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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16 <편집자가 독자에게>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2. 2015.06.16 사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기억은 그 사건만 떠올려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합니다. 2014년 4월 16일, 그 날의 일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오늘 아침의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 날 저는 친구들과 여름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가 보는 건 어떠냐면서 한참 인터넷으로 제주도 배편을 알아보고 있던 중에 한 친구가 갑자기 “야, 제주도 가는 배 침몰했대!”라고 외쳤습니다. 모두가 웃기지 말라고 그게 얼마나 큰 배인데 가라앉냐고, 여행 계획 짜는 데 초치지 말라며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친구가 진짜인 것 같다고, 잠깐 멈추어 보라며 저를 말렸습니다. 연이어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보도되는 세월호 침몰 소식. 도대체 이런 일이 몇 번째냐며 투덜대는 것도 잠시, 엄청난 수의 실종자 수가 보도되고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사망자의 수를 보며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이런 사고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경주 리조트 붕괴사고 등 소설에서 꾸며내도 소름이 돋을 듯한 일들을 겪어내며 자라왔습니다. 그런데도 대형 재난에는 ‘내성’이라는 게 없는 지 세월호 참사에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더욱이 그랬던 것이 제게는 아직도 삶의 낙이 되는 행복한 추억인 수학여행을 가다가 그랬답니다. 학교 동창들끼리 모여서 오랜만에 여행을 가다가 그랬답니다. 그 여행의 종착점이 이 세상이 아닐 줄 누가 조금이라도 알았을까요. 합동 분향소를 방문하던 날, 일면식도 없는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제주도에 배를 타고 여행을 다녀왔고, 그 당시에도 이 배는 왜 이렇게 낡았냐고 불평만 했지 한 번이라도 안전에 대해서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조금이라도 문제 의식을 가지고 건의라도 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만 같은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내가 그 희생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제는 주변을 조금은 더 주의깊게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나는 아니겠지, 내 가족의 일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많았다면 이제는 “언제 내 일이 될 지 몰라, 다음은 내 차례 일 수도 있어” 라는 생각이 더 많아졌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부실하게 매달려 있는 간판을 한 번 더 보고 조심하게 되고, 배를 탈 때는 탈출용 망치와 구명조끼의 위치를 먼저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공공 장소에 가면 소화기, AED, 비상구 위치를 항상 보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예민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을 살려야 하는 예비 의사인 만큼 재난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어야만 할 것 같아 늘 주의 깊에 살핍니다. 국가적인 대형 재난의 발생에는 단연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압니다. 정부의 정책이 변하고, 새로운 정책이 자리 잡히고 실행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변화는 개인 개인의 행동의 변화가 모여 전체의 분위기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의대생 신문의 2만 독자분들의 개개인의 작은 변화가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늘 불안에 떨며 살 필요는 없지만 한 번만이라도 내 일이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온 몸이 오싹해지면서 안전에 대해 신경쓰게 되지 않을까요. 안전 신문고를 활용해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사고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미리 신고하여 예방할 수 있다면 단순히 신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수많은 예비 희생자들을 구해낸 것이니 그 보람도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각종 매체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송하고, 세월호 유가족들의 근황들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될 때 까지 한 동안 잠잠해지겠지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그냥 일회성으로 추모 집회를 열고, 위령제를 지내는 것도 좋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나부터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조을아 편집장/을지 

<medschool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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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0) 2015.06.16

사설

104호/오피니언 2015. 6. 16. 10:09 Posted by mednews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나는 한 끼의 식사에도 의미를 부여하면서 먹는 편이다. 그래서 매일 찾아오는 식사시간마다 이런 고민을 하며 메뉴를 고른다. 집에서 간단히 해 먹을 수도 있고, 근처 간단한 식당에서부터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곳까지 다양한 선택지를 찾아본다. 간단한 김밥 등의 분식류부터 파스타, 피자, 중국음식, 가정식 백반 등. 나를 고민에 빠뜨리는 메뉴들이 정말 많다.

