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본 옛날옛적 의학이야기
<de_waag> 암스테르담의 해부학극장.
현재 1층에서는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미술관을 찾았을 때 네모반듯한 그림 수백 점을 보며 지루해했던 기억, 다리는 점점 뻐근해지는데 별로 볼 만한 것도 없었던 기억. 그런 기억 때문에 미술관은 종종 ‘재미없는 곳’으로 낙인찍히고는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미술관은 거대한 도서관과도 같다. 그림 한 장에는 화가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 뿐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어떤 집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까지, 여러 이야기들이 빼곡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의사들은 어떤 모습이었을 지,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이 그림은 1632년에 그려진 것으로 집단초상화라는 장르에 속한다. 집단초상화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초상화의 양식으로, 여러 사람을 화폭에 담으면서 그 집단의 특성을 드러내는 그림을 말한다.
그림을 살펴보자. 밝은 빛은 인물들의 얼굴과 시신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튈프 박사의 손끝에 온 정신을 집중한 사람, 시신의 발치에 있는 책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 필기노트를 들고 감상자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 등 일곱 명의 인물은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나면서도 그림의 분위기와 공기로 한 그룹에 소속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앞에서 진지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해부학 실습이 이뤄지고 있을 것만 같다.
이 그림에서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화면 한가운데, 대각선으로 누워 있는 시신이다. 그의 창백한 피부색은 인물들의 얼굴색과 대조를 이루고, 감상자의 시선은 근육이 드러난 팔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든다. 당시의 전통대로라면 해부는 복부부터 진행하는 것이 정석이었을 터인데, 튈프 박사는 팔을 먼저 해부하고 있다. 전통과는 어긋나지만 튈프 박사가 팔에 먼저 매스를 대고 있는 이유는 16세기 해부학의 대가 베살리우스에 대한 존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베살리우스는 팔이 의학도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놓여 있는 책은 아마도 베살리우스의 <인체해부에 대하여>일 것이다.
<rembrandt>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캔버스에 유채, 마우리츠호이스 왕립미술관
영화보다 해부 실습
왜, 그리고 어떻게 렘브란트는 끔찍한 해부학 강의 장면을 화폭에 담았을까? 네덜란드에서는 16-17세기부터 1년에 한번정도 해부학 강의를 진행했다. 이 때 제공되는 시신은 대부분 사형당한 죄수의 것이었다. 1년에 한번이라니 너무 적은 거 아닌가 싶지만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해부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던 것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나아진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해부학 실습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외과의사가 전문가의 손길로 능수능란하게 시신을 해부하는 모습이, 일반인들이 입장료를 내고 지켜볼 정도로 흥미진진했던 모양이다. 암스테르담에 가면 이 ‘해부학 극장’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해부학도 예술이다
화방의 쇼윈도를 보면 유화물감, 파스텔, 색연필 같은 우아한 화구들 사이에 펼쳐져 있는 해부학 책을 발견할 수 있다. 미술학도들을 위한 해부학 교과서도 존재한다는 사실. 르네상스 시기에도 해부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의사들보다는 화가들이었다. 이 시대의 해부학자는 대부분 미술가들이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경우 인체를 해부할 때 뼈, 근육, 혈관, 내장 등 구조별로 실시했던 것으로 보이고 신체의 세부적 구조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하지만 정작 의사들은 이런 부분에 무지했고,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해부학이 의학에 별 효용이 없었던 것이 그 까닭이다. 환자가 죽기 전에는 체내의 변화를 알 수 없었고, 그것을 고칠 수도 없었기에 의사들은 해부학적 사실들을 치료에 응용하지 못했다. 베살리우스 이후 1세기 반 동안 해부학은 탐구의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해부학은 18세기 들어서야 학문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의과대학의 반 정도가 정규 과목으로 지정했다.
<the operation> 수술, 1631, 판넬에 유채, 알테 피나코테크
브라우버(Adrian Brouwer)의
<수술>
이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장르화다. 장르화란 17세기 플랑드르지역에서 유행한 미술 양식으로 일상의 장면들을 꾸밈없이 화폭에 담아낸 그림들을 말한다. 아드리안 브라우버는 주로 농민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그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림의 전면의 인물이 한 농민의 발에 외과적 치료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환자의 표정에서 그의 고통을 읽을 수 있다. 오른쪽 뒤의 인물은 면도를 하는 것으로 보아 저 허름한 집은 외과와 이발소를 겸업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브라우버의 다른 작품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고 드러냈다. 당시 사회에서도 농민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이었지만 화가는 그들을 경멸하거나 비웃지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연민을 보내고, 그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소박하고 허름한 집을 비추는, 밝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햇살이 작가의 마음을 감상자에게 잘 전해주고 있다.
