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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에 선 의대생의 상처치유기

도전, 슈퍼모델 신지연!

그래, 그건 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불은 순식간에 내 몸으로 옮겨 붙었고, 검붉게 변한 피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델을 꿈꾸기엔 상처가 깊었고, 누군가는 자랑할 만한 길거리 캐스팅도 내겐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슈퍼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그토록 내가 인정하기 싫었던 콤플렉스 하나를 이겨내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인터뷰 기자의 마지막 질문, 그 깊고 오랜 상처에 이젠 당당해졌냐는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저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요.”
 
너무도 평범하지만, 또 너무나 수상한 이 여자. 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1학년, 신지연 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열일곱에 겪은 상처,
위가 아닌 아래를 보게 되다

어느 고등학교 축제의 과학부 부스, 알코올 램프의 불이 지연 양의 옷에 옮겨 붙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지만 그 누군가를 위해서였을까, 그녀는 그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려 들지 않았다. “사실 그 친구에게 직접 사과를 받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 친구도 많이 미안할테고, 사과할 용기도 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죠. 부모님도 많이 속상해 하셨구요. 특히 어머니는 제가 붕대를 다 감은 후에 오셨는데, 그때는 제 얼굴이나 손이 괜찮은 걸 보고 안심하셨거든요. 그리고는 이틀 후에 드레싱을 하느라 붕대를 푸는데, 어머니께서 조용히 병실을 나가시더라구요.”

고등학교 1학년, 세상엔 때로 아무 이유 없이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든 나이.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에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들어왔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환자, 귀가 타버린 환자, 그리고 전선을 잘못 잡아 사지가 다 손상된 환자 등.

“저는 입원 가능한 환자의 마지노선이라고 해야 할까요. 얼굴도 괜찮고 일상생활도 문제가 없는데다, 팔의 안쪽이나 허리 등에만 상처가 있어 가리기도 쉬워요. 수술도 이 정도면 잘 된 편이구요. 사실 저도 화를 내고 싶었죠. 그런데 드레싱을 하니까 엄청 화끈화끈 거리고 더운 거 있죠? 그것도 여름에 다쳤으니까요. 그래서 화내면 더 열나니까 아프지만 참자, 화나지만 참자, 다치고 나서 정말 인격수양 많이 했죠(웃음). 옛날엔 다혈질에 예민하던 성격이, 수행을 통해 긍정적으로 바뀐 거에요. 상처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려고 노력했구요.”

화상은 모델의 꿈을
태웠지만...
 
런웨이를 걷는 짧은 시간, 그 안에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알렉산드라 엠브리시오나 하이디 클룸 등, 프로페셔널한 모델의 모습은 지연이 동경해오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며 키가 많이 큰 지연은 실제로 길거리 캐스팅도 받았을 정도. 하지만, 그때는 이미 상처가 남은 후였다.

“주위에서 사진을 찍어보라고 할 때에도 장난으로 넘겼는데, 다치고 나서야 그런 기회가 온 거에요. 상처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냥 안하겠다고 했어요.
물론 꼭 모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사실 다치기 전에는 모델이든 의사든 크게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정작 모델이 될 기회가 있을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야 그런 기회가 오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기회를 놓쳤다기보다, 기회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구요.”

화상 후, 지연은 자신이 꿈꿔왔던 또 다른 프로페셔널,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치료해주면 어떻겠냐는 친언니의 조언도 큰 역할을 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웃음), 그땐 진짜 빨리 퇴원해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두 달간 입원했던 지연이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후였다. 평소 성적은 반에서 5등 정도로 의대에 가기엔 다소 부족한 성적. 몸조차도 따라주지 않았다. 피부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늘 허리를 세워야 했고, 오른팔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배가 은근히 활동에 중요하더라구요. 웃거나 울거나, 눕거나 앉거나, 심지어 말할 때도 배가 많이 쓰이는데, 배를 다치니 일상생활이 힘들었죠.”

