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Search

'81호(2011.06.08)/커버스토리'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6.10 시키는 문화, 시키면 하는 문화

의대생 톡톡

시키는 문화, 시키면 하는 문화

실습학생 3인방, 병원 내 부조리를 말하다

사례 1.  A대 병원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일명 ‘번역 내과’로 통하는 곳이 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외국 교재를 나눠주고 번역을 시키기 때문. 용어 통일, 기한 엄수, 오탈자 점검 등 엄격하지만, 이것을 ‘번역 알바’ 쯤으로 여겨선 곤란하다. 무보수 강제노역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게 완성된 책이 출간되기라도 한다면, 독자는 과연 우리의 숨겨진 노고를 알아주기나 할까.

사례 2.  B대 병원 학생휴게실에는 어느 날 모 의국에서 새로 만든 교과서가 상자째 배달되었다. 이미 수업도, 실습도 끝난 마이너 과목의 책이 왜 여기로 온 걸까. 과대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한 권에 X만원인데 모두 사야 한대.” 이게 말로만 듣던 강제구매? 우린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뽀로로 : 병원에서 학생으로서 겪는 억울하고 부조리한 일들은 이거 말고도 진짜 많지.
거성 : 그런데 일단 ‘부조리하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 거야?
뽀로로 : 학생이 안 해도 될 일을 시키는 것, 그중에서도 웬만큼 참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거!
루피 : 학생에게 교육적인 목적을 벗어난 일을 시키는 것 전부, 그리고 학생을 일꾼 내지는 자기가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숨겨진 착취

루피 : 전에 산부인과에서 피부관리, 지방제거에 대한 환자 홍보용 글을 타이핑 시키려고 부른 적이 있었어. 그건 학생 교육을 위한 건 전혀 아니잖아.
뽀로로 : 그런 잡일은 사실 많이 시키는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어쩌다 한번 하는 건 그냥 넘기지 않아? 번역은 한철 장사가 아니고 사시사철 장사야. 모든 실습생이 해야 해. 그리고 후배에게 물어보니 같은 일을 예과생들한테도 시켰는데 그게 중간고사 대체였대. 도서관에도 없는 외국교재를 번역하느라 그 책을 공동구매 할까 까지도 생각했었대.
거성 : 중간고사 대체는 심했다.
루피 : 우리도 번역하는 파트가 있어. 논문을 번역하는데, 양이 어마어마해. 일주일에 50장 정도. 하지만 아무도 그걸 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고 있어. 교수님 공식적 입장은 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인데, 공부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야. 그래서 결국엔 다 처리를 못 하고 같은 조 학생들이 나눠서 해.
뽀로로 : 우리도 목적은 “너네 공부시키려고”. 하지만 정황상 출판을 위한 번역인 것 같아.
거성 : 교수님들이 논문 번역이 필요한가? 보통 영어 원문으로 보시지 않아? 정말 공부시키려고 하시는 것일 수도.
뽀로로 : 그럼 번역, 논문 외에 인턴 일 시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저번 주에 새벽 6시에 와서 드레싱 했다며.
루피 : 사실 난 처음 해보는 거니까 재미있긴 했어. 그런데 우리가 마음대로 드레싱을 해놓으니 피해는 환자가 보는 것 같아. 어떻게 하는 건지 제대로 알려주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침묵의 피드백 시간
우린 찍히는 게 더 무서워

거성 : 그런 건 보통 피드백을 거치지 않아? 우리는 실습 마지막 날에 환자 발표를 하고 교육담당교수님과 피드백 자리를 가져. 이건 어떻게 하면 좋겠고, 이건 이렇게 바꾸면 좋겠고. 절대 “감히 그런 말을!” 하는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야. 자유롭게 정말 실습을 위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야. 그리고 교육담당교수님은 보통 시니어 교수님께서 맡으셔서 학생이 실습에 대해 건의를 하면 그 과로 바로 전달돼.
루피 : 우리는 그렇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야.
뽀로로 : 직언을 하면 바로 찍힐 것 같아. 모든 교수님, 레지던트들한테.
루피 : 맞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모두가 선후배로 얽혀 있고 건너건너 얼굴을 아는 사이라서 소문도 금방 나고. 그래서 잡일 시키는 선생님이 있더라도 아는 선배이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도 뭐해.
뽀로로 : 교수님이 막상 하고 싶은 얘기를 해보라고 하셔도 말 꺼내기가 어렵기도 하고, 또 얘기가 길어지면 조원들과 레지던트들이 다 싫어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생략할 때가 있어.
루피 : 레지던트로부터 아예 질문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 경우도 있고.
거성 : 그럼 질문을 많이 해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면 실습 점수를 낮게 줄 수도 있는 거네?
뽀로로 : 그렇지. 예전에 과외 학생이 병원실습은 어떤 거냐고 물어봐서 “무수리처럼 교수님을 따라다니는 거야”라고 대답해준 적이 있어. 너무 수동적으로 흘러가는 느낌이라서.
거성 : 학생이 능동적으로 실습 전에 공부하고 가고, 교수는 학생이 왔을 때 가르쳐주는 자세가 되어야지. 그런데 능동적 실습은 못 될망정 오히려 수동성이 강요되는 상황은 잘못된 것 같아. 잡일 시키는 것도 놀라운데, 피드백이 없다는 건 정말 놀랍다. 우리는 배우기 위해 병원에 돈 내고 다니는 사람인데 학생을 위한 피드백이 정확히 안 짜여 있고, 그게 반영도 제대로 되지 않는 건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루피 : 돈 내고 다니는 사람인데 병원에선 ‘짐짝’ 취급받잖아. ‘병풍’이라고도 하고.

시킴의 대물림,
그 고리 끊을 순 없을까

뽀로로 :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나중에 레지던트나 교수가 되면 어떻게 할 거 같아?
루피 : 그때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상황이 너무 싫어서라도 안 그럴 거 같아. 그런데 벌써 후배들한테 번역 과제를 넘겨주는 애들도 있어.
뽀로로 : 그럼 후배들이 군말 없이 해?
루피 : 선배가 시키는 건데, 그럼. 그런데 내용을 잘 모르니까 번역을 엉성하게 하지. 예를 들어 CRF를 ‘신장실패’라고 한다든가.
뽀로로, 거성 :하하하
루피 : 워낙 예과 때부터 선배들이 시키면 하다 보니 그런 문화에 익숙해진 것 같아. 습관이 됐어. 그래서 자기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시키고, 또 시키면 하고. 자기 일을 미루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뽀로로 : 시키는 문화가 만연하긴 한데, 정말 문제 되는 소수는 정해져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니까 그 과를 돌 때만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꾹 참고 넘어가다 보니 그 관행이 안 바뀌고 계속 이어져 오는 거야.
거성 : 종으로 횡으로 개인이 체제에 대해 얘기하는 게 막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윗사람이 어떻게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또 친구들이 “쟤는 왜 저런 걸 얘기해”라고 하는 분위기까지 형성되면 그걸 깨기가 어렵지.
루피 : 친구들이 피드백을 까칠하게 하거나 하면 “우리도 다 했는데, 쟤는 왜 저래”하고 바라보는 시선을 고쳐야 할 것 같아.
뽀로로 : 가르침의 대상인 학생이 그 목적에 벗어난 일을 거부했을 때 복수나 응징이 가해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서도 안 되겠고 말이야.

정리 : 정다솔 기자/중앙
<astronova@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