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심리학, 사회생물학 - 한번쯤은 갸우뚱 하게 되는 단어들입니다. 경제와 심리, 사회와 생물이라니. 하지만 이들은 뒤에 ‘학’자가 붙은, 엄연한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경제 심리학은 경제생활을 중심으로 인간의 생활 형태나 태도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사회생물학은 집단유전학과 개체군생태학을 통합한 현대적인 자연선택이론을 기반으로 동물의 사회행동이나 사회현상을 ‘유전적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겉보기엔 어색한 조합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잘 어울리지요. 요즘은 이런 ‘통합’이 대세입니다. 학문의 세 갈래 -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 내에서의 통합은 물론, 각 분과 간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통섭’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쌓아온 모든 지식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고, 이를 알기 위해 학문 간 교류와 통합을 역설했습니다. 통합이 이뤄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윌슨은 통섭을 가장 적절한 모델로 제시합니다. ‘통섭’에는 그가 생각하는 통합의 모습이 드러나 있지요. 이번 스터디에서는 윌슨의 통섭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섭 : 인간을 이해하는 통로
통섭은 19세기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휴얼에 의해 처음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그는 통섭을 ‘jumping together’, 즉 ‘더불어 넘다든다’로 정의했습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서로 다른 현상으로부터 도출되는 원리들이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는 학문의 성장을 강에 비유하여, 작은 지류가 모여 큰 강의 줄기를 이루듯 학문의 여러 갈래가 서로 합쳐져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휴얼의 통섭은 ‘융합적 통섭’입니다. 이는 윌슨의 통섭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하나로 합쳐진 강줄기 속에는 각각의 냇물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윌슨의 통섭에서는 여러 학문이 각자의 형상을 유지하며 그들 모두에게 통용되는 어떤 ‘진리’를 공유합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각 학문은 엄격히 분리되거나 하나로 뭉뚱그려진 상태가 아닌,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생동하는 존재가 됩니다. 사실 이와 같은 ‘교류’는 얼마 전 부터 꾸준히 일어나왔습니다. 1970년대 초 인지심리학, 인공지능, 언어학 등이 서로 협력하여 생겨난 인지과학이나, 최근 진화와 발생을 한데 엮어 설명하는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Evo-Devo)의 등장이 그 예입니다. 인지과학이나 이보디보에 몸담고 있다 해서 본래의 학문분야 - 언어학, 인지심리학, 진화학 등 -와 그 분야의 성과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각 분야에서 얻은 지식, 연구기법 등을 적극 활용하여 연구를 수행하고 있지요.
윌슨의 통섭이 특별한 이유는 그러한 교류의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윌슨은 그 진리를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라고 여겼고, 그런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써 ‘자연과학적 환원주의’를 제시했습니다. 다시말해서 ‘인간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어떤 학문도 견고할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많은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들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이성이나 마음에 관한 논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도맡아 왔었습니다. 하지만 윌슨은 그런 논의 중 상당수가 주관적이고, 확실히 검증되지 못한 것이라고 여겼지요. 예를 들어 경제심리학에서 활용하는 심리학 지식들 - ‘사람들은 ~한 상황에서 ~하는 경향이 있다’ 등 -은 대부분 경험상 ‘그렇다’고 여겨질 뿐, 검증되지 못한 세간의 속설이 대부분입니다. 이에 대해 윌슨은 인간의 정신을 해부학적, 생리학적인 현상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고, 유전적 성향과 그에 따른 주위 환경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얻어낸 정보가 인간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인간의 신경회로 매커니즘이 완전히 밝혀지고 신경회로의 작용양상이 ‘대체로 선한 경향’을 보인다고 판단된다면, 성선설이 옳은 이론이 될 수도 있겠지요. 윌슨은 인간에 관한 ‘머릿속 이론’이 아닌 인간의 객관적인 형태와 구조에 기반한 인간이론은 어느 분야에서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 관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통섭의 화두 : 마음과 문화
