번 등장한다. 합헌론측은 이를 헌법에서 사형제를 인정하고 있는 근거로 해석하였다. 사형이라는 표현이 헌법 조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상 헌법은 문언 해석상 사형을 인정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헌론측은 이 조항은 사형선고를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오히려 사형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킨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또 조대현 재판관은 군사재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사형선고만 예외적으로 허용한 것이라 해석하여 일부 위헌판결을 내렸다.

추가의견으로 입법부에 과제 남겨

 이번 판결에서 재판관들이 내놓은 추가의견도 많았다. 합헌 판결을 내린 민형기 재판관과 송두환 재판관은 사형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형제도의 남용 및 오용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상 범죄를 극악한 범죄로 축소하고 점진적 제도개선으로 문제의 소지를 줄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사형제도의 유지나 폐지의 문제는 국민의 의견을 모아 입법적으로 개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 이후로 사형을 시행한 적이 없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우리나라를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동안 법조계의 의견은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유영철, 강호순, 조두순, 김길태 등의 흉악범죄가 잇따르자 사형제 존치론이 다시 힘을 얻었다. 현재 유영철과 강호순은 사형판결이 확정된 상태이다.

문지현 수습기자/중앙
<jeehyunmo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