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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10 [편집자가 독자에게] 무정의술어
  2. 2016.07.10 [사설] 의사들은 왜 불안한가

무정의술어


수학에서 점, 직선, 평면의 개념을 논하지 않고서는 기하학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점, 직선, 평면은 3차원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본질적이고 간단한 개념일수록 정의가 중요하다고 하지요. 새로운 공부를 할 때에 정의를 알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요소라 일컬은 점, 직선, 평면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쉽사리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혹시 우리가 이들의 정의를 배운 적이 있는지, 그 여부부터 판단하여 봅시다.

사실 점, 직선, 평면의 정의의 각각에 대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을 인간의 언어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점, 직선, 평면과 같이 그 자체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무정의술어(undefined term)라 부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잘 짜인 정의보다는 성질 혹은 서로 간의 상호관계를 이용하여 개념이 설명되는 것을 무정의술어라고 합니다. 점, 직선, 평면은 애초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에 관한 정의를 배운 적이 당연히 없습니다.(물론 신적 언어 혹은 조물주의 입을 빌려서라면 이들에 관해 정의 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하학과 처음 만나면서 이들에 관한 정의보다는 성질을 배웠을 것입니다. 예컨대, ‘두 점을 지나는 직선은 유일하게 존재한다’라든지 ‘한 직선 위에 있지 않은 세 점을 지나는 평면은 유일하게 존재한다’ 따위의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고 지시해주는 설명들을 배웠습니다. 물론, 머릿속에 아직 기억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점, 직선, 평면은 각각이 스스로의 정의를 내어놓진 못하지만 상호관계를 이루며 서로에게 완벽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형, 동생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고 아껴주는 듯한 모습입니다. 인간 언어의 한계 때문에 각자에게 정의를 쥐어주지는 못했지만 모자란 점을 서로서로 보완해가며 서로를 끈끈하게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욕심 많은 수학자들이 점, 직선, 평면에게 그 자체의 정의를 심어주고도 싶어 했습니다. 수학자 라이프니치는 점을 보며 “위치가 있고 부분이 없는 것이다”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수학자 유클리드는 선에 대하여 “폭이 없는 길이이다”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정의란 무릇 일대일 대응이 되어야 하건만 과연 우리가 “위치가 있고 부분이 없는 것”이라는 말을 보고 점을, “폭이 없는 길이”라는 문구를 보고 선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만일 저러한 정의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면 인간의 욕심에 의한 비극이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점, 선, 평면 그 자체로도 사실 받아들일 수 있는데 괜히 현학적인 표현을 써가며 개념을 더욱 애매모호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정의내리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인간의 잣대를 들이댈 경우 그 본질이 훼손되는 것을 무정의술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정의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덜 분석적이고, 덜 계산적인 태도를 취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합니다. 무지개를 빨, 주, 노, 초, 파, 남, 보, 7가지 색깔로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빨강색과 주황색 사이의 선홍색을 볼 수 없고 노란색과 초록색 사이의 연두색을 볼 수 없습니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일반 대중에게 전반적으로 퍼지면서 우리는 모든 것에 일일이 과학적 설명을 달려고 애를 씁니다. 특히 의과대학에 진학했다면 과학적 사고의 틀이 더 견고하면 견고했지 덜하거나 그러진 않을 것입니다. 분석하고 정의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적 욕구는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것은 호기심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만함이라 생각됩니다.

무지개 7가지 색깔 사이의 변화되는 것은 관찰하기에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점, 직선, 평면 이 세 개념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아직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인간의 잣대는 잠시 주머니 속에 넣어놓고 현상 그대로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윤명기 편집장

<zzangny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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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의사들은 왜 불안한가  (0) 2016.07.10

[사설] 의사들은 왜 불안한가

110호/오피니언 2016. 7. 10. 12:21 Posted by mednews

의사들은 왜 불안한가


혜성처럼 나타난 알파고가 세계 최강의 바둑기사 중 하나인 이세돌을 꺾은 것이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일이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대국 결과에 열광했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온갖 해석들을 쏟아내었다.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을 연상하며 ‘인공지능 때문에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류의 강경한 주장의 실현은 적어도 아직 수십 년은 먼 일이겠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곧 다가오리라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는 것 같다.

