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흑백 사진 : 색이 사라진 사진, 그리고 그것을 찍는 사람들


21세기. 우리는 컬러의 홍수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루에도 핸드폰, 광고, 텔레비전, 유튜브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화려한 색감, 빠르게 변화하는 영상과 이미지들을 접하며 화려하고 순간적인 색깔에 매료된다. 이러한 세상에서 흑백 필름 사진은 세상을 역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흑백사진은 천천히 매료되고 그 시간 속에서 더 깊게 각인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명한 흑백 사진 작가와 그 삶을 통해 그들의 사진 미학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Henri Cartier-Bresson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

-‘결정적 순간’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노력했는데,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으로 유명한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은 원래 미술을 전공했던 화가 출신의 사진가로 기하학적 구도와 비율을 잡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당대 유명한 사진작가들과 국제보도 사진가 단체 <MAGNUM>을 설립했다.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을 이야기할때 그의 유명한 사진집<결정적 순간>을 제외하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결정적 순간”은 그의 사진 철학이 스며들어가 있다. 그는 촬영 대상의 움직임 중 가장 좋은 순간을 가장 적절한 시간에 포착했다. 그것이 대상 자체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순간으로 현실을 조작하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진은 이미 세계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질서가 우리 눈앞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감동을 자아낸다. “스쳐 지나가는 실재의 외관에 모든 능력이 집중되는 순간에 숨을 죽이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그의 사진 미학을 보여준다. 



 

Robert Capa[로버트 카파]

-‘삶의 한가운데’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종군 사진기자 중 한 사람이자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과 함께 <MAGNUM>의 창립멤버이다. 헝가리 출신 유태인인 로버트 카파는 독일로 정치적 망명에 길에 올랐고, 트로츠키의 연설 장면을 촬영하게 되며 사진의 세계로 접어 들게 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시기로, 그는 자연스럽게 보도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가 종군 사진기자 유명해진 것은 스페인 내란에서 총탄을 맞아 스러지는 병사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라이프>지에 실리면서이다. 그는 그 뒤로 중일 전쟁, 제 2차 세계대전, 이스라엘 독립전쟁,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사진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병사들 가까이에서 찍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찍은 그의 사진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 전쟁의 긴장,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그의 사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진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그 때 현상과 인화과정의 문제로 필름이 흔들려서 나왔는데 이는 오히려 전쟁의 긴박감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로버트 카파는 인도 차이나 전쟁에서 지뢰를 밟아 41세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삶을 기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정신을 카파이즘 이라고 한다. 



 

Willy Ronis[윌리 호니스]

-“일상에서의 행복”


“만약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에서, 햇볕이 내리 쬐는 탁자 위 꽃병에 꽂힌 튤립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에서, 집위에 드리워진 구름에서 감동을 받을 것이다.” 

세계 3대 휴머니즘 사진작가이자 프랑스가 사랑한 사진작가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매체에 작품을 게재한 윌리 호니스는 휴머니즘의 가치를 사진으로 보여준 대표적 작가이다. 그는 파리지엥들의 삶과 파리가 갖고 있는 매력을 담은 사진들을 찍으며 파리를 가장 파리답게 표현하는 사진작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사진은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잡아낸다. 빵을 들고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 자극적인 이미지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주변 사람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진에 스며있는 따스함과 사랑스러움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행복감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연필심으로 그려낸 듯한 파리의 모습은 그가 왜 프랑스가 가장 사랑한, 프랑스의 위대한 사진작가인지 알게 해준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시대에, 어떤 사진이 찍혔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돈을 들여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과정에 드는 시간적, 경제적 비용을 생각하면 흑백 필름 사진은 지금 시대와는 동 떨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시기이기에 합리성과 편리성, 화려한 컬러, 빠른 변화를 포기한 흑백 사진에서 향수를 느끼고 색다른 감동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옛 그대로 정지된 듯한 사진은 아날로그적인 감동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흑백 필름의 인화와 현상 과정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빛이 없는 깜깜한 암실에서 오랜 시간 후 나온 흑백 사진은 빠르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과는 동 떨어져 있는 듯 하며 삶의 여유와 기다림의 미학을 느끼게 해준다. 흑백 사진 감상과 함께 그 여유도 함께 즐겨보도록 하자.