그 모든 악조건을 의지 하나로 버텨낸 지연, 성적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기말 고사에 성적이 올랐지만, 기대보다는 못나왔어요. 1등할 줄 알았는데...(웃음). 확실히 1등하는 애들은 다르더라구요. 그렇지만 성적이 안 나와도 조금만 더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계속 했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1등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화상을 딛고, 몇 번의 큰 고비를 넘기고, 한동안 공부에만 매진했던 지연. 상처에 대한 아픈 기억도 희미해져가던 어느 날, 지연은 그토록 자신이 바라던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화상은 양의 꿈 하나를 좌절시켰지만, 양을 좌절시키진 못했다.

도전, 슈퍼모델 신지연!

지난 6월, 케이블의 한 채널에 지연양이 출연했으니, 바로 슈퍼모델 오디션 프로그램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2’. 최후의 26인이 되기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 선 지연,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처음에는 반장난이었죠. 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1000명 안에 들고, 실물 심사도 통과하고, 최후의 26인을 뽑는 자리까지 가니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내가 모델이 될 수도 있을까’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심사의원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그런 게 느껴지더라구요. 제가 상처가 크다는 걸 아니까, 제가 최대한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히 얘기를 끌어내려는 느낌? 순간 ‘아, 내가 지금 동정을 받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과 함께 울컥하더라구요. 난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 괜찮은데, 주위에선 이걸 안타까워하는구나, 하면서요.”

방송이 나가는 동안 미국에 있느라, 한참 후에야 방송을 봤다는 지연. “방송 끝에 인터뷰를 잠깐 하는데, 그때는 엄청 해맑게 웃고 있는 거 있죠? 사실 정말 후련했어요. 제 콤플렉스 하나를 이겨낸 느낌이랄까요. 런웨이를 걷는 것도 한 번 느껴봤고, 좋은 경험도 많이 했고, 이제 모델에 큰 후회나 미련은 없어요.”

화상이 가르쳐 준 것들

본과 1학년,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가장 힘든 시기. 하지만 그 와중에도 꾸준한 운동으로 슈퍼모델 오디션에 나갈 정도로 관리를 한 지연양.

“음,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어떻게 시간을 냈내요. (웃음) 사실 그런 것 보다 화상 후에 많이 아파봤잖아요. 몸이 약하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느꼈어요. 잠도 잘 자고, 운동도 꼬박꼬박 해요. 지금이 바쁘다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바빠진다고 하잖아요? 아, 그런데 저 성적 그렇게 안 나빠요. (웃음)”

크게 다쳐본 만큼, 건강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지연. 하지만 지연이 화상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을 밝게 사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사실 길거리 캐스팅을 당할 때, 제 주위에 예쁜 애들이나 키 큰 애들도 많았어요. 게다가 공부하느라 제대로 꾸미지도 못했는데, 그분이 절 뽑으신 거 있죠? (웃음) 주위 애들이 ‘왜 쟤가 받았지?’하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제가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그분은 가능성을 보셨구나!’ 하고요, 히히히. 아, 설마 이거 기사에 쓰실 건 아니죠?”

정세용 기자/연세
<avantgarde91@e-mednews.com>

드레싱 : 환부를 닦고 거즈를 새것으로 바꾸는 일

전 세계 의대생 회의, IFMSA 총회에 가다!

