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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이 된지도 두 달이 지난 3월, 첫 신문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올해로 본과 3학년이 됩니다.
제게 2014년 3월은 새해 시작의 열기도 식었고, 본과를 시작할 때의 포부와 의욕도 잃어버린 때인 것 같습니다. 새학기, 새로운 시작을 하는 설렘과 흥분 속에 신문을 집어든 분도 계시겠지만 대개는 저와 같은 상태인 분들이 많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만사에 시들해지는 저와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이 모든 것이 ‘적응’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해볼만큼 해보고 알 만큼 아니까,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구요. 제 친구들 중에서는 심한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죠.
며칠 전 읽었던 <질병의 탄생>이라는 책의 구절을 소개합니다.
‘실제로 수렵채집인이 농경 생활자보다 더 건강했다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 농경 생활 이후에 주된 영양 섭취원인 곡물은 칼로리는 제공해 주지만 다양한 식단을 세공해 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필수 영양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는 못했다. 따라서 농경 생활자들은 구루병이나 각기병, 혹은 펠라그라나 괴혈병 등 비타민 결핍으로 생기는 병들을 앓곤 했는데 이러한 병은 수렵채집인에게는 발견되지 않았다. …  영양실조에 의한 치아 에나멜 결손이나 철결핍성빈혈 그리고 감염성 뼈질환이 몇 배 더 많았고 수명 또한 짧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집단으로 한곳에 정착해서 생활하는 방식 때문에 나병, 결핵, 말라리아 같은 전염성질환에 걸리기도 쉬웠다.’
수렵채집인이 농경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역사의 ‘발전’이라고 불리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의 상상 속 수렵채집인의 모습은 흔히 말하는 ‘야만인’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냥을 실패한 날에는 끼니를 굶을 수 밖에 없는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궁핍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동물을 사냥하면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는 경우도 많았겠지요. 그렇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들이 더 균형잡힌 식사를 하고 있었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안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영양 불균형, 전염병에 대한 노출, 노동력 확보를 위해 더 많은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등의 어려움도 동시에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발전’이라고 바라보고 있는 현상이 늘 좋은 결과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었던 거죠.
지금 저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2년간의 본과생활 끝에 찾아온 적응, 또는 순응. 조금 근사하게 포장해보자면 성숙. 스스로의 안정을 위해 이루어진 그 과정이  저의 상상력을 아주 좁은 감옥에 몰아넣은 것은 아닐까요? 모든 자극에 무뎌지게 만들어 새로운 자극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게 사고를 마비시킨 것은 아닐까요? 대학생활을 시작하던  서투른 천둥벌거숭이이던 저는 새로운 영감으로 매일을 이어나갔고, 본과에 진입한 직후 혼란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저는 다양하고 건강한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코웃음치게 되는 그 때의 열정과 다짐들이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개강하고 나니 일상이 잿빛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분들은 대학 새내기이던 자신을 돌아보시면 어떨까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너무 두려워 마시구요.
그 때의 서투름을 너무 꾸짖지만 말고, 당시의 열정과 즐거움을 한 번 더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지현 편집장
<editor@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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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연세의대의 교육개혁이 혁신이 되려면  (0) 2015.05.15

연세의대의 교육개혁이 혁신이 되려면

 

연세의대가 수십 년간 이어오던 상대평가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교육 평가 방식을 도입한다. 개혁안의 골자는 모든 과목 성적에서 학점제를 폐지하고 ‘Pass or Non-pass’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임상실습교육도 강화하여 의학과 1학년부터 모형 환자를 활용한 교육을 실시한다. 학생의 연구활동에도 지원을 대폭 늘리며, 학생들은 이 모든 교육과정을 수료하면서 포트폴리오에 스스로의 학습에 관한 보고서를 남겨야 한다.  높은 성취도를 유도하기 위해 특정 과목에서 상위 25% 성적을 받은 학생에게 해당 과목에 ‘Honor’ 등급을 부여한다. 학생들의 가장 큰 우려인 대량 유급 사태의 발생을 막기 위한 제도도 마련했다. 2개 이하의 과목에서 ‘Non-pass’ 등급을 받은 학생은 재교육을 통해 다시 ‘Pass’ 등급을 받을 수 있다. 일종의 계절학기와 유사한 구제(救濟)제도인 것이다. 또 이미 유급한 학생의 경우에는 ‘Non-pass’ 등급을 받은 과목만 재수강하고, 남는 시간에는 상위 학년의 과목을 미리 이수할 수 있는 선이수제도(Advanced Placement)를 통해 학습 적응력을 높일 수 있다. 이처럼 예상되는 어려운 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 점이 인상깊다. 이러한 제도는 연세의대의 교육과정개발사업단이 3년의 연구 끝에 만들었다. 사업단의 연구진만 60여명에 달한다고 하니, 과연 연세의대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전국에서 최초로 시행하는 교육제도인 만큼 여전히 걱정의 목소리는 많다. 첫 번째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Pass’하는 것에 안주해버릴 것이라는 예상이다. 또 현재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실시하는 선택실습제도도 많은 학생들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연구 활동 확대와 포트폴리오 작성 등이 제대로 자리를 잡겠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예상되는 문제점들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의학교육을 주도하는 현직 의대 교수들부터 의대 학생들 중 일부까지 보수적인 의대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꽤 많다.

미국 상위 25개 중 대다수의 의과대학과 일본의 도쿄의대, 오사카의대, 교토의대에서는 이미 절대평가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실제 연세의대도 이러한 학교들을 직접 찾아가 보고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연세의대의 교육 제도가 국내 최초라고는 해도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유별난 제도는 아니란 것이다. 다만 국내에 41개 의과대학이 거의 흡사한 교육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세의대의 행보는 돋보일 수밖에 없다. 의료계 전반에 걸친 보수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러한 제도 개혁은 이미 준비과정에서부터 혁신(革新)이라고 볼 수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불러일으킬만한 혁신을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절대평가제도라는 혁신의 깃발을 들고 나선 연세의대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이다. 연세의대가 논란을 불식시키고 수십 년째 답보 상태인 의학교육에 교육 제도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