박상아 기자/을지

<ann1208@e-mednews.com>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과학 사기극

- 신뢰의 상징 과학, 그 속에서 펼쳐지는 통 큰 사기극


(▲ 필트다운인 화석)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연구와 실험이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나 실험에 책임감 있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과학 발전에 걸림돌만 될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1912년 영국에서는 대단한 위조 사건이 일어났다. ‘필트다운 인(Piltdown 人)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원시 인류의 화석을 발견했다는 한 사기꾼의 제보로부터 시작되었다.

발견 당시부터 조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이 화석은 1953년까지 ‘조상님’ 뼈로 보존되었다. 이 화석은 현생 인류의 머리뼈, 침팬지의 송곳니 그리고 오랑우탄의 아래턱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위조 사실이 밝혀지자 학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무려 40년 동안 가짜 뼈를 귀중한 자료로 모시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이후로도 과학자의 부정행위들은 끊이질 않았다.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얻고 싶어 했던 몇몇 과학자들은 한층 더 대담하게 사기를 쳤다. 다음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던 과학자들의 부정행위는 아시아의 과학이 발전하면서 아시아에도 번져갔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 황우석 사건이 있었고 2006년 일본에서는 다이라 가쓰나리 사건이 있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연구결과를 발표했지만 결론은 사기행각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일본에서 논문 날조 사건이 터졌다. 오보카타 하루코(왼쪽 사진)라는 무명의 젊은 여성 과학자가 동물의 몸에서 떼어 낸 세포를 약산성 용액에 잠깐 담그는 자극만으로 간단하게 만능세포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3대 과학저널’로 불리는 네이처에 실리면서 황우석 쇼크 이후 지속적인 하향 곡선을 그리던 줄기세포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한 그녀가 속한 이화학연구소(RIKEN)가 일본 최고의 기초과학연구소이고 연구소 소장 노요리 료지가 2001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라는 점도 그녀의 행보에 전 세계가 주목하도록 해주었다. 일본 열도는 삽시간에 ‘오보카타 신드롬’에 휩싸였다.

그러나 영광과 열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논문이 기재된 지 2주가 채 안된 지난해 2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소속 연구사가 논문 조작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화학연구소에서는 연구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사를 시작했고 같은 해 4월 1일 2개 항목에 대해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 조사위는 조사 결과 논문이 ‘창작’에 가깝다고 밝혔다. 논문에 포함된 그래프가 일일이 손으로 점을 찍어가며 만들어진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2014년 7월 2일 네이처는 “논문이 조작됐다”며 논문을 철회했다. 오보카타 박사의 멘토이자 논문의 공동 교신저자인 사사이 요시키 이화학연구소 발생재생과학 연구센터 부소장이 논문 철회 한 달 후 자살을 하며 이 사건은 비극으로 끝났다. 2015년 1월 26일 이화학연구소의 최종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오보카타 박사가 박사학위를 위해 작성한 논문 역시 날조된 것으로 밝혀져 와세다대 역시 조만간 박사학위를 철회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이다.


윤명기 기자/한림

<zzagnyun@e-mednews.com>



지역감정,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역감정의 변천사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가수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의 노랫말 중 일부이다. 이 노래는 호남과 영남 지역 간의 ‘동서화합’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들 말하는 ‘지역감정’을 잊고서 화개장터에 놀러 오라는 내용이다. 어찌하여 이 좁은 한반도에서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동서화합’을 이루어내자는 노래가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혹자는 삼국시대의 영토만 봐도 동쪽의 신라와 서쪽의 백제가 서로 나누어 통치했기에 당연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현재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진정 삼국시대부터 기원했다는 설이 타당한지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1 

-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지역감정


전라, 충청, 경기 지방은 백제가, 경상, 강원지방은 신라가 그리고 황해, 평안, 함경 및 만주지방은 고구려가 통치해왔다. 그러나 서기 675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어 내면서 한반도 전역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바로 자연스레 정통 신라인과 패전국인 백제, 고구려 지역민들 사이에 계층이 생긴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는 피정복민 차별정책을 펴서 지방에 살던 옛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아무리 성공해봤자 현재의 면사무소장 급인 진촌주층으로 대우했다고 했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때부터 수도인 경주 내에 살았던 왕경인(王京人)과 경주 바깥에 살던 신라인으로 계급을 나눈 신라에서 피정복민 차별 정책을 실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2 