의대생의 사회참여를 위한 국제의대생회의

전세계 의대생이 한자리에

대통령도, 보건복지부 장관도 아닌 의대생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각 나라의 다양한 의료환경을 국제적 시야에서 비교해 보고 프로젝트를 통해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 국제 의대생 회의(General Assembly)가 이번 여름 덴마크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를 주최한 IFMSA(International Federation of Medical Students’ Associations)는 세계보건증진을 위한 프로젝트를 범국가적 규모로 개최 및 교류하는 세계 최대의 의대생 단체로 UN 및 WHO의 공식후원을 받고 있다.
IFMSA는 매 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국제의대생회의를 개최하고 있는데 특히, 이번 회의는 창설 60주년 기념으로 처음으로 회의가 진행된 코펜하겐에서 진행되었으며 97개 국가의 약 천 명의 의대생들이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유럽국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나 현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비롯하여 중동 및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전 세계를 아우르는 참여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IFMSA회의에 지난 7월에 열린 설명회를 통해 선발 된 총 14명의 학생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소개하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관한 계약을 맺었다.
이 과정에 참여한 김예림(연세원주 예과1) 학생은 “의대생들이 자국에 꼭 필요한 보건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에 기여를 하는 능동적인 모습에 감명 받았고 의사만이 아니라 의대생도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렇게 큰 회의를 학생들의 힘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다만 내가 참여한 연구교환학생 프로그램인 SCORE가 국내에 없어 우리가 이용하지 못한다는 게 무척 안타까웠고 현재 우리나라에 부족한 학생들의 연구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이번에 사귄 외국친구들의 조언을 얻어가며 본 프로그램을 잘 정착시키고 싶다.” 고 소감을 밝혔다.
 
날카로운 토론과 흥겨운 파티가
함께하는 일주일

IFMSA는 의대생들의 관심사에 따라 세부적인 주제를 갖는 위원회(Standing Commitee)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위원회에는 Public Health(SCOPH), Medical Education (SCOME), Human Right & Peace (SCORP), Reproductive Health & AIDS(SCORA), Professional Exch-ange(SCOPE), Research Exchange (SCORE)가 있다. 총회의 오전 시간은 자신의 듣고 싶은 위원회를 선택하여 참여할 수 있었으며 전문가의 강연 및 주제관련 토론은 물론이고 각 국의 프로젝트 발표와 더불어 실제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 및 운영하는데 필수적인 주제분석이나 조직 및 자금 운용, 캠페인 문구작성법 등을 소그룹을 이루어 연습해 볼 수 있었다.
오후에는 각 국의 학생모임을 중심으로 자신의 나라의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홍보하는 Project presentation 및 Fair시간이 있으며, 의과학 관련 강좌 및 의학기구에 관한 invention Fair를 통해 개별 부스에서 많은 국가의 다양한 활동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Plenary라는 의결시간이 주어져 각 국의 President들은 모두 모여 각 의제에 관해 발제를 하고 투표를 거쳐 단체의 규정을 명문화해 나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 참여한 김상엽(관동의대 본과3)은 “이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의 방법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하지만 딱딱한 회의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매일 저녁에는 흥겨운 파티가 열리는데 단순히 춤과 술을 즐기는 클럽에서부터 각국의 음식 및 술 문화를 알릴 수 있는 National Food & Drinking Party와 각 국의 전통 문화를 공연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을 휩쓴 한류를 테마로 소녀시대 소녀시대의 음악에 맞추어 안무를 선보였으며 수많은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예찬을 받았다. 심지어 긴장감 넘치는 의회와 같은 분위기의 Plenary시간의 중간 쉬는 시간에도 파티는 계속된다. 각 나라의 현안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다가도 신나는 음악소리에 모두가 하나되어 회의장을 순식간에 클럽으로 둔갑시켜 춤을 추며 어울리는 모습은 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첫걸음을 딛는 우리나라의
프로젝트와 교환학생 프로그램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연합(KMSA, 이하 전의련)이 IFMSA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단체로 인정받아 준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내년 3월 가나에서 개최되는 회의에서 정회원으로 인준을 받게 되면 의결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공식적인 투표권을 갖게 된다. 국내에서는 총회 및 의대생캠프, 열린 자원봉사단 등 여러 활동을 추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IFMSA와 관련하여 교환학생 프로그램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내년부터는 IFMSA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국가와 학생 교환을 실시하게 된다. 현재 신청한 학교인 중앙대(8명), 강원대(4명), 관동대(2명)의 학생들은 올해 계약을 맺은 미국, 스웨덴, 터키, 일본 등의 국가에 2012년 교환학생으로 신청할 수 있다. 한편, 신청하지 못한 학교의 경우는 2012년 학생들의 건의로 학교측이 승인하는 경우 2013년 학생을 교환할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한 계약은 2012년 8월 두바이에서 이뤄진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는 의대생 헌혈릴레이, 스마일캠페인, 조직기증캠페인, 학생대학평가보고서 등이 있다. 그 중 스마일캠페인은 길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세요’란 귀여운 팻말을 들고 행인과 함께 웃는 얼굴을 촬영하여 페이스북(shareyoursmile)에 업로드하는 활동이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사회문화를 밝게 개선하여 우울증 감소 및 자살예방의 효과를 얻고자 한 본 캠페인은 IFMSA회의에서 특히 큰 관심을 받았다.
 
