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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의 최후

한 영상의학과 의사가 자신의 발표를 위해 길을 가던 중 호흡곤란으로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의사로써의 직무를 떠올리며 환자에 필요한 처치를 하고 119에 신고를 하였다. 의사는 자신의 일도 미룬 채 구급차에 타서 환자를 보았지만 결국 환자는 이송 중에 죽고 말았다. 이 의사는 어떤 결과를 맞았을까. 그는 호흡곤란에 관한 전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루카는 성서에까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기록했지만 요즘은 이렇게 판단 기준이 다르기도 하다.
지난 달 말일, 서울지방경찰청은 ‘비밀’ 홈페이지를 만들어 의사국가시험 문제를 ‘유출’한 혐의로 ‘전국 의과대학 4학년 협의회’ 전 회장을 비롯해 전 집행부 10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그들은 자격 미달인 의대생들을 의사로 만들어 국민건강권을 침해할 의도는 전혀 없었음은 물론이고 국시원의 고귀한 업무를 훼방 놓을 의도도 없었음에도 이 같은 최후를 맞았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무한경쟁시대에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 뿐일 것이다.
사안의 부당성은 이미 지난 호 기사(79호 “국가시험 문제 복원, 무엇이 문제인가”)를 통해 지적하였다. 실기 시험 문제가 복원이 아니라 설령 정말로 유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음은 처음의 SBS 보도 다음 날 국시원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시험일자에 따른 합격률을 나타는 그래프가 그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하지만 언론은 그런 사실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명백히 사전 유출이 아니라 문제 복원 혹은 정보 공유의 수준임에도 SBS에서 최초로 보도할 때 사용한 '유출'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비밀 홈페이지’라는 표현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불구속 입건 후의 기사들은 더 심해서 ‘수법’, ‘조직적’, ‘치밀한 계획’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유출’, ‘비밀’ 따위의 선정적인 용어를 써가며 의대생들을 매도하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전사협 관계자를 실제로 만나보거나 의사국가시험 과정에 대해 제대로 취재해 본 기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특히 실망스러운 곳은 ‘청년의사’다. 그들이 독자로 삼은 ‘청년의사’들이 어떻게 의사가 되었는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청년의사’라는 제호를 사용하면서 다른 기성 언론들과 하나도 다름없이 선정적인 기사를 써대는 모습은 참으로 넌센스이다. 그런 기사를 쓰기 전에 차가운 사회에 발을 내딛자마자 위기를 맞게 된 청년의사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내는 게 먼저가 아니었을까.
국시원은 지금껏 시험 제도의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의대생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급기야 지난 6일에는 이번 사건의 중심에 선 전사협 집행부들에 대해 합격 취소 등의 강력한 행정처분을 하겠다는 공식입장을 표명하였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 입장표명에 이어 실기시험센터 증설 및 필기 기출문제 공개 등을 골자로 국가시험 운영 개선 계획을 발표한 국시원의 이중적인 태도이다. 지금까지의 국시 운영에 문제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학우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한 이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저작권 침해라는 명백한 불법행위를 저지른 출판사보다 그 혐의가 애매해 보이는 전사협 쪽을 먼저 입건한 경찰과 검찰, 그걸 신나서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  어디 하나 믿을 곳은 없어 보인다. 우리 후배들을 위해 힘쓴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최후를 맞기 위해서라도 또 불합리하게 매도되고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가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고래는 생선일까

80호(2011.04.11)/오피니언 2011. 5. 6. 22:14 Posted by mednews


고래는 생선일까

경남 울주군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그림이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그림에는 각종 사냥도구와 토끼, 사슴, 물개와 같은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어 먼 옛날 우리네 조상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의 중심에 고래들이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끼니 해결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고래사냥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바위에 고래를 새겨 두었습니다.

‘고래는 생선이다’라는 명제를 두고 어느 자연대 교수와 인문대 교수가 두 시간동안 입씨름을 했지만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전적인 분류를 따르자면 포유류에 속하는 고래는 어류에게만 허용된 물고기나 생선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기가 어째 좀 부자연스럽습니다. 멸종위기에 처해 포획이 금지된 동물인 고래를 식탁에서 늘 마주하는 고등어나 꽁치 같은 아이들과 동일선상에 놓기가 미안해서일 수도 있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고래는 엄밀히 말해 생선으로 치지는 않습니다.

