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Search

'113호/오피니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11.30 편집장이 독자에게
  2. 2016.11.30 우리는 언제 의사가 되는가

편집장이 독자에게

113호/오피니언 2016. 11. 30. 23:52 Posted by mednews

작은 물결이 모인다면?

 

 

 

 

안녕하세요. 이번 ‘편집장이 독자에게’는 요즘 한국을 들썩이게하고 있는 최순실사태에 대해 여러분께 고하는 글을 적고자 합니다. 우리 의대생들은 공부와 시험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정신없이 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순실씨 이야기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의 사태에서는 여러분들 스스로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직접 판단을 해주셨으면 하기에 이 글을 써보았습니다. 바쁘시더라도 잘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의 학점이나 공부량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 있으신가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은 ‘의대생들이 많은 수업을 듣고 엄청난 공부량에 시달린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 스스로도요.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등에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짊어져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의학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비 의사인 의대생들에게는 많은 공부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이루고 이끌어나가는 국민으로서, 여러분들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며칠 동안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하셨을 것입니다. 인터넷상에서는 이문제가 뜨겁게 논의되고 있고, 전국의 대학생들은 시국선언을 진행하며 지금 청계광장에서는 대국민 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배우는 학문의 목적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의치병(小醫治病), 중의치인(中醫治人), 대의치국(大醫治國)’이라는 말이 있듯이 의사는 환자뿐만 아니라 나라를 치료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치료하려는 그 누군가에게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혼란 속에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라를 생각하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미 충실히 이행하고 심지어 행동으로 보이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TV 속에서 나오는 내용들과 인터넷, 신문 등을 통해 지금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것이 합리적인지 스스로 판단하여 우리나라를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주셨으면 합니다.


 

 

양은건 편집장
<dmsris7835@naver.com>

 

'113호 > 오피니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언제 의사가 되는가  (0) 2016.11.30

우리는 언제 의사가 되는가

113호/오피니언 2016. 11. 30. 23:48 Posted by mednews

우리는 언제 의사가 되는가

 

 

의대생은 대부분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다. 대부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의학전문기자나 보건사업자, 의료정책결정자, 가수, 요리사, 번역가 등 전공 관련 여부와 무관하게 의대생의 진로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분야 간 융합과 진로의 다양화는 곧 새로운 아이디어의 탄생으로 귀결되므로 이는 긍정적인 변화이지만, 의과대학의 기본 교육방향은 의료인을 양성하는 것이고 실제로 압도적 다수의 의대생이 의사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이상과 지향을 품고, 서로 다른 감정과 욕구에 이끌려 의과대학에 진학하며, 교육과정을 통과하면서 서로 다른 개별적 경험을 축적하여 서로 다른 가치관을 형성한다. 상이한 가치관과 인식의 틀은 다시 서로 다른 이상과 감정을 유발한다. ‘의사란 누구인가’에 대해서 개인이 품고 있는 생각과 이미지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의사라는 존재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인식을 품고 있다면, ‘의사는 누구이다’ 식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의사에 대해서 품고 있는 이미지가 서로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인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의사가 인간을 다루는 지식인이며, 타인의 삶에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직업이라는데 동의한다. 친절해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으며, 평균 스트레스 수준이 아주 높은 직군이고, 사회적 존중과 존경을 받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적대감과 불만, 불신의 대상이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이런 합의된 사항과 공통의 인식을 기반으로, 의사는 무엇을 하는 어떤 존재이며, 권리와 책무는 무엇이고, 어느 곳을 바라보고 지향해야하며,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 그리고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의사 혹은 의대생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봐야 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사가 누구인지 답하려면, 질병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부터 살펴봐야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다. 그 길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야만 삶을 의미들로 채우려는 의지를 십분 활용하며 사는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자신의 삶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질병은 그 원인이 심리적인 것인지 신체적인 것인지를 불문하고, 우리의 자유의지와 삶에 대한 열의, 애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회복불가의 신체, 정신적 장애를 겪으면서도 활력을 잃지 않고 보통 사람들만큼, 혹은 그보다 더욱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에 해당하며, 흔치 않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담은 에세이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보다 압도적으로 흔하게, 다양한 원인에 의해 질병을 제때 적절히 치료하지 못한 탓에 질병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삶의 일부 혹은 전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병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도 적지 않고, 병인 줄 안다손 치더라도 치료비를 대지 못해 태산보다 높은 병원문턱에도 오지 못하고 지병을 유일한 벗 삼아 살아가시는 독거노인들도 계신다.  
 