심장이 뛰는 당신, 가나에서
주인공이 되어라!

현재 우리나라에서 IFMSA-KMSA의 프로젝트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함께할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다. 관심 있는 전국의 의과대학, 의학전문대학원 학생은 누구든지 지원 가능하며 프로젝트 참여자에 한해서 다음 3월 가나에서 개최 될 IFMSA 정식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공식적인 IFMSA설명회는 9월 17일 토요일 오후 5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개최 될 예정이며 참가를 희망하는 학생은 전의련 공식 홈페이지에서 참가신청서를 다운받아 www. kmsa.ifmsa@gmail.com로 신청하면 된다. 더불어 설명회 3일 전까지 등록한 신청자에 한해서 등록비가 면제되며 당일 신청 시 5,000원의 등록비가 있다.
 
※ 공식사이트소개
 www.IMFSA.org
 (이픔사 공식홈페이지. 영어)
 www.KMSA.org
 (전의련 공식홈페이지. 한글)

허은실 기자/아주
<hershi@e-mednew.com>

7월의 어느 멋진 날, 영등포에선 무슨 일이?

다 같이 모여보자, 전국 의대생 캠프!

7월 29일, 우면산에서 흘러 온 흙더미와 돌덩이들이 서울을 뒤흔들고 있던 그 때. 비가 많이 온다는데 ‘서울에 갈까, 말까?’ 고민하던 그 때. 학교도, 사는 지역도, 나이도 학년도 모두 다른 그들이 영등포 하이 서울 유스호스텔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캠페인이나 봉사활동 등 의대생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많다. 그러나 전국의 의대생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었던 때 등장한 ‘제 1회 전국 의대생 캠프’. 다른 학교의 의대가 궁금한 학생들, 다른 학교의 사람이 만나고 싶었던 의대생들, 또한 ‘의대 졸업 후 임상의사가 아닌 다른 길이 있을까?’ 궁금했던 의대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양각색 어울림을 만들었다.

캠프 1일차, 아직은 어색하지만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다는 설레는 분위기가 감돈다. 문태준 대한의사협회 명예회장의 축사를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강연이 이어졌다. 의학계 현재의 상황에 대한 설명, 기성세대로서 미안함과 젊은 의대생에 대한 당부가 이어졌다. 또한 의대 졸업 후 진로를 결정할 때 다양한 길, 예를 들어 의학전문기자, 기초 의학 연구자, 의학전문 변호사, 보건복지부 소속 공무원 등이 있으니 너무 임상의사의 길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당부도 있었다. 강연 후 서남의대 J씨(22)는 하루에 강연이 너무 몰려 있어서 집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현재 의학계의 상황과 의대 졸업 후의 길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캠프 2일차, 제너럴 닥터의 김제닥 선생님의 강연과 봉사 세션이 함께 진행되었다. 봉사 세션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의대생들이 할 수 있는 캠페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김제닥 선생님은 하얀 가운을 입고 진료하는 깔끔한 병원만을 기대하지 않기를 당부했다. 이어진 자유토론에서도 학생들은 자기가 생각한 졸업 후에 대해 하나 둘 얘기했다. 강연 후에 익명을 요구한 모 씨(21)는 ‘의대 졸업 후에 뭔가 다른 길도 많다는 생각과 의사라는 일이 진료 말고도 여러 곳에 잘 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틀과는 다른 생각을 해 볼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또한 이러한 캠프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전의련 대의원 총회와 전국 학년 대표단 회의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 홍대 클럽 Jess에서의 뜨거운 열기는 ‘의대생이라 공부만 해서 잘 못 놀 것 같다’는 편견을 순식간에 불살라 버렸다. 자신만의 끼를 발산하는 것도 모자라 엄청난 열정의 에너지가 묻어났다.  

