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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서의 저자들 : 2회 - 닥터 턴슬리 해리슨

 해리슨, 로빈스, 가이톤, 그리고 홍창의... 의대생이라면 누구나 봐야 하는 교과서들의 제목을 장식한 이 분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의대생신문에서는 올해 6회에 걸쳐 의학교과서의 저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파헤칩니다. 지난번 가이톤에 이은 그 두 번째 순서로 내과학 교과서의 저자, 해리슨을 만나봅니다.

해리슨가(家)의 정신은 계속될 것이다

 닥터 틴슬리 해리슨(Dr. Tinsley Randolph Harrison)은 미국 알라바마 의과대학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그를 기리는 동상도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건물 또한 학교의 명물이다. 이러한 신적인 존재 닥터 해리슨이 바로, 50여년간 전 세계 의학도들의 필수 지침서인 『해리슨 내과학(Harrison's Principles of Internal Medicine)』의 편집자이다.
 이렇게 역사에 남을 위대한 업적은 그 혼자만의 노력과 열정에 의한 당연한 결과라 볼 수도 있지만 닥터 해리슨의 경우에는 한 천재의 영감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해리슨가(家) 대대로 지켜온 의사 집안이라는 자부심과 자식들을 훌륭한 의사로 키우겠다는 정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 대대로 새로운 지식을 갈망했던 해리슨가는 선대에서 갖지 못했던 환경을 후손들에게 제공해 주려는 노력이 대단했다. 자식을 능력 있는 의사로 키워내려는 해리슨가의 정신이 닥터 해리슨과 그의 업적, 해리슨 내과학을 탄생시켰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닥터 해리슨은 6대에 걸쳐 자자손손 의사생활을 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리슨가 초대 의사인 그의 증조할아버지부터 소개해나가겠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닥터 틴슬리 해리슨(John Tinsley Sr.)이 살던 때에는 체질설이 만연했다. 즉, 피, 점액, 황담, 흑담의 4가지가 균형이 흐트러지면 병에 걸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의사들이 일부러 출혈이나 구토를 유발시켜 질병을 치료하려 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러한 치료는 도리어 환자에게 더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기에는 물론 정식 의사 자격증도 없었다. 해리슨의 증조할아버지 역시 의사 자격증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버지니아 의과대학에서 짧게나마 수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수련과정을 마치는 것보다 결혼 생활을 택하였기 때문에 미처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의사로 활동한 것 외에도 목화 농장의 소유주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 덕에 두 아들들(닥터 해리슨의 할아버지)을 의과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19세기 초반 당시 대부분 미국 의과대학은 등록금만 내고 마지막 학기말고사만 출석을 하면 졸업장을 줄 정도로 허술했다. 닥터 해리슨의 할아버지들 또한 이런 식으로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닥터 해리슨의 할아버지, 존 틴즐리 주니어(John Tinsley Jr.)의 경우에는 형과 같이 의과대학을 다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남부 연합군 편에 지원하였다. 그런데 곧 북부 연합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 천운이 따랐다. 북부 쪽에서 그의 뛰어난 의술을 알아보고 북부 쪽 군의병으로 일 해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남부 연합군을 향한 충성심으로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의사로서 의술을 펼치고 싶은 욕망이 컸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 조건 하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 그 첫째 조건은 1) 양키들(북부 연합군)보다 남부파 쪽 환자들을 먼저 치료할 권리였고 둘째는 2) 남부 연합군의 상징인 회색 바지를 입고 일할 수 있는 권리였다.
 남북전쟁 이전만 해도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를 뽑거나 종기를 째는 것 같은 간단한 작업 외에는 수술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닥터 해리슨의 할아버지같이 의사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수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수술경험이라는 의사로서의 귀중한 자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은 참담했지만 덕분에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가진 능력 있는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그로스 해리슨(Groce Harrison)- 닥터 해리슨의 아버지- 또한 의사의 길을 걸었다. 1893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 1기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존스 홉킨스대 졸업장 보다는 사랑을 택하였다. 또, 나중에 볼티모어에서 좀 더 심도 있는 수련과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자신은 가족을 3년이나 내팽겨 칠 수 없다며 포기하였다. 그 정도로 가정을 중시했다. 대신 아들이 ‘의학계의 대부’가 되도록 모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20세기 의학에서는 황금의 시기에 드디어 틴즐리 란돌프 해리슨(Tinsley Randolph Harrison)이 태어났다. 그동안 청진기, 검안경이 발명되고 미생물학, 방사선, 면역학과 화학치료 요법 등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또한, 학부생 실습제도가 도입되고 병원에는 과별로 세분화된 레지던트제도가 시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존스 홉킨스와 같은 몇몇 큰 학교에서 재단의 후원이 상당해 지면서 교육과정이 탄탄해지기 시작했다. 의과대학, 수련과정, 의료과학기술 등 모든 면에서 황금의 시기였다.
 그리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1922년에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다시 홉킨스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를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바로 펠로우쉽을 거쳐 부교수로, 또 교수로 임명되었다. 록펠러 재단의 후원을 받아 해외 리서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알리바마 대학에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거기서 첫 의과대 학장을 맡기도 했다.
 방대한 양의 내과학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이 바로 현재 총 12종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내과학의 정석이라 불리는 해리슨 내과학이다. 의학 전 역사를 통틀어서 이 책만큼 많이 팔린 내과관련 교재가 없을 정도이다. 1978년 그가 운명하고 나서 편찬된 제9판에서부터 원래 ‘내과학의 기본원리’(Principles of Internal Medi-cine)이었던 책 이름을 해리슨 내과학(Harrison's Principles of Internal Medicine)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내과학 개념서로서 ‘해리슨’을 손꼽는다.
 건물과 동상 등 닥터 해리슨을 위한 기념비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가 갈고 닦아 온 의학의 역사를 닥터 해리슨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들의 피와 땀과 노력을 아는 그에게 뭇 기념비들보다도 다음 세대의 닥터 해리슨, 다음 세대의 의학 혁신자들이 펼칠 의술 들이 더 기대되고 자랑스러울 것이다. 위대한 해리슨가의 정신은 계속 될 것이다.

문정민 기자/중앙
<moon_jm@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