일견 그리 복잡해보이지는 않는 이 질문을 두고 두 교수가 엎치락뒤치락한 것은 어째서일까요? 어깨에 작살을 멘 채 통나무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내달리던 오천년 전 조상들은 고래가 생선일지 아닐지 그 구분을 헷갈려 했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이름붙이기’의 이면작용에 있습니다. 대상에 이름을 다는 약속행위는 ‘스펙트럼’에 대한 인식을 전제합니다. 빨강을 두고 빨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빨강 이외에 다른 색깔들도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처럼, 유개념에 종차를 적용함으로써 정의(definition)가 성립한다는 점에서 이름붙이기는 태생적으로 분류나 구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포유강 고래목의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약속에 준해 고래를 바라본다면 어류에게만 허용된 ‘생선’이라는 이름은 자동으로 배제되는 반면, 다소 자기중심적이긴 하지만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물에서 살고 먹을 수 있는 동물인 고래를 생선으로 간주하는 데 거리낄 게 없습니다. 고래에 ‘포유강’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고래가 가진 생선으로서의 속성이 무너져내리듯,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대상을 파괴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그 인문대 교수는 식탐만 강한 사람이기보다는 고래를 고래 자체로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 언어가 세상을 재단해내는 힘은 가공할만합니다. 백혈병을 네 가지로 나누고 그 중 한 가지를 또 일곱 가지로 쪼개어 곧 죽을 사람도 살려내는 현대의학을 비롯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 중 99%는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바디감’이라는 단어를 접한 후 커피 맛을 조금 더 잘 느끼게 된 바리스타처럼, 언어가 없었다면 애당초 대상을 인식조차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어는 본질적으로 파괴를 통해서만 기능할 수 있는 까닭에, 우리 무의식에 교묘한 함정을 파 넣기도 합니다.

‘전문직’이라는 단어는 세상의 직업을 전문직과 전문직이 아닌 것으로 나누지만 그 기준은 애매하며,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비전문성을 강요합니다. 외(外)할머니는 (친)할머니에 대해 바깥쪽에 위치하는 존재로 규정되며, ‘예과생’이라는 단어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한 예비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라는 뜻의 ‘의예과 학생’의 줄임말일 뿐이지만 ‘본과생’에 대비되어 권력관계의 함의를 주입받습니다.

‘사랑’이라는 한 낱말을 던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정과 기억의 그물을 혀 밑에 우겨넣어야 할까요. 진정한 정체성은 그를 겨냥한 모든 이름이 사라질 때에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래는 자기 이름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면 포유류라는 이유로 생선이 아니기보다는 차라리 당신에게 생선이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편집장 최성욱
<editor@e-mednews.com>

일본대지진, 어떤 지평에 서서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인간의 내심은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공포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흔히 인간을 오해와 편견의 동물이라고 한다. 오해와 편견은 인간의 본질인 모순을 이룬다. 이 모순은 주변 환경이 어느 순간 공포로 변했을 때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공포는 인간의 현실을 위협하는 사회적, 기술적, 정치적 위험에서 비롯된다.
불과 한 달 전에 일어난 일본 대지진 이후 인접국인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혼란상은 인간의 내심이 기술적, 정치적 위험에 의해 공포로 리모델링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지진 직후 한반도 남쪽에서는 유사 이래 최고액의 성금이 기탁되었으며 너나 할 것 없이 깊은 슬픔을 표했다. 그러나 일본사 교과서 개정판에서 독도영유권 주장 문제가 대두되자 일본대지진 피해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여기에 원전에서 쏟아져 나온 방사능 문제가 직결되자 일본 대지진이라는 휴머니즘을 재고하게 해준 사건은 열도에 대한 비난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이 인간의 내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올곧은 방향으로 경주하도록 노력하는 것 역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역사를 아울러 보편타당한 진리로 이야기되는 것은 바로 이런 혼란상에서도 중심을 지켜낼 수 있는 준거를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정확히 바라보는 핵심은 그 준거를 무엇으로 잡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떤 지평에서 일본대지진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현시점에서 보면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반성 없음과 당면한 핵물리적 위협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민족 자체를 하나의 적성국 내지는 적성민족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가 내지는 민족이란 객체를 향한 동정과 비난이 한국이라는 국가 혹은 민족에 자기동일시하고 있는 주체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이것은 분명 사려 깊지 못한 사고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정작 의문부호를 기시해야 할 곳은 주체와 객체에 관한 것이며, 이는 결국 층위와 계급의 문제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대지진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들의 인구 중 30% 이상은 60세 이상으로 초고령 지역사회다. 이들 지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수 기나 유치한 것도 지역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열도 내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에 기술지배의 총아인 원전을 유치하면서 그 기술이 안고 있는 리스크를 최하위 계층이 고스란히 감당하게 되었다. 이런 마을에 쓰나미가 밀려왔다. 리스크가 현실의 위협으로 변한 지금, 그곳에 살았던 이들은 세계 최강국이라는 지위와 전연 동떨어진 ‘난민’이 되었다. 
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내 세력이나 방사능 대책에 있어 국가 이기주의에 빠진 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우경화 일로의 일본 정치인들, 관료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우파 지식인들은 물론이며 이를 방조해온 자유주의 지식인일 것이다. 지역적으로 이들 중 미야기현과 같은 리스크가 큰 빈곤지역에 거주하는 비율은 아마 극히 적을 것이며 계급적으로도 분명 이들은 유산계급 내지는 지식인계급일 것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원전 위험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원자력산업에 대한 위험 교육은 전무한 채 오직 선순환만 부각시켜 대국민홍보를 하면서도 과거사정리위원회를 해체시키고 위안부 피해대책 활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조해주지 않는 이 나라의 소위 지도층이라 불리는 이들보다 쓰나미에 희생된 일본의 필부필녀들이 더욱 간악한 존재일까? ‘아니다’라는 대답을 했다면 우리의 눈이 어두워지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범주의 오류 때문이다. 민족과 국가라는 범주 앞에서 계급과 계층이라는 범주가 가려질 때 우리는 지정학적인 요인이 얽힌 사건을 옳지 못한 시선으로 판단하게 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일본 시민단체의 경우