모든 일이 실상 그렇듯, 질병도 공평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좋은 영양을 섭취하는 사람보다는 끼니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더 자주 나타나고, 똑같이 무거운 것을 들더라도 헬스클럽에서 드는 사람보다는 공사장에서 드는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며, 무엇보다도 더욱 서럽도록 청년보다는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허벅지가 한껏 얇아지는 나이에 자주 찾아온다. 
열심히 산다고 비켜가거나 면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되려 열심히 살아온 그 결과로서 자주 발생한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질병은 멀기만 하고 객관적이며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환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실존적 존재, 혹은 역설적이게도 현재 자신의 삶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타인 인생의 의미를 대신 찾아줄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 의미를 찾아갈 수 있도록  의지와 용기를 회복하게끔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의사는 그럴 목적으로 질병을 관리하고 치유하며 싸우는 사람, 혹은 환자를 돕는 사람이다. 아픔의 종류만큼이나 도움의 방법도 다양하겠으나, 의사는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신속하게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병을 잘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만 집중하면 되는 것일까.

의사를 ‘환자를 돕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으니, 우리는 이제 의사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서 ‘환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답해야 한다. 그 대답은 비교적 명확하다. 환자는 ‘아픈 ’‘사람’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아프다’의 의미를 알아야하고, 구태여 자명한 명제인 환자가 ‘사람’임을 강조한 이유도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는 삶, 아프지 않은 인간은 없다. 특별히 그 위험성이 크고, 실체가 파악되어서 ‘의학적 질병’으로 정의된 것만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것도 아니다. 명백히 인간을 짓누르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현대과학이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아픔은 질병으로 정의되지 못한다. 과거의 정신병은 ‘천벌을 받은 것’ 혹은 ‘멀리 해야 할 대상’을 알려주는 징표의 취급을 받았을 뿐, 치료의 대상인 ‘질병’으로 분류되지 못했다. 인식과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그들이 치료를 받을 권리와 필요가 있는 ‘인간’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의학이 아직 특정 아픔을 질병으로 ‘규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존하는 아픔을 아픔이 아니라고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학문의 역할은 존재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일이지,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의학이 규명해놓은 범위 안에서만 의사가 환자에게 해줄 일이 있고, 그 밖의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태도는 언제나 무책임하고도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환자는 단순히 병리적 변화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며, 그것을 단지 하나의 특징으로 갖는 복잡다단한 다면체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도움을 줘야하는 의사는, 다방면의 관심을 토대로 다양한 분야를 두루 탐독해야하며, 환자가 삶 속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빠르게 포착하는 능력과 그러려는 의지 또한 갖춰야 한다.

따라서 정확한 정의로 다시 말하자면, 의사란 ‘아픈’‘인간’을 보듬어 살피고, 건강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존재로 회복시킨 후 본래의 혹은 새로운 삶으로 투입시켜주는 것을 소명이자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료실에 들어서는 ‘의학적 환자’에게는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지만 병원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하는, 잘 보이지 않고 여지껏 보지 않으려 애써온 ‘병원 밖 환자’,‘병리적 사회’에 대해서도 진심어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적이고 열정적인 노력과 책임을 개인과 집단의 차원에서 반드시 다해야 할 것이다. 요컨데 의사는 사회적 지식인이자 가장 인문학적이고 사회후생적인 현대과학자여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아픔으로 진료실 문을 넘어 의사에게 온다. 세상은 교과서만큼 깔끔하고 단순하지 않다. 별안간 화를 내는 환자도 있고, 치료과정을 잘 따라오지 않는 ‘순응도’가 떨어지는 환자도 많으며, 자신을 해치는 무언가를 자신의 삶으로 여기며 내려놓지 못하는 환자도 더러 있다. 참으로 고되지만 의사는 그들을 보듬어야하기에, 자신 스스로도 한 명의 인간일 뿐인 의사가 수없이 많은 인간의 행위동기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유연하고 열린 사고를 하는 것은 의사의 제 1 자격조건일 것이다. 세상의 동기는 다양하며, 어떠한 사람도 나와 완전히 동일한 동기로 행동하지 않는다. 의사는 한 가지 문제를 다양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모저모 따져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깊고 진심어린 인간관계도 많이 맺어야 한다. 섣부른 가치판단 이전에 충분한 정보와 사실을 접해야한다. 자신의 깊은 사유와 이해의 결과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평이한 용어로 풀어내야하는 소명도 갖는다. 의사가 평생 공부하는 직업이라는 이야기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리라.

