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체계를 치료하는 의사
박영숙 분당구청장님을 만나다
지난 5월 2일, 최초로 의사 출신 구청장이 탄생했다. 지방자치 단체를 대표하고 구의 모든 행정을 책임지는 구청장은 사람 살리는 의사와 너무도 멀어 보인다. 보건의료 행정만 대변하는 분야도 아니고 우리에겐 쉽지 않은 그대이다. 현실적으로 의대 졸업생이 택할 수 있는 진로 선택지에 아직은 생소한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박 구청장님이 밟은 길을 취재해보았다.
- 약력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원광의대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인턴 1년을 한 뒤에 파주시 보건관리의사가 되었어요. 그 뒤에 경기도 의사 보건소장, 보건정책과장을 지냈고 관리의사 모임 조직에 앞장섰지요. 그 뒤 일산에서 수원 보건정책과장, 미국 연수 1년, 분당보건소장을 거쳐 이번에 분당구청장이 되었고요. 보건소장은 일반적으로 자리를 잘 안 옮기는데 좀 특이한 편이예요.
- 의사출신 최초로 구청장이 되셨는데, 이 자리에 오기까지 쉽지 않았을 듯 해요.
의사출신, 여성이라는 신분으로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학연, 지연 아무것도 없는데다 성남시 사람들 중 의사가 딱 둘, 경기도에선 삼만명 중 하나였으니, 내 편 들어줄 사람도 없었지요. 그 편견을 넘으려고 적어도 일하나는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 노력했어요. 우울증에 빠진 적도 있어요. 모함, 시기, 질투는 말할 것도 없고, 성격이 활기차면 나댄다, 조용하면 맥아리가 없다 식이예요. 제가 여자지만 여성성을 안 나타내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다보니 애교도 없고, 싫은 건 싫다 표현하다보니까 건방지다는 말도 하더라구요.
“의사는 나가서 개업이나 하지
행정은 무슨..”
개인의 능력이 아닌 배경으로
판단되어 어려움 많아
행정직들은 순탄하게 올 수 있는 자리예요. 별탈없으면 정년까지 하고 나갈 수 있어요. 다른 행정직 사람들은 줄줄이 하나 올라가면 다같이 올라가는데 난 혼자니까 공무원조직에서 내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던 거죠. 또 전 특정 당을 편들지 않는데, 서로 연줄따라 민주당 한나라당 등 편갈라서 싸우게 되는 경우도 적지않아요.
- 의사들이나 관련협회 사람들은 도움을 준 편인가요?
오히려 지역의사들까지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공무원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을 할 수는 없잖아. 내편을 만들기 위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는데 만약 내가 하나의 이익단체인 지역의사를 위해서만 일했다면 아마 더 심하게 배척당했을 거예요. 공무원도 의사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건 같은데, GNP에서 차지하는 의료비 절감이라는 공공의 목표를 추구하는 점이 개업가의 의사집단 내 이익증진이라는 목표랑 조금 달랐던 거죠.
아직은 과도기적이라 생기는 일이라 생각해요. 이런 입장차이도 많은 의사들이 공공의료분야로 오면 소통의 기회가 많아져서 오해가 줄겠지요.
- 힘든 일이 많았네요. 이 길을 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 의대졸업하고는 개업가 아니면 종합병원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 길이 여러모로 대우는 받지만 재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보건소장은 의사보다 지역주민을 직접 이해할 수 있었거든. 그렇게 93년도 보건소장을 고양시에서 3년쯤 하다보니까 96년도에 광역행정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결국 꿈을 15년 만에 실현시킨 셈이네요.
- 저희 의대생들이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소장, 구청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지금은 관리의사에 지원해서 보건계열 공무원으로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길 뿐이예요. 특별히 의사 라이센스를 가진 사람을 뽑는 전형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관리의사는 일종의 비정규직, 계약직이라서 월급도 적으니까 지원하기가 쉽지 않아요.