외과의사는 칼을 쓰는 기술자
중세는 물론이고 학문이 부흥을 이룬 르네상스 이후까지도 유럽의 의학은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대학의 의학부에서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이론을 답습하는 추상적인 이론이었다.
이런 수업을 듣고 의학부를 졸업한 이들은 대부분이 내과의사였고 이들은 상처를 봉합하거나 피를 흘리게 하는 것 등 환자에게 직접 처치나 수술을 하는 것을 천하게 여겨 기피했다. 이 영역은 외과의사가 담당했고 이들은 기능직으로 분류되었다.
당시에는 ‘칼’로 영업하는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같은 업종이었다.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칼 조작 면허가 필요했는데 이 면허를 보유한 사람들이 바로 이발-외과의사(barber-surgeon)이었다. 이들은 거기에 치과의사까지 겸하는 경우가 흔했다 하니 ‘면도, 이발, 방혈, 종기 짜기, 발치’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달아 놓고 영업하는 이발소가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대학의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외과의사들의 간판은 피와 고름을 받는 그릇 모양이었다고 한다.
내과 vs 외과, 견제와 대립
대학 출신 의사 중에서도 외과를 주업으로 삼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발사와 같은 돌팔이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파랑, 빨강, 흰색의 나선형 무늬봉 간판을 진료소 앞에 세워두고 일했다. 외과의사들은 우아하게 의사노릇을 독점하던 내과의사들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의과대학 과정을 개설하여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라틴어로 수업을 하고, 해부학도 교과과정에 들어가 있었다. 졸업생들은 내과의사들과 같이 긴 가운을 입었는데 짧은 가운을 입는 이발외과의사들과의 다르다는 것을 환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과의사들은 권위있고 귀족적인 지식인 의사는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환자의 피와 고름을 만지는 더러운 일을 해줄 기술직이 사라져서는 곤란했다. 따라서 내과의사들이 주도하던 의과대학에서는 단기간에 외과의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이를 통해 외과의사를 양산한 것이다. 한편 이발-외과의사들은 이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간판을 피와 고름을 받는 그릇에서 청,홍,백색으로 된 삼색 나선 표시로 바꾸어버렸다. 결국 사람들은 대학을 나온 정규 외과의사와 돌팔이 이발외과의사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 때 이발 외과의사들의 영업장 앞에 자리 잡고 있었던 삼색봉은 오늘날 이발소 앞에서도 돌아가고 있다.
<외과도구> 당시 외과의사들이 사용하던 도구들
팔꿈치 마취 후 4분내 절단완료
외과의사를 찾은 응급환자의 경우 딱히 치료법이 없어서 대부분 팔이나 다리를 절단했다. 마취는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한다고 해도 매우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술을 아주 많이 먹이거나 때려서 기절시키는 것이 마취의 전부. 수술시에는 환자를 쇠사슬로 묶어놓거나 조수들이 팔다리를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의사가 수술용 망치나 톱으로 절단했다. 이런 치료에도 나름의 기술이 필요했으니, 뼈를 자를 때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한 번의 칼질로 원하는 부위를 잘라낼 수 있도록 기술을 연마했다. 수술 중에 환자는 극도로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치고 소리를 지르는데다가 환자가 수술 중에 통증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으므로 수술은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게 끝내는 것이 외과의사의 미덕. 수술이 끝난 후 수술부위는 봉합하는 대신 인두로 지져서 지혈했다. 이런 치료를 하면서도 환자에게 엄청난 액수의 치료비를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환자들은 외과를 잘 찾지 않았다고 하는데, 반은 치료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서, 반은 치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없어서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 중 총상을 입은 경우에는 뜨거운 기름을 발라 치료했다. 치료 중에 사망하는 환자가 많았음에도 대부분의 의사들은 낡은 치료법만을 고수했다.
18세기 초가 되어서야 파리대학에서 외과를 다시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근대적인 외과가 시작되고 외과가 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은 사라지게 된다. 19세기에 들어서서야 마취법과 소독법이 발전하여 외과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해부학극장> 해부 장면을 관람하던 해부학극장의 내부
문지현 기자/중앙
<jeehyunm@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