- 고려시대의 지역감정


통일신라가 후삼국시대를 거쳐 왕건에 의해 고려로 재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한 번 지역 계층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고려사의 기록에서 왕건은 “문제를 일으킨 곳은 앞으로 향소부곡으로 지정해서 거주 이전을 제한하고, 기본 세금이외에 추가 세금을 부담토록 하라” 고 명했다. 당시 왕건에게 가장 위험한 곳은 후백제의 근거지였던 백제 유민이 살던 충청 및 호남지방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한 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하 : “이것이 지난 목천(충남 천안) 지방에서 일어났던 반란자의 명단입니다.”

왕건 : “어디보자. 반란자들 주제에 성씨를 가진 자들이 많구나. 이 자들의 성을 다음과 같이 우(于)는 우(牛)로, 상(尙)은 상(象)으로 돈(頓)은 돈(豚)으로, 장(張)은 장(獐)으로 고치도록 하여라.”

풀이하면 우(牛)는 소, 상(象)은 코끼리, 돈(豚)은 돼지, 장(獐)은 노루를 뜻하는 한자이다. 물론 반역자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왕건의 유언과도 같은 “훈요 10조”의 내용에는 “차령산맥의 남쪽 (충청 호남 지방)의 공주강 (금강)외는 산형지세가 배역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이라는 내용을 통해 그가 확실히 충청 및 호남지방을 차별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3 

- 조선시대의 지역감정 (1)


고려의 몰락 이후 조선시대의 지역 간 대립은 독특하게도 “학파”와 연관 지어서 설명 할 수 있다. 유교 경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따르는 영남학파는 주로 동인 세력이었고,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따르는 기호학파는 주로 서인 세력이었다. 그런데 “정여립의 난(선조 22년, 1589)”을 통해 동인과 서인간의 정치 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부르며, 3년여에 걸쳐 정여립과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가 사형 혹은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여립이 전주사람이었고, 많은 호남 지역 유생이 동인에 속했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 호남 출신은 관직 진출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국의 과거시험 합격률이 서울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였으나, 기축옥사 이후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기 전 까지 기간은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에 머물렀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3 

- 조선시대의 지역감정 (2)


조선시대 지역 간 대립은 “학파” 이외에도 “민족”간의 갈등과 “지리적 이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 남쪽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서북지방(황해, 함경 지방)의 사람들은 여진족의 후예, 즉 오랑캐라는 풍문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대대적인 북진 정책을 펼치면서 이 서북 지역의 여진족들이 대거 조선으로 흡수 유입되었기 때문에 생긴 풍문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산세가 험악하다는 지리적인 이유로 서북지역의 성장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서북지역은 조선에서는 유배지의 개념이 강했고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까지 철저히 배제된 곳으로 존재했다. 택리지에는 “서북민은 설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종5품에 지나지 않는다.”, “문벌을 중하게 여기는 한양사람들은 절대로 서북민과 혼인하지 않으려 한다.” 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시간이 흘러 조선 후기에 이르자 상태가 더욱 심각해져서 18세기 경 정3품인 당상관 후보자 명부에 조차 서북지방 출신은 한명도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을 뒤엎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순조 11년, 1811)”이다. 홍경래는 청천강 이북 8군을 점령하지만 이후 관군에 패해 무위로 끝났으며, 오히려 서북지방은 반역의 땅으로 여겨졌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4 