하지만 ‘사람은 눈이 두 개, 코가 한 개, 입이 한 개’ 라는 사실만으로는 인간존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마음을 구성하는 세포적인 사건’을 밝히는 것은 윌슨의 통섭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가령 ‘기쁘다’, ‘슬프다’라는 감정을 느낄 때의 신경회로 매커니즘이 밝혀진다면 뇌의 물리 과정들이 어떻게 주관적인 감정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신경회로 양태를 비교해봄으로써 ‘공감한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의 범위를 좀 더 확장해봅시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윌슨은 ‘유전자-문화 공진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인류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병행해왔으며, 두 진화가 상호작용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입니다. 두 진화는 후성규칙에 의해 매개됩니다. 후성규칙이란 어떤 자극에 민감하고 어떤 기억이 오래가는지,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지를 결정하는 유전적인 성향, 즉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뜻합니다. 문화는 어떤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질 지 결정하는 것을 돕고, 그 결과 살아남은 새로운 유전자는 개체(군)의 후성규칙을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변화된 후성규칙은 다시 개체의 문화적 선택,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문화의 진화가 일어나도록 돕게 되지요. 여기서 ‘문화’의 범주는 연구대상에 따라 가정, 학교, 회사, 지역 또는 국가 등 다양하게 설정될 수 있습니다.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은 ‘마음’ 연구에서 밝혀진 자연과학적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하여 올바르게 추리될 수 있겠지요.
불가피한 ‘가치의 부재’
9장 사회과학 편에는 의학에 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와 있습니다. 윌슨은 극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학과 그렇지 못한 사회과학을 대비시키면서, 통섭이 잘 이뤄지고 있는 학문의 한 예로써 의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자는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질병을 물리화학적 수준에서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러한 객관적인 정보를 기반으로 과학적인 치료계획을 수립합니다. 확실히 현대의학은 인간탐구에 대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꽤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요.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도 안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현대의학으로 질병의 ‘원인’을 찾을 수는 있지만 ‘무엇이 건강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몸의 상태를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윌슨은 ‘가치’와 관련된 문제들 중 상당수를 관념적인 언쟁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인 자연과학적 사실들을 기준으로 인간과 사회현상을 분석, 정의하려고 시도했지요. 그는 윤리나 종교, 예술도 유전자-문화 공진화에 의해 그 양상을 완벽히 분석하면 향후 그들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예측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측뿐만이 아닙니다. 인간 본성을 논함에 있어 ‘인간이라면 어떠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빠져선 안 되겠지요. 하지만 이 질문을 윌슨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통섭 범위를 넘어선 개념으로 여긴 탓인지 책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학문에 임하는 ‘자세’로서의 통섭
이런 가치관의 문제 이외에도, 윌슨의 통섭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시선은 꽤 많습니다. 이 중에는 통섭의 결과 마음의 세포적 매커니즘이 완전히 밝혀지고 문화현상이 완벽하게 분석되어 인간이 완전히 ‘과학적’으로 인식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테이프를 끊은 통섭의 마지막을 예측하는 것은 이른 감이 없지 않고, 확실치 않은 추측으로 통섭론을 논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혹자는 윌슨이 통섭을 외치면서 ‘더 잘게 쪼개는’ 환원주의를 강조하는 것을 모순이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통섭에서의 환원주의는 기존의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다루던 사회나 인간 정신의 거시적인 현상들을 인간, 혹은 세포 단위로 분석하여 더 객관적인 매커니즘을 추론해보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윌슨이 사용한 ‘환원주의’는 본래의 관념적 의미보다는 ‘“왜” 라는 의문을 갖는 자세’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
‘통섭’의 의의는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 자연과학의 위상을 재조명한 것입니다. 윌슨은 관념적인 논의를 최대한 배재하고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을 통섭의 목표라 여겼습니다. 현재의 통섭개념은 가치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줄 수 없고, 그 끝에 인간이 어떠한 모습으로 남을지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점을 분명히 인식하고서 긍정적인 부분을 수용한다면, 다른 학문에 대한 편견을 줄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윌슨의 통섭이 인간에 관한 학문에 임하는 자세로써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스터디를 마칩니다.
김정화 기자/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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