또한 이 캠프는 의대생 직접 기획부터 시작해 주관을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기획자 정환보(중앙의대 본과3)씨는 ‘전국적으로 의대생 모두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홍보가 잘 안 된 면이 있다. 또한 예산문제가 좀 더 수월하게 풀렸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1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참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캠프 때 찍은 사진과 기타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는 분들은 싸이 클럽 http://club. cyworld.com/allmedcamp1을 방문하면 된다.

문한빛 수습기자/서남
<shteme@e-mednews.org>

국시에 대비하는 우리들의 자세

국시준비, 다른 학교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후덥지근했던 태양이 선선한 바람으로 바뀌었다. 바야흐로 가을, 국시의 계절이 온 것이다. 본과 3학년 이하의 학생들에게 가을은 또 다른 학기의 시작일 뿐이지만, 본 4 학생들에겐 그렇지 않다. 의대라는 긴 여정의 종점, 국가고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가고시는 90%가 넘는 학생들이 합격하는 자격시험이지만, ‘남들 다 합격하는 시험에 행여나 떨어질까’는 두려움에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의대라는 긴 여정의 마지막 관문 국가고시. 중요한 시험이니 만큼, ‘실습기간이 지나치게 길다’ ‘모의고사 기회를 자주 제공하지 않는다’ ‘실기시험을 위한 수업과 실습시간이 충분치 못하다’‘자습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 등 학교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이 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우리 학교 이외의 다른 학교 친구들은 이 국가고시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성균관대, 순천향대, 아주대, 울산대, 중앙대 본과 4학년 학생들에게 메일과 전화로 인터뷰를 시행했다.
실습과정은 1년 동안만 실습을 도는 학교가 있는 가하면 1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실습을 도는 학교도 있어 그 편차가 컸다. 그리고 메이저 과목에 내외산소정(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신과) 이외에 신경과를 포함한 학교(성균관대, 울산대)도 있었다. 순천향대는 특이하게도 메이저, 마이너로 나누어 돌지 않고 본3때 메이저와 마이너를 합해 지방에서 돌고, 본4때 또 다시 서울 한남동 병원에서 메이너와 마이저를 합해 돌았다. 여름방학은 짧게는 열흘 남짓 길게는 4주였지만 국시를 대비하는 기간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선 동일했다.
그리고 국시를 준비하는 모습에선 학교에서 국시강의를 집중적으로 제공하는 곳과 국시학습을 전적으로 학생의 자율에 맡기는 학교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4학년 2학기에 국시강의를 시행하는 학교에선 강의를 듣는 시간이 아깝다는 의견도 더러 있었다. 일례로 울산대에선 학생들의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오전부터 오후까지 하던 국시대비 강의를 오전수업으로 한정해 수업시간을 줄였다고 한다. 듣고 싶은 부분만 자율적으로 들을 수 있으며,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을 국시강의의 장점으로 꼽는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이 국시에 대비해 사용하는 교재는 대부분 퍼시픽이었고, 대부분의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제공했다. 국시성적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모의고사를 성적에 포함하는 학교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부담이 아니라면 모의고사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본과 4학년 2학기를 국시 준비에 집중할 수 있도록 4학년 2학기에는 임상실습 등 정규 교육과정을 넣지 않고 시간을 비워두고 있었다. 정규 교육과정이 끝나는 시기는 7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로 다양했다. 임상실습이 가장 늦게 끝나는 학교는 울산대로 9월 중순까지였는데, 본격적인 국시 준비를 늦게 시작하게 되어 학생들이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한편, 아주대의 경우 2학기에 마이너과목 시험이 있어 여름방학을 국시 준비에 활용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다.
국시에 대한 학교의 관심이 커서, 하위권 학생들을 따로 모아 지도하는 학교도 있었고, 내년부터 실습 시작과 종료 기간을 2개월씩 앞당겨 국시를 충분한 시간동안 준비할 수 있게끔 계획하고 있는 학교도 있었다. 특히 이번 조사에 포함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실기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져 실기와 관련된 수업이나 실습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균관대의 경우 이런 기회가 비교적 적게 제공된다는 점이 불만사항으로 제기되었다. 일부학교에서는 국시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모의고사나 실기시험을 이용해,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은 국시 이전에 유급시키는 관행도 존재했다.