- 현대시대의 지역감정 (1)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직후 우리 사회에는 남북의 이념대립은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영남 대 호남”과 같은 구도의 지역감정이 심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963년 제 5대 대통령 선거(국민 직선제)의 결과를 살펴보면 오른쪽 그림과 같다. (노랑-윤보선 우세/ 파랑 - 박정희 우세) 박정희와 윤보선의 양강구도로 펼쳐진 이 선거에서 영남과 호남에서는 압도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했다. 전체 총 투표 수가 1100만 표였는데, 두 후보간 표 차는 15만 표에 불과했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전남에서 약 28만 표, 경남에서 36만 표, 경북에서 36만 표를 더 얻었기에 “겨우” 당선된 것이다. 이 승리는 최근 정치 풍토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유형의 승리였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말하는 영호남 갈등은 적어도 투표에서 만큼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당선된 이후 경상도를 중점적으로 개발하여 (농토가 풍족했던 전라도보다 척박한 경상도를 우선적으로 개발했다는 주장도 물론 있다.) 호남의 민심을 많이 잃었고, 호남 지역을 차별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4 

- 현대시대의 지역감정 (2)


제 7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공화당 소속 박정희, 신민당 소속 김대중의 양강구도로 펼쳐졌다. 대선 유세기간 중에 서로간의 지역감정을 노골화하는 발언들이 상당히 많았다. 민주공화당에서는 “전라도 대통령을 뽑으면 경상 푸대접 내지는 보복이 온다”고 선전했고, 신민당은 "전라도에서도 이번에는 꼭 대통령을 내어 푸대접을 면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선거 막바지에는 영남 지방에 “전라도여 뭉쳐라”는 전단지,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전단지 등이 나돌아 영남 지역주민의 의식을 자극했다. 뿐만 아니라 1971년 4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효상 국회의장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는 언급을 하였다. 이효상은 박정희 지지 찬조연설에서 “쌀밥에서 뉘가 섞이듯이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경상도 사람 중에서 박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이다.”라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결국 현재와 같은 지역감정의 극한 대립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거를 목적으로 정치가들이 이를 상습적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짙은 것으로 판단된다. 특정 지역의 자원 배분 집중이나 소외 등이 실재하거나 실재한다고 느낄 때 지역주의가 나타난다는 점을 정치가들이 포퓰리즘 성격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이 지역감정에 이끌려서 투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때문에 지역감정을 ‘망국적인 고질병’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많다. 


강상준 기자/서남

<myidealis@e-mednews.org>

블랙커피야, 나를 춘곤증에서 벗어나게 해줘!


봄이 찾아오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1교시 수업을 듣든지 점심 먹고 나서 수업을 듣든지 밤에 잠이 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잠신이 짓궂게도 나를 찾아온다. 이런 춘곤증을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데 그 중에서도 커피요법을 흔히 찾는다. 하지만 시중에 파는 커피 성분을 확인해보면 내가 지금 설탕물을 먹는 것인지 아니면 커피를 먹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열량이 높아 살만 찌우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 것이다. 이러한 고민에 빠진 의대생들을 위해 “블랙커피의 쓴맛”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런데 막상 블랙커피를 마시러 편의점에 들어가 보면, 종류도 많고 가격도 다양해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블랙커피 무엇을 어떻게 마셔야 할지 모르겠다면 꼭 아래 표를 참고하길 바란다.


1. 가격도 저렴하고 편리하기까지 한 스틱형 블랙커피




2. 직접 타먹는 게 귀찮다면 완제품을!





강상준 기자/서남

<myidealis@e-mednews.org>

IS, 전 세계를 적으로 삼은 패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온갖 비극으로 가득했던 2014년을 뒤로 하고 희망으로 맞은 2015년은 그 바람대로만 시작하지는 않았다. 2015년 1월, 프랑스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했고 그것은 이슬람 급진주의자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슬람 국가(이하 IS)와 알카에다의 합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프랑스는 IS와 전쟁을 선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한 청소년이 터키를 통해 IS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어 한국 전역이 술렁였다. 곧이어 일본 정부에 몸값 2억 달러를 내지 않으면 일본인 인질 2명이 살해될 것이라는 동영상이 유포되었다. 2월이 시작되자마자 세계는 일본인 인질 참수를 목격해야만 했으며, 며칠 후 공개된 요르단 공군 조종사 화형 동영상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IS는 좋지 않은 의미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IS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익숙하게 되었으며, 심심치 않게 유명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에 오르고 있다. IS에 관련된 글은 삭제되거나 볼 수 없게 필터링되고 있다. 그러나 IS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IS의 출발과 급성장


