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웨이에 선 의대생의 상처치유기
도전, 슈퍼모델 신지연!
그래, 그건 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불은 순식간에 내 몸으로 옮겨 붙었고, 검붉게 변한 피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델을 꿈꾸기엔 상처가 깊었고, 누군가는 자랑할 만한 길거리 캐스팅도 내겐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슈퍼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그토록 내가 인정하기 싫었던 콤플렉스 하나를 이겨내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인터뷰 기자의 마지막 질문, 그 깊고 오랜 상처에 이젠 당당해졌냐는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저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요.”
너무도 평범하지만, 또 너무나 수상한 이 여자. 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1학년, 신지연 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열일곱에 겪은 상처,
위가 아닌 아래를 보게 되다
어느 고등학교 축제의 과학부 부스, 알코올 램프의 불이 지연 양의 옷에 옮겨 붙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지만 그 누군가를 위해서였을까, 그녀는 그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려 들지 않았다. “사실 그 친구에게 직접 사과를 받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 친구도 많이 미안할테고, 사과할 용기도 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죠. 부모님도 많이 속상해 하셨구요. 특히 어머니는 제가 붕대를 다 감은 후에 오셨는데, 그때는 제 얼굴이나 손이 괜찮은 걸 보고 안심하셨거든요. 그리고는 이틀 후에 드레싱을 하느라 붕대를 푸는데, 어머니께서 조용히 병실을 나가시더라구요.”
고등학교 1학년, 세상엔 때로 아무 이유 없이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든 나이.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에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들어왔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환자, 귀가 타버린 환자, 그리고 전선을 잘못 잡아 사지가 다 손상된 환자 등.
“저는 입원 가능한 환자의 마지노선이라고 해야 할까요. 얼굴도 괜찮고 일상생활도 문제가 없는데다, 팔의 안쪽이나 허리 등에만 상처가 있어 가리기도 쉬워요. 수술도 이 정도면 잘 된 편이구요. 사실 저도 화를 내고 싶었죠. 그런데 드레싱을 하니까 엄청 화끈화끈 거리고 더운 거 있죠? 그것도 여름에 다쳤으니까요. 그래서 화내면 더 열나니까 아프지만 참자, 화나지만 참자, 다치고 나서 정말 인격수양 많이 했죠(웃음). 옛날엔 다혈질에 예민하던 성격이, 수행을 통해 긍정적으로 바뀐 거에요. 상처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려고 노력했구요.”
화상은 모델의 꿈을
태웠지만...
런웨이를 걷는 짧은 시간, 그 안에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알렉산드라 엠브리시오나 하이디 클룸 등, 프로페셔널한 모델의 모습은 지연이 동경해오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며 키가 많이 큰 지연은 실제로 길거리 캐스팅도 받았을 정도. 하지만, 그때는 이미 상처가 남은 후였다.
“주위에서 사진을 찍어보라고 할 때에도 장난으로 넘겼는데, 다치고 나서야 그런 기회가 온 거에요. 상처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냥 안하겠다고 했어요.
물론 꼭 모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사실 다치기 전에는 모델이든 의사든 크게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정작 모델이 될 기회가 있을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야 그런 기회가 오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기회를 놓쳤다기보다, 기회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구요.”
화상 후, 지연은 자신이 꿈꿔왔던 또 다른 프로페셔널,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치료해주면 어떻겠냐는 친언니의 조언도 큰 역할을 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웃음), 그땐 진짜 빨리 퇴원해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두 달간 입원했던 지연이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후였다. 평소 성적은 반에서 5등 정도로 의대에 가기엔 다소 부족한 성적. 몸조차도 따라주지 않았다. 피부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늘 허리를 세워야 했고, 오른팔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배가 은근히 활동에 중요하더라구요. 웃거나 울거나, 눕거나 앉거나, 심지어 말할 때도 배가 많이 쓰이는데, 배를 다치니 일상생활이 힘들었죠.”
그 모든 악조건을 의지 하나로 버텨낸 지연, 성적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기말 고사에 성적이 올랐지만, 기대보다는 못나왔어요. 1등할 줄 알았는데...(웃음). 확실히 1등하는 애들은 다르더라구요. 그렇지만 성적이 안 나와도 조금만 더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계속 했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1등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화상을 딛고, 몇 번의 큰 고비를 넘기고, 한동안 공부에만 매진했던 지연. 상처에 대한 아픈 기억도 희미해져가던 어느 날, 지연은 그토록 자신이 바라던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화상은 양의 꿈 하나를 좌절시켰지만, 양을 좌절시키진 못했다.
도전, 슈퍼모델 신지연!
지난 6월, 케이블의 한 채널에 지연양이 출연했으니, 바로 슈퍼모델 오디션 프로그램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2’. 최후의 26인이 되기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 선 지연,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처음에는 반장난이었죠. 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1000명 안에 들고, 실물 심사도 통과하고, 최후의 26인을 뽑는 자리까지 가니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내가 모델이 될 수도 있을까’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심사의원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그런 게 느껴지더라구요. 제가 상처가 크다는 걸 아니까, 제가 최대한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히 얘기를 끌어내려는 느낌? 순간 ‘아, 내가 지금 동정을 받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과 함께 울컥하더라구요. 난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 괜찮은데, 주위에선 이걸 안타까워하는구나, 하면서요.”
방송이 나가는 동안 미국에 있느라, 한참 후에야 방송을 봤다는 지연. “방송 끝에 인터뷰를 잠깐 하는데, 그때는 엄청 해맑게 웃고 있는 거 있죠? 사실 정말 후련했어요. 제 콤플렉스 하나를 이겨낸 느낌이랄까요. 런웨이를 걷는 것도 한 번 느껴봤고, 좋은 경험도 많이 했고, 이제 모델에 큰 후회나 미련은 없어요.”
화상이 가르쳐 준 것들
본과 1학년,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가장 힘든 시기. 하지만 그 와중에도 꾸준한 운동으로 슈퍼모델 오디션에 나갈 정도로 관리를 한 지연양.
“음,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어떻게 시간을 냈내요. (웃음) 사실 그런 것 보다 화상 후에 많이 아파봤잖아요. 몸이 약하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느꼈어요. 잠도 잘 자고, 운동도 꼬박꼬박 해요. 지금이 바쁘다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바빠진다고 하잖아요? 아, 그런데 저 성적 그렇게 안 나빠요. (웃음)”
크게 다쳐본 만큼, 건강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지연. 하지만 지연이 화상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을 밝게 사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사실 길거리 캐스팅을 당할 때, 제 주위에 예쁜 애들이나 키 큰 애들도 많았어요. 게다가 공부하느라 제대로 꾸미지도 못했는데, 그분이 절 뽑으신 거 있죠? (웃음) 주위 애들이 ‘왜 쟤가 받았지?’하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제가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그분은 가능성을 보셨구나!’ 하고요, 히히히. 아, 설마 이거 기사에 쓰실 건 아니죠?”
정세용 기자/연세
<avantgarde91@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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