박민정 기자/성균관
<cindy29@e-mednews.com>

심리학과 정신의학, 역사적인 만남

“정신을 통제할 수 있을까?”
2010년 개봉된 영화 <인셉션>에서 제기된 질문은 심리학과 정신의학이라는 두 학문이 궁극적으로 추구해 온 목표이다. 정신의학의 Psychiatry는 정신(Psyche)을 치료(iatry)한다는 의미이고, 심리학의 Psychology는 정신(Psyche)을 연구(logy)하는 것이다. 서로 비슷해 보이는 두 학문은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 글에서는 정신의학에 초점을 맞추어 두 학문의 역사적인 만남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정신의학의 탄생

18세기 말 이전까지도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정신과(psychiatry)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정신병이 18세기 말부터 생긴 것은 아니다. 정신병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질병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정신병자라고 불릴 사람들은 있었고, 사회별로 정신질환에 대처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은 존재했다. 하지만 정신의학의 탄생 이전의 치료법들은 지극히 원시적이었다. 1817년 아일랜드 한 지역구 의원의 기록에 따르면, 광인들은 1.5미터 정도 되는 구덩이에 강제로 들어가야 했고, 그 곳에서 죽을 때 까지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광인들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했으며, 사회적으로 철저히 매장 당했다.
18세기 말, 치료를 위한 수용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 사상은 이성의 힘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계몽의 열기에 도취된 사람들은 광기를 근절할 수 있다는 믿음에 가득 차 있었고,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정신질환을 치료하고자 했다. 수용을 통한 최초의 정신과적 치료를 제안한 사람은 윌리엄 바티이다. 그는 수용소에 치료적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고, 나아가 정신질환은 치유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첫 만남

이와 같은 낙관적 분위기 안에서 정신의학사에서 기념비적 인물인 필립 피넬이 등장한다. 계몽주의 심리학과 사회진보철학에 한껏 고무된 정신과 의사 피넬은 정신질환의 치료 가능성과 인도주의적 돌봄이라는 개혁적 이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넬은 수용소를 통한 감금은 반드시 치료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수용소는 심리적 치료를 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피넬은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피넬 이후 정신의학은 심리학적인 치료를 강조하게 된다. 피넬의 개혁 아이디어는 그의 제자 장-에티앙 에스퀴롤에 의해서 발전된다. 에스퀴롤은 1817년부터 의과대학생에게 정신과 강의를 시작했고 8년 후에는 파리 근교의 대형 수용소의 소장이 되었다. 그는 정신질환이 ‘정열’의 과잉으로 일어난다고 믿었으며. 수용소는 환자들을 불건전한 정열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독일의 에른스트 호른, 미국의 벤자민 러쉬 등에 의해서 정신치료 개혁은 계속 진행되었고, 그 결과 “도덕 치료”라고 불리는 심리학적인 치료가 확립되었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의
등장과 소멸