IS는 2006년 알카에다 이라크지부로 수니파 거점 지역에서 결성되었다. 이슬람에는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양대 종파가 있으며, 이 중 수니파가 90%에 달하는 압도적 다수파이다.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 시아파가 다수파인 국가는 이란과 이라크를 비롯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라크의 경우 시아파가 60%로 다수파이지만 건국 이래 정권은 20%인 수니파가 독점해 왔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이후 선거를 치르면서 정권이 시아파에게 넘어가면서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아랍 국가에서 시아파 정권이 탄생한 것은 830년만의 일로 수니파의 충격은 상당했고 이라크 내의 수니파 및 주변 수니파 국가들의 저항이 시작되며 이라크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이라크 수니파가 미국에 협력하기로 태도를 바꾸면서 알카에다 이라크지부는 유명무실화되었고 이 즈음에 IS의 현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알카에다 이라크지부의 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바그다디는 미군에 의해 축출된 이라크 수니파 장교들을 영입해 세를 늘려가면서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를 결성하게 된다. 이후 조직 주도권을 두고 내분이 일어나 알카에다 이슬람 지부가 현재의 IS가 되었으며, 알 카에다로부터 지하드 운동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게 되었다.

IS는 시리아 내전을 통해서 급성장하게 되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시리아 내전은 시아파 분파 정권인 아사드 정권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내전으로,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국가들은 반군을 도우면서 많은 군수 물자를 지원하게 된다. IS는 이 군수물자들을 빼앗거나 돈을 주고 확보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IS는 시리아 반군 세력 중 최강의 부대가 되었다.


IS의 영향력


스스로를 ‘이슬람 국가’로 칭하고 있으나 IS는 국제 사회에서 거대한 테러 조직에 가깝다. 그러나 여느 식상한 테러 조직쯤으로 보기에 IS의 세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IS는 시리아 내전을 바탕으로 시리아에 충분한 기반을 형성했으며, 이후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라크군에 승리하게 된다. 이라크군은 부패로 인해 군 기강이 매우 해이한 상태였기 때문에 변변한 전투 한 번 치루지 못하고 이라크 제2 도시인 모술을 IS에 내주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 내부의 수니파 신도들은 타협을 포기하게 된다. 급진주의자인 IS는 이라크 시아파 정권에 합류하려는 이라크 수니파 신도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라크 수니파 신도들은 무장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동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며, 점차 세를 불려 나간 IS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인근 수니파 국가에도 큰 위협이 되고 있어 중동에 새로운 세력 구도가 형성되게 된 것이다.

IS는 지역민들에게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있다. IS는 최소 800만명의 시리아인과 이라크인들에게 각종 수수료 징수와 강탈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고, 시리아에서 점령한 8개의 유전에서 채굴된 석유와 가스들로부터 막대한 수익을 얻고 있다. 시리아 반군들은 IS가 장악한 유전들에서 하루 3만~7만 배럴 정도의 석유가 생산되는 것으로 추산했으며, 글로벌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경유는 배럴당 최대 60달러까지 판매되므로 IS는 이를 통해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의 테러 조직들과는 구별되는 점이다. 기존의 테러 조직들은 급진주의자 신도들이나 후원자들로부터 자금을 마련하였으나, IS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체제를 확립함으로서 전 세계를 향한 무장 투쟁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IS는 대중 매체와 SNS에 계속적으로 자극적인 장면을 노출함으로서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는 한 편, 잘 조직된 이미지들을 통해 매력적인 이슬람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계속 형성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이후 종교적 구심점을 잃고 장기적인 실업에 좌절한 중동 주민들은 이 같은 IS의 행보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IS의 과격한 행보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할 수밖에 없어 조만간 한계에 봉착할 것으로 보인다. IS의 잔인성으로 인해 후원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수니파 지지자들 중에서도 IS의 과격함에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어남이 보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방 국가에서도 점점 퍼져나가는 IS를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에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IS의 영토 확장은 저지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아직까지는 IS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격한 행보를 지속하고 있으나, 그것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미지수이다.


허기영 기자/서울

<zealot648@e-mednew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