이 고민에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를 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역설적으로 매일같이 해왔던 고민 그 자체의 역할이 컸다. 간단하면서도 선택하기 힘든 답을 찾기 위해 긴 시간 스마트폰을 뒤지며 정보를 찾았고, 직접 가서 먹어봤고, 지인으로부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어느 집의 파스타가 괜찮으며, 저 식당은 가성비가 좋다더라 등등. 덕분에 나는 구체화된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의대생들에게 오늘 점심 메뉴와 같이 참 식상하고도 어려운 질문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단연 으뜸인 것들이 ‘무슨 과 의사가 될 것인가?’와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이다. 벌써부터 지겨움이 느껴지는 이 질문들. 전자는 주로 타인이 질문하는 것에 가깝고, 후자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에 가깝다. 두 질문은 무척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명절만 되면 강제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무슨 과’에 대한 답은 많은 의대생들이 이미 고민하고 있다. 일가친척들이 둘러앉아 모두들 내 입만을 바라보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모두 나름의 대책을 마련해 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실습에서의 경험, 선배들이나 동기들과의 상담, 주변 사람들의 인식, 경제적인 문제, 각종 커뮤니티 등을 통해서 정보를 찾고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 점심 메뉴’ 수준까지는 다양한 선택지를 찾아보았을 수도 있다. 반면, ‘어떤 의사’에 대한 질문은 어떤가. 이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 의과대학에서 이와 비슷한 질문을 갓 입학한 예과 학생들에게 던진 적이 있었다. ‘가장 본받고 싶은 의사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많은 학생들이 이태석 신부나 이국종 교수를 꼽았더랬다. 의대에 입학한지 5년이 되어 이런 질문을 주변 의대생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무슨 답을 하고 있을까? 지금 전공의인 한 친구는 학생 때부터 나는 나중에 ‘로컬의 제왕’이 되겠다고 생각해왔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없다’는 답변이 생각보다 많이 나와 놀라웠다.

이미 많은 의과대학에서는 이 고루한 질문을 바탕으로 의료인문학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의과대학 평가에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많은 학교에서 비교적 한가한 예과기간 뿐만 아니라 본과기간에도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할애하여 이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다양한 매체와 책을 통해 여러 부문의 길을 가고 있는 의사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윤리적 다툼이 있는 문제로 토론을 하며, 책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기도 한다.

물론 문제점도 있긴 하다. 의료인문학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한 교수는 ‘의료인문학을 가르칠만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거의 없다.’고 하기도 했다. 주제에 관한 고민도 있다. 이를테면, 작금의 의료현실을 보여주어 예과생들을 차가운 염세주의자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중요한 포인트가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윤리적인 문제는 관점이나 상황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수 없다. 과거엔 살인과 같은 행위로 비난 받았지만, 지금은 점점 인정받고 있는 ‘존엄사’처럼 말이다. 과거엔 환자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의사가 진정한 의사라고 여겨졌지만, 지금은 ‘로컬의 제왕’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슈바이처를 위인전으로 읽어 왔지만, 요즘은 다른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없다’나 ‘모른다’라는 것이다.

교육자는 이런 수업들의 당위성을 잘 이해하게 해주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양한 관점들을 제시하였으면 좋겠다. 가치판단은 될 수 있으면 고민하는 학생들의 몫이어야 하며, 그것 또한 성급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의대에 입학하였다는 나무라기보다는 최소한 그것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며 생각해보게 해야 한다. 게다가 이런 관점들이 양립 불가한 것도 아니다. ‘배부른 소크라테스’는 왜 안 되는 것인가?

하지만 고민하는 우리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이런 수업의 참여가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주 연속된 시험들 사이에서 귀찮음 직도 하다. 하지만 의과대학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고민은 현실화되어 간다. 아마 실제로 의사가 된 뒤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는 우리들에겐 ‘오늘 점심 메뉴’만큼이나 가깝고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참여하는 만큼, 넓고 다양한 메뉴를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