한편 생리학, 해부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정신질환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이 바로 그 시도이다. 이 학파의 교수들은 수용소에서의 지루한 일상이 아닌 마음과 뇌의 체계적인 연관관계에 대한 연구가 정신질환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19세기 의학계의 전반적 흐름인 임상-병리적 연구를 통한 정신질환 치료를 시도했다.
빌헬름 그리징거는 1세대 생물정신의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1865년 당시 48세였던 빌헬름 그리징거는 내과와 정신과를 겸하고 있었고,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 정신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생물정신의학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대학병원 정신과의 근대적 모델을 창립하기도 하였다. 그리징거는 수용소 식의 정신과 진료를 거부하고, 종합병원에서와 같이 환자를 보았다. 이후 많은 대학이 그리징거 식의 클리닉을 도입하였으며 생물정신의학은 점점 정신의학계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세대 생물정신의학은 환자의 삶으로부터 지나치게 유리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면서 몰락하게 된다. 반세기에 걸친 신경해부학과 신경병리학 연구는 신경매독을 비롯한 극히 소수의 질병 이외에는 아무런 유용성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뇌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소멸되는 시기가 오자 1세대 생물정신의학은 사라지게 되었다.

에밀 크레펠린과
정신의학의 새로운 전기

생물정신의학의 붕괴를 주도한 사람은 에밀 크레펠린이다. 뇌지도 연구의 선구자였던 파울 플레치흐의 조수였던 크레펠린은 그의 연구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세 달만에 조수 자리를 그만두었다. 크레펠린은 젊어서부터 심리학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실험심리학자인 빌헬름 분트에 열광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생물정신의학이란 현미경이나 쳐다보는 쓸모없는 놀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크레펠린은 당시 정신과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독일의 하이델베리크 대학 클리닉 정신과 교수로 임명된다. 그곳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는 두 가지 혁신적인 시도를 한다. 첫째는 환자의 병력과 퇴원 당시의 상태를 기록한 카드를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징거 식 통합 정신과를 모방하여 뛰어난 연구자들을 기용하는 것이었다.
크레펠린이 불러들인 사람은 19세기 말 독일 신경과학의 거장이 될 프란츠 니슬과 알로이스 알츠하이머였다. 니슬은 세포핵 염색법을 개발하여 신경조직학에서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이고, 알츠하이머는 알츠하이머 병의 원인을 규명한 사람이다.
크레펠린은 이처럼 유능한 신경해부학자들을 곁에 두고 있었지만, 환자의 정신 기능 측정이라는 심리학적 방식의 연구를 중단하지는 않았다. 그는 환자의 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한 카드를 바탕으로 질병들을 임상적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크레펠린의 관점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고, 전 세계 정신의학계는 크레펠린의 연구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크레펠린은 시체 부검 등을 통해 해부학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생물정신의학자들과는 달리 살아 있는 환자의 병력을 자세히 기록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크레펠린과 수련의들은 정신 질환을 하나하나 분류해갔으며, 1893년의 교과서에서는 정신분열증을 독립적인 질병으로 설명함으로써 정신의학을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단어의 대열에 올려놓게 되었다.

