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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111호/오피니언 2016. 7. 11. 17:57 Posted by mednews

새벽 4시 반

 

 

자동차는 직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산길을 들어선다. 굽이굽이 곡선의 형태를 지닌 산길이다. 창밖으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지만 네비게이션의 기계 음성에 의지하여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간다.

공부를 끝마치고 집을 간다. 보통은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자정 정도가 본과 1학년 의대생의 귀가시간으로 적당하지만 익혀야 할 양이 많은 날에는 어쩔 수 없이 기준을 넘기게 된다. 그렇다고 새벽 4시 반보다 늦어질 수는 없다. 오늘의 밤샘으로 인해 내일 하루를 망칠 수는 없으니깐 말이다.
새벽 4시 반엔 거리를 방황하던 취객들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어제의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환경미화부들의 모습이 관찰된다. 쓰레기봉투가 가득 담겨 있는 트럭 옆을 지나며 오늘에 대해 생각해본다.
새벽 4시 반엔 “오늘 하루”의 시작과 끝이 공존한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나에겐 “오늘”이 끝나 것이지만, 새벽잠을 이겨내며 일하러 나온 환경미화부들에겐 그 순간이 “오늘”의 시작일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줄만 알았던 시작과 끝의 만남은 본연의 모순을 잃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다.
둘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면 둘 모두 피곤하다는 것. 그래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피곤함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행복감은 물론이거니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증오 또한 중요치 않아지는 시간이다.
가로등에는 여전히 나방들이 하염없이 몸을 부딪친다. 무엇이 그렇게 절실해서인지 제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뜨거운 벽을 계속해서 두드린다. 얻게 되는 것 하나 없지만 신은 무슨 까닭으로 나방들이 불빛을 향해 달려가게 만들어 놓았을까. 설령 무언가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그만큼의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일까. 조금만 기다리면 더욱 밝은 태양이 뜰 텐데 그 새를 못 참고 보잘 것 없는 가로등 불빛 하나에 제 목숨을 바치는 것일까.
20여개의 가로등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이 세상 가장 참혹한 어둠이 나를 반긴다. 신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손을 더듬어 불을 켜며 방안을 둘러보면 낮 동안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내 자신이 매우 피곤한 상태임을 깨닫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형광등을 끈다.
불을 끔에도 눈앞이 밝다. 빛을 차단 시켰으니 참혹한 어둠만이 남아야 맞겠지만 이상한 일인지 옅은 푸른빛이 방안에 남는다. 빛의 근원을 찾다 한숨을 쉬며 창밖을 보니 푸르스름한 빛이 창문을 통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세상에 도달한 첫 번째 햇살과 함께 잠에 빠진다.

남해 섬들처럼 구름은 각각의 군집을 이루고 그 사이로 오늘의 태양빛이 땅을 적신다. 자동차는 다시 산길을 벗어나 직선의 도로를 달린다.

 

윤명기 편집장
<medschool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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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인자로 들여다보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0) 2016.07.11

유해인자로 들여다보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사람은 보통 알지 못하는 것과 마주하면 공포를 느낀다. 또한 선의로 한 일들이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기도 하며, 이 때 당사자는 심각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과 연민을 맛보게 된다. 이 두 가지가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최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다.

 

관리 받지 못한 유해인자

지속적으로 노출될 시 사람의 건강과 안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을 유해인자라고 한다. 이 유해인자는 아주 다양해서,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다양한 화학물질은 물론이거니와 털 조각, 꽃가루, 포자 등의 생물학적 유해인자, 빛, 소음, 진동, 기압, 기온 등의 물리학적 유해인자에 더해 교대근무 등의 생활양식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애석하게도 유해인자들이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즉시 질병이 발생한다면 관리가 쉽겠지만 어떤 물질들은 노출되는 양과 질병의 발생 사이에 명확한 관계가 없기도 하고, 어떤 물질들은 수 십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더욱 큰 문제는 유해인자에 노출되고, 유해인자와 관련된 것이 증명된 질병이 발생한 개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병이 그 특정 물질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한 논의가 펼쳐지고 있는 담배가 대표적이다. 비흡연자와 흡연자 집단을 비교하면 폐암 유병률의 차이는 자명하지만, 흡연자 A의 폐암이 담배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다른 새로운 수많은 유해인자들은 어떨까.
그나마 노동부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이 유해인자들을 자세히 분류해두고, 아직 비록 미흡한 수준이지만 노동자가 근무하는 각 사업장마다 근무자들에게 노출되는 유해인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법안과 가이드라인을 준비해두고 있다. 문제는 가습기 살균제는 산업안전보건법과 관계없는, 가정 내에서 사용하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고장난 브레이크, 작동하지 못한 안전장치들