얼마 전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부조리에 항거하던 이들이 행한 따뜻한 기도는 우리가 어떤 지평에서 사고해야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난 달 16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 962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는 집회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추모집회’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누구보다도 ‘일본’이라는 상징체계에 대해 분노할 그녀들은 열도에서 자신들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했을지 모르는 그곳 민중들을 위해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실제로 지진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미야기현에는 일본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주인공이었던 송신도 할머니다. 쓰나미가 몰려온 날 송신도 할머니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할머니의 대일본정부 재판을 지원하던 일본 시민단체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은 한국 측의 위안부 피해대책 단체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독립영화사 측에 할머니의 실종을 가장 먼저 알렸고 수 십 만의 난민들로 가득 찬 수용시설에서 할머니를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 결과 일주일 만에 난민 수용소에서 할머니를 찾았고 지금은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모신 상태다. 십 수년 간 할머니의 재판을 돕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할머니를 찾은 그들은 한국 정부도, 한국 위정자도, 한국 민족도 아니었다.

연대감과 비판이 향할 지점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하여

인간의 내심과 국가주의적 이념을 동일시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내화되지 않은 민주주의에서 비롯된 일종의 아노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노미는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물활론적으로 인식하는 동아시아 국가에서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인다. 물론 과거사 왜곡 문제와 방사능 피해라는 문제는 분명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책임질 대상을 잘못 설정한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비판과 비난은 오해와 편견을 부추길 뿐이다. 가없는 죽음에 대한 연대감은 분명 유지되어야 하며 우리가 강력히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연대감과 비판이 향할 지점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묘가 요구된다.

이현석 기자/영남
<h@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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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목소리

80호(2011.04.11)/오피니언 2011. 5. 6. 22:11 Posted by mednews

독자의 목소리

작년 신입생일때부터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특히 친한 동기중에 한명이 기자로 활동중이라 항상 챙겨읽고 코멘트를 해줍니다. 매번 장난스럽게 비판의 말을 하지만 바쁜 의대생활에도 이렇게 멋지게 기자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한살 어린 동생이지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항상 화이팅이라고 전하고 싶네요.
이렇게 항상 요즘 이슈되는 주제를 쉽고 깔끔하게 정리된 기사를 써주시는 많은 의대생신문 기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화이팅입니다!!
-  김유경 / 전남

의대에 들어와 처음 보게 된 의대생신문! 기사들이 하나도 버릴게 없어서 참 좋았습니다. 또 인터넷이나 타 매체에서만 보던 무상의료나 국시에 대한 기사를 의대 내부의 시각으로 보니 한결 지평이 넓어진 느낌입니다. 이같은 효과는 비단 저뿐만이 아닌 다른 의대생, 더 나아가 다른 국민들에게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국가고시에 대한 기사의 경우, 의대생의 입장에서 쓴 기사라는 점이 같은 주제의 다른 기사와 확연히 달라 의대생 내부에서만 볼 기사가 아니라 다른 매체에도 소개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신문을 만들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김준혁 / 중앙


신문 읽고 푸는 퀴즈!

1. 장하준이 그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
 에서 비판한 경제사조는?

2.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학교와 사회를 벗어나
 청춘의 의미를 찾는
 ‘란초’를 주인공으로
 한 발리우드 영화의 제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