정신분석의 흥망,
그리고 정신의학의 미래

1856년 태어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억압된 성적 요소가 정신 질환의 주된 원인이라는 정신분석법을 주장한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세기말 유럽의 분위기와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프로이트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학문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반대자들을 병적인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 몰지각한 사람으로 비판하였다. 그 결과 카를 융, 오이겐 블로일러 등의 지지자들이 등을 돌렸지만 정신분석은 더욱더 기세를 넓혀 갔다.
정신분석은 점차 정신의학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학문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특히 교육받은 중산층 사람들의 열기에 힘입어 정신분석을 사용하는 정신과 개업의들의 수는 날로 늘어만 갔다.
이는 크레펠린에 의해 구축된 정신의학계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 크레펠린의 조수였던 구스타프 아샤펜부르크는 정신분석은 암시에 지나지 않으며,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신분석이 모든 문제를 성의 문제로만 귀결하려는 것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미국에 전파되었고, 아돌프 마이어와 같은 열렬한 지지자들에 의해 미국 정신의학계를 풍미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일종의 단절 시기나 다름없었다. 정신분석은 특정 계층의 자기성찰 욕구를 채워줄 뿐이었고, 수용소의 정신질환자들에게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후 정신분석적 방법은 폐기되고, 1990년대 초의 정신약물학 시대가 열리면서 2세대 생물정신의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정신의학은 정신약물의 발달과 뇌과학의 발전에 더불어 새로운 융합 학문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허기영 기자/서울
 <zealot648@e-mednews.org>

의학, 무한한 하늘로 날아오르다

항공우주의학이 뭐지?

11.5 킬로미터 상공을 비행 중인 항공기 안. 술을 마시던 한 승객이 갑자기 낮은 신음소리를 내뱉더니 토를 해대기 시작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고, 주변이 동요하는 사이 기내의 다른 승객들도 토를 해대기 시작한다. 기내에 탑승했던 의사는 나름의 진단을 내리지만, 복통과 구토는 기내에서 번져나간다. 드라마 하우스의 한 대목이다.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비행 중 응급환자와 닥터콜. 이 상황에서 의학도로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항공우주의학이 제시한다. 항공우주의학은 고공이나 우주환경에서 인간이 겪는 여러 가지 생리적, 심리적 변화를 다룸으로써 지상과 다른 환경에서도 인간이 정상적이고 안전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항공우주의학자는 비행 중의 환자를 다루는 일이 아닌 조종사나 승무원, 환자가 비행에 적합한 지 확인하는 일 등을 하기도 한다. 항공우주의학이 이런 임상적인 분야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유인우주선에서의 응급의료체계나 의료장비, 보호 장비를 개발하기도 하고, 항공기 및 우주선 승무원의 신체 기준을 설정한다. 승무원의 건강을 유지하는 일, 항공기 및 우주선에서의 건강관련 사고를 조사하는 일, 비행 중의 응급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수립하는 일, 기내의 위생과 국제방역 모두가 항공우주의학자의 몫이다. 더 나아가 항공우주의학의 연구결과는 비행기나 우주선의 설계에도 반영되기 때문에 항공우주의학은 항공우주산업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항공우주의학자, 무슨 일을 할까?

우리나라에는 2011년 5월 기준으로 99명의 항공전문의사가 있다. 이들은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에서 주관하는 교육을 받고 항공전문의사가 되었다. 교육과정에는 항공법, 비행에 관련된 질환, 약물, 항공생리학, 항공신체검사 요령, 판정사례 등이 있다. 교육은 무료이며, 하루에 8시간씩 3일간 이루어진다. 항공전문의사 교육을 수료하게 되면 수료증과 함께 항공전문의사 지정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항공전문의사는 항공신체검사 증명서를 발급하는 업무를 하는데, 그 증명서로 조종사나 관제사는 비로소 근무를 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갖추게 된다. 또한 공군항공우주의료원이나 민간의료원에서 관련 환자를 진료하거나, 관련 연구를 할 수도 있다. 항공전문의사는 현재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등의 항공사부속병원이나 인천국제공항의료센터, 대학병원, 한국의학연구소, 항공우주의료원 및 개인 병원 등 다양한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창공을 가르는 어릴 적 꿈을 마음 속에만 담아둔 채 지나고 있었다면 대한항공우주의학협회(http://www.asmak.or.kr/)나 군항공우주의료원(043-290-5412)을 찾아봐도 좋다.

김준혁 수습기자/중앙
<silmarllion@e-mednew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