- 그러면 인턴, 레지던트 수련이 별 도움되지 않는 거네요?
나는 인턴 레지던트까지 수련 안해도 되었어요. 만약 레지던트 수련하고 한 직업에만 픽스되어버리면 광역 행정을 하기에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다 생각해요.
- 대학원 학위가 있으신데 굳이 학위를 딸 필요는 없는 건가요?
따로 학위를 받을 필요는 전혀 없어요.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 하지만 행정적 마인드를 배우는 데는 어느정도 도움이 돼죠. 만약 공공행정직으로 진출할 생각이 있다면 당장 실질적인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따지기보다 일단 많이 배울수록 좋다고 봐요.
- 의사출신이라서 구청장 일을 하는데 도움되는 부분도 있을까요?
막상 행정해보니 오히려 우리가 하기에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지역주민의 요구를 잘 이루는 것 건강하게 잘 살게 하는 것. 돈, 정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틀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거기엔 의사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거든요. 우리는 과학적으로 수술하고 치료하잖아요. 행정에 들어와서도 그런 치열함과 섬세함을 접목시키면 충분히 잘할 수 있어요.
- 의사출신 공무원이 많아져야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이죠. 21세기는 건강이 제일 중요시되는 시대잖아요. 거기에 바로 우리 지식이 요구되는 건데 의사들이 그 지식을 활용하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또 의사 출신 공무원이 늘어날수록 의사들의 목소리를 정부가 반영하기 수월하죠.
- 그치만 의사출신 공직, 정부기관 진출자가 많지 않죠?
맞아요, 보건계열 공무원엔 약사출신도 거의 없고 간호사 출신은 오히려 많은 편이예요. 서울시는 보건소장 의사출신이 나름 있지만 경기도부터도 손꼽을 정도니까. 의대 역사가 굉장히 긴데 내가 처음 구청장이 되었다는 건 우리가 그동안 우리끼리 따로 놀았다는 거죠. 정부 조직에서 의사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 정말 그렇네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수입 때문이죠. 또 제도상 문제도 있어요. 관리의사부터 시작하는데 계약직이라 정규직으로 올라가기 굉장히 힘들어요. 관리의사로 특정 일만 하다가 보건소장이 되었을 때 보건의 전반적인 행정을 알기도 쉽지 않아요.
- 그러면 의사출신 공무원을 늘리기 위한 대책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수입이 문제긴 한데, 그렇다고 공무원 수입을 무작정 늘릴 수도 없어요. 수입이 적더라도 정부에 의사들의 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소명의식있는 사람들이 올 수 있게 제도적인 문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봐요.
“대학에서도 공공의료, 보건행정을 가르쳐야, 행정지식을 갖춘 의사가 필요”
예를 들면 대학에서도 공공의료, 보건행정을 가르쳐야 해요. 예방의학처럼 보건의료학, 공공의료학 만들어서 행정지식을 갖춘 의사를 배출하도록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만약 그런 길이 학과로 조직되어있지 않더라도 하고싶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도해본다면 점점 많은 사람들이 진출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요즘 개원가의 미래가 예전만큼 밝지는 않으니까......(안정적이고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에 진출하는 수가 더 늘지 않을까요.)
- 네 좋은 말씀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대생 신문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부탁드려요.
거듭 강조하지만 의사들이 기초, 임상에 남는 것도 좋지만 공공의료에도 진출 많이 해야된다고 봐요. 하지만 사명의식이 없으면 여길 들어오기 힘들어요. 능력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발휘하고자 한다면, 나와 같은 길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줬으면 좋겠어. 단, 선민의식을 가지고 혼자 잘났다는 태도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사람들에서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아들과 나이가 같다며 살갑게 맞아주시는 구청장님 덕에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더 나은 의사는 사람을 고치며, 진정으로 큰 의사는 사회를 고친다는 옛말은 박영숙 구청장님, 그리고 그의 행보에 공감한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전영준 수습기자/중앙
<yjipnida@e-med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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