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역사』 재컬린 더핀
- 현대의학과 실증주의, 생리학을 중심으로 -
히포크라테스는 영웅일까요? 악인일까요? 당연히 영웅이라고 답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금지하여 외과학의 발전을 저해했고, 여성은 의술을 배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악인일까요?
이 문제를 좀 더 확대 시켜 봅시다. 근대 서양의학에서 유래된 현대의학은 다른 어떤 의학체계보다도 견고한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 소위 말하는 ‘현대의학‘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의료가 존재합니다만, 이들 중 어떤 것도 현대 서양의학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하지요. 그렇다면 정말 오늘날의 의학이 ‘가장 적절한, 최상의’ 의료형태 일까요?
『의학의 역사』의 저자는 그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현대 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실증주의적 관점은 현대의료를 어떻게 구성하게 되었을까요.
17세기 윌리엄 하비가 혈액순환의 과정을 밝혀낸 이후, 많은 사람들은 생명 기능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자연적 사물은 조직체이고, 이 조직체는 마치 기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 기계론은 생기론과 대립하게 됩니다. 생기론은 생명 현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에 지배되고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그 당시 생리학의 주된 과제가 생명현상의 근본을 규명하는 것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생리학에 스며든 실증주의
- 실험생리학의 탄생
생리학은 19세기에 들어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여기에는 당대 실증주의 철학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세기 서유럽에서 발생한 실증주의는 형이상학적인 사변을 배격하고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강조했습니다.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 철학사조로 자리 잡은 실증주의는 ‘지식’은 오직 직접 관찰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으며, 사상(事象)의 원인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런지’ 묻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감각을 넘어서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때문에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적으로 답변할 수 없는 ‘왜’보다는 검증이 가능한 ‘어떻게’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 새로운 형태의 생리학이 탄생합니다. 오늘날 현대의학의 밑바탕이 되는 실험생리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험 생리학이란 어떤 문제현상에 대해 그것이 일어나는 해부학적 구조를 찾아내어 그 구조에 외과적인 변형을 가한 뒤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후 파스퇴르나 코흐가 세균 매개설을 확립하여 수많은 원인균을 밝혀냈던 것도 모두 실험을 통해 이뤄진 일입니다. 이들이 이끈 세균학 혁명은 몸이 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다루는 면역학이라는 분야를 탄생시키게 되지요.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몸의 대사를 조절하는 호르몬 연구도 활발해지게 되고, 이외에도 신경생리학, 유전학 등이 실험실 연구를 통해 빠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현대의학과 실증주의 - 숫자의 의학
실증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기초의학 분야였지만, 그 영향은 점차 임상의학에도 미치기 시작합니다. 직접관찰에 의한 지식만을 사실로 간주하는 실증주의는 임상진료에 있어서 ‘숫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오늘날 의학에서의 인체는 숫자의 조합으로 표현됩니다. 각종 수치들이 ‘정상 범위’내에 있으면 ‘건강한 인체’로 여겨집니다. 만약 이들 수치가 비정상적인 값을 가지면, 의사는 그 수치와 관련된 해부학적 구조와 생리학적 기능에 주목하여 치료법을 알아냅니다. 이 과정에서 환자의 마음이나 외부조건-친구관계 집안환경 등-은 덜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지요. 현대의료체계에서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정신의학은 이러한 ‘숫자 의학’에 밀리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1950년대에 들어서는 인지와 운동이 측정 가능한 기계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기존 정신과학에서 다루던 질병들이 신체질환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간질이나 크레틴 병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에 따라 정신의학이 다루는 질병의 범위는 ‘아직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못하고 남겨져 있는 질병’으로 축소되게 됩니다.
예방보다는 치료에 중심을 두는 것도 숫자의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건강하다’고 여겨질 때 인체는 의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의학이 손을 쓰는 것은 수치가 흐트러졌을 때입니다. 문제는 현대의학이 ‘언제’를 잘 예측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질병이 발현하는 데에는 신체적 조건뿐만이 아니라 신체 외적요인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신체 내적 조건이 비슷하더라도 어떤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환경에 놓였느냐에 따라 건강상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신뢰할 만한 수치로 환산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대의학에서 관심 밖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맨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포크라테스는 영웅일까요? 악인일까요?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19세기 실험생리학의 출현 아래 약 200년이 지난 현재, 현대의학이 이뤄놓은 업적은 실로 눈부십니다.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고 건강상태가 양호해진 데에 현대의학이 큰 기여를 해냈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하지만 그러한 성과의 원동력이 된 ‘숫자 의학’은 의료에 있어 인체의 비물질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을 하락시켰습니다.
실증주의에 기반 한 현대의학. 이것이 가장 옳고, 적절한 의료형태인가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의학이 결코 확정된 체계가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의학이며 그 구성 방식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이 현재 의학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새로운 ‘구성’에 몸담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첫 스터디를 마칩니다.
■ 포럼 참가자_ 이예나(순천향), 조원경(순천향), 노해준(가톨릭), 정세용(연세) 김정화(한림)
■ 포럼 일시 및 장소_ 1월 30일 서울 강남역, 문화공간 토즈
■ 정리_ 김정화 기자/한림 <eudimonia89@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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