의사의 역할에 대해 참고할만한 좋은 예시가 있다. 한국 바둑의 국수, 조훈현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는 일본의 바둑영웅이었다. 그는 지독한 외골수로, 평생 바둑과 저녁에 마시는 정종을 자신의 인생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이다. ‘죽으라 해도 좋으니 금주만은 명하지 말아 달라’는 그에게 주치의는 딱 한 잔만 마시라는 권고를 했고, 세고에 겐사쿠는 이를 평생 지키며 살았다. 만일 주치의가 오로지 의학적 판단에만 근거해서, 하루에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면, 가장 다행스레 치료에 응한 경우에도 조금 더 생명을 유지했을 뿐 자신의 삶이 이전만큼 가치 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정신과 육체의 단순한 이분은 잘못된 구별이라는 현대의학의 관점에 따르자면, 그는 자신의 삶이 의미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정신적으로는 물론, 신체적으로도 큰 타격을 지속적으로 입으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일본의 바둑 영웅이 아닌, 짜증 많고 참을성 없는 노인으로 회귀했을 것이다.
 
인간 의사만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의학은 차가운 것이지만, 의사는 따뜻해야한다. 교과서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환자의 재정 상태나 사회적 배경, 가족관계, 그 시대, 지역의 문화 사조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환자는 단순히 병리적 변화로 정의될 수 없고, 상기한 모든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그것들의 산술합 이상인 복잡미묘한 다면체이다. 교과서의 담담한 문장이 실은 누군가 겪을 끔찍한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학은 차갑지만 의사는 따뜻해야한다. 인간 의사의 역할은 차가운 의학적 원리와 규칙을, 환자의 다양한 인간적 요구, 감정, 상태와 종합적으로 고려, 조율하여 최선(의학적 최고와 다를 수 있다)의 방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부터는 안 되는지 자신이 어렵게 배운 내용을 쉬운 용어로 풀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가 그것을 수용하도록 종용하고, 그것을 수용했다면 그에 이어지는 처치를 적합히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높은 차원의 심리적 조율까지 해야 하기에, 나는 빅데이터 시대가 도래 하더라도 인간의사는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고 믿는다.
 
변하지 않는 생각은 없다. 생각의 주체인 사람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20살 의대생이 생각하는 의사와 40대 의사의 의사관은 얼마간이든 다를 것이며, 하물며 20살 의대생간에도 다른 생각과 시선을 품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같은 사람의 생각이라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차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할 생각이라면, 과연 ‘의사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꼭 나름의 답을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개인적이며 가변적인 생각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의사로서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도 적고 배움도 부족한 학생의 의사관을 소박한 글 솜씨로라도 적으려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그런 의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바람들은 젊은 날의 치기일 뿐일까 아니면 실현가능한 꿈일까. 우리 주변에 이미 이윤초월적인 삶을 자신의 온 몸으로 살아내시는 이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이 많이 계신다.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점점 더 많아져야 할 것이기에, 나는 그런 삶이 반드시 실현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참된 의사의 길을 걸어가고 싶다. 남을 도우려는 의지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삶은 큰 보람과 가치를 갖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럴 재목이 되는지 부끄럽기도 하고, 개인의 소명으로는 고되고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들의 소명이 그렇다니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한 것이다.

 

'113호 > 오피니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집장이 독자에게  (0) 2016.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