그렇다고 이런 가정에서 사용하는 물질들에 대한 안전장치가 전혀 없지는 않다. 환경부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2015년부터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로 개정됨)에 따라 유해화학물질이 국민건강 및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항시 파악하고, 건강 위험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시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의무가 있다.
유해화학물질을 제조하거나 수입할 사람은 국립환경연구원장 소속하의 화학물질심사단의 유해성 심사를 받아야 하고, 환경부 장관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같은 물질도 인체에 노출되는 방식에 따라서 다른 독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버렸다.
화학적 유해인자가 인체에 노출되는 경로는 크게 소화기, 피부, 호흡기로 나눌 수 있다. 노출 경로에 따라 독성이 달라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특별한 예시도 필요 없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지만 같은 양의 물을 기관지로 쏟아 붓는다면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의 주요 성분은 PHMG, PGH로 피부나 소화기 독성이 매우 낮아 실제로 현재도 물티슈 등에 얼마든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호흡기로 폭로될 경우 만성 염증에 의한 폐섬유화증을 일으키게 된다.
가습기 살균제의 최초 개발사인 유공(현 SK)의 화학계열 자회사가 이 물질을 카페트 항균용(피부)으로 승인받은 뒤 가습기(호흡기)로 용도 변경한 것이 비극의 시초다. 이 용도변경에 대해서 당시 정부는 어떤 규제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 옥시 등 다른 회사들이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우후죽순 쏟아낼 때도 추가적인 규제나 중간 점검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외상과 같은 급성질환의 경우에는 외과의사의 개입으로 마법같이 회복되는 일이 가능하지만,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만성질환의 경우에는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의사의 부단한 노력뿐만 아니라 환자 스스로의 협조와 노력이 있어야 예견된 파국을 막아낼 수가 있다. 그나마 당뇨와 같은 병은 병태생리와 경과, 위험인자와 관리 목표가 정해져 있다.
그러니 이런 유해인자의 노출에 의한 비극은 만성 질환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다. 원인도 모르고, 피할 방법도 알지 못하고 죽어갔고 또 죽어가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이기는커녕 ‘내가 깔끔 떨어서 가족을 죽였다’라는, 부조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한다. 과연 개인의 노력으로 이런 위협을 피해갈 수 있을까?

 

화학제품 전체로 퍼지는 공포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소비자들은 옥시로 대표되는 가습기 살균제 생산 회사에 대한 분노를 넘어, 이 ‘알 수 없는’ 공포를 피해 탈취제나 살충제 등 모든 화학제품을 피하려는 움직임 또한 보이고 있다. 용도에 맞게 화학제품을 사용하여 편리를 얻는 것은 현대인의 특권이며, 문명의 상징인 것인데 이것을 포기하려는 것이다.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큰 쟁점이자 먼저 해소되어야 할 일은 정부의 규제에 대한 신뢰성이다. 누구나 믿을 수 있는 화학 물질 점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믿을 수 없기에 불신이 생긴다. 이는 개인의 노력으로 절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에, 더욱 정부의 책임이 커지게 된다.

질환에는 상승작용이 있다. 석면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흡연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폐암 위험을 수십 배 증가시킨다. 가습기 살균제의 경우, 원래 폐가 약했던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노출에도 폐섬유화증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즉, ‘연관성 낮음’으로 판정된 사람들 중에서도 원래 폐가 질병에 이환되어 있던 경우에는 살균제가 직접적인 사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합리적인 전문가의 의견을 수용해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시함과 동시에 더 많은 피해자를 구제할 방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준형 기자/가천
<bestofz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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