이 막연한 불안과 흥분이 혼재하는 혼란은 의료계에서도 별 예외가 아니었다. 대국의 인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대학병원 의국에도 함께 찾아왔고, 의사들의 높은 관심은 막 새학기를 맞은 PK들에게도 공유되었다. 

‘솔직히 B과는 알파고 같은 게 도입되면 바로 망할 것 같지 않니? 너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 A과는 생각과는 달리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말씀이야. 적어도 앞으로 나 은퇴할 때까지는 안심이지.’ 필자는 우연히 그 B과가 바로 다음 실습이었는데, 그 선생님의 말씀은 이렇다. ‘우리 B과는 저런 게 도입돼도 백년은 안심이야. 이건 도저히 사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사실 A과에 동기가 있는데 그 친구 미래는 좀 걱정이지.’ 

그에 대한 필자의 반응은 이랬다. ‘앞으로는 의대에서 학생 안 받는 날도 생기겠다. 그래도 1년만 더 다니면 졸업하니까 안심이야. 일찍 태어나서 다행이지.’ 다들 다른 의사들 걱정을 해 주며 자신들은 불안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런 높은 관심과 걱정은 스스로의 불안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쇼생크 탈출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문구처럼 ‘심판의 날이 곧 오리라’ 는 사실에는 동의하는 듯하다. 물론 필자를 포함해 나 자신은 괜찮겠지만 말이다. 

의사들은 알파고로 말미암아 왜 불안할까? 프랑스의 유명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Status anxiety)’에서 사람의 불안의 출발은 ‘지위(Status)’에서 오는 것으로 정의했다. 현대에서는 특히 경제적 성취로 대표되는 이 지위는 높을수록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 등을 보장해 즐거운 결과를 낳게 되며, 타인에게 배려 받고 귀중히 여겨지게 된다. 

우리의 불안은 이 지위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은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 한다는 사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낮은 단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실패는 굴욕감을 주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 높은 지위를 평생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이론이 맞다고 전제한다면 의사의 불안은 사다리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구체적인 원인으로 크게 애정결핍, 속물근성,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의 5가지를 꼽았다. 모든 것들이 의사에게도 해당되겠지만 특히나 불확실성이야말로 가장 막연하면서도 의사들에게 쏙 맞는 알파고 쇼크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의사들에게 불확실성은 항상 같은 편이었다. 의사들은 누구에게 갈지 모르는 공부에 관한 재능(최소한 암기력만은)을 얻었고, 의대에 가기 위한 교육, 그리고 다니면서 내야 할 등록금을 버틸 수 있는 부모의 금전운이라는 큰 불확실성에서 이미 승리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어떤 전문직보다도 안정적인 전문직이라는 의사의 길을 가며 한숨 돌리는 중에 알파고라는 복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시대의 지성을 자처하며 근거중심의학을 외치고, 과학의 꽃이라는 의학의 길을 가는 의사에게 인공지능은 모순을 던져주는, 불확실성 그 자체이자 불안의 씨 그 자체인 덩어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인공지능이야말로 과학 그 자체이자 현대 과학의 정수인데, 그것이 가게 될 길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의사들이 당당하게 높은 지위(Status)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전문성 때문이고, 의사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전문성 때문이다. 견고하게 전문성을 바탕으로 누려온 권력들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사람끼리 경쟁할 때는 가장 표준화되고 합리적인 교육체계인 의대/의전원을 졸업한 의사들을 이길 사람이 없겠지만, 인공지능은 이야기가 다르다. 기원 근처도 한 번 안해본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광경을 지켜보았으니까. 

의사들이 불안한 것은 자신들의 의료행위에서 전인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진단, 치료 등 모든 과정의 의료행위들이 프로토콜로 치환되고 알고리즘을 통해 결정된다는 것은 환자들이 가장 치료효과가 좋은 표준화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의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덜 교육받은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다는 말이고, 시간이 더 지나면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의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계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할 수 없는 부분들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환자를 그 사람의 병변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전인의학의 마음은 의료 현대화 이후 가장 먼저 사라져가 희미해졌지만 역설적으로 의사의 전문성을 지탱하는 가장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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