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감정,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역감정의 변천사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가수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의 노랫말 중 일부이다. 이 노래는 호남과 영남 지역 간의 ‘동서화합’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들 말하는 ‘지역감정’을 잊고서 화개장터에 놀러 오라는 내용이다. 어찌하여 이 좁은 한반도에서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동서화합’을 이루어내자는 노래가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혹자는 삼국시대의 영토만 봐도 동쪽의 신라와 서쪽의 백제가 서로 나누어 통치했기에 당연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현재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진정 삼국시대부터 기원했다는 설이 타당한지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1
-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지역감정
전라, 충청, 경기 지방은 백제가, 경상, 강원지방은 신라가 그리고 황해, 평안, 함경 및 만주지방은 고구려가 통치해왔다. 그러나 서기 675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어 내면서 한반도 전역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바로 자연스레 정통 신라인과 패전국인 백제, 고구려 지역민들 사이에 계층이 생긴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는 피정복민 차별정책을 펴서 지방에 살던 옛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아무리 성공해봤자 현재의 면사무소장 급인 진촌주층으로 대우했다고 했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때부터 수도인 경주 내에 살았던 왕경인(王京人)과 경주 바깥에 살던 신라인으로 계급을 나눈 신라에서 피정복민 차별 정책을 실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2
- 고려시대의 지역감정
통일신라가 후삼국시대를 거쳐 왕건에 의해 고려로 재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한 번 지역 계층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고려사의 기록에서 왕건은 “문제를 일으킨 곳은 앞으로 향소부곡으로 지정해서 거주 이전을 제한하고, 기본 세금이외에 추가 세금을 부담토록 하라” 고 명했다. 당시 왕건에게 가장 위험한 곳은 후백제의 근거지였던 백제 유민이 살던 충청 및 호남지방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한 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하 : “이것이 지난 목천(충남 천안) 지방에서 일어났던 반란자의 명단입니다.”
왕건 : “어디보자. 반란자들 주제에 성씨를 가진 자들이 많구나. 이 자들의 성을 다음과 같이 우(于)는 우(牛)로, 상(尙)은 상(象)으로 돈(頓)은 돈(豚)으로, 장(張)은 장(獐)으로 고치도록 하여라.”
풀이하면 우(牛)는 소, 상(象)은 코끼리, 돈(豚)은 돼지, 장(獐)은 노루를 뜻하는 한자이다. 물론 반역자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왕건의 유언과도 같은 “훈요 10조”의 내용에는 “차령산맥의 남쪽 (충청 호남 지방)의 공주강 (금강)외는 산형지세가 배역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이라는 내용을 통해 그가 확실히 충청 및 호남지방을 차별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3
- 조선시대의 지역감정 (1)
고려의 몰락 이후 조선시대의 지역 간 대립은 독특하게도 “학파”와 연관 지어서 설명 할 수 있다. 유교 경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따르는 영남학파는 주로 동인 세력이었고,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따르는 기호학파는 주로 서인 세력이었다. 그런데 “정여립의 난(선조 22년, 1589)”을 통해 동인과 서인간의 정치 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부르며, 3년여에 걸쳐 정여립과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가 사형 혹은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여립이 전주사람이었고, 많은 호남 지역 유생이 동인에 속했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 호남 출신은 관직 진출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국의 과거시험 합격률이 서울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였으나, 기축옥사 이후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기 전 까지 기간은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에 머물렀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3
- 조선시대의 지역감정 (2)
조선시대 지역 간 대립은 “학파” 이외에도 “민족”간의 갈등과 “지리적 이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 남쪽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서북지방(황해, 함경 지방)의 사람들은 여진족의 후예, 즉 오랑캐라는 풍문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대대적인 북진 정책을 펼치면서 이 서북 지역의 여진족들이 대거 조선으로 흡수 유입되었기 때문에 생긴 풍문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산세가 험악하다는 지리적인 이유로 서북지역의 성장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서북지역은 조선에서는 유배지의 개념이 강했고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까지 철저히 배제된 곳으로 존재했다. 택리지에는 “서북민은 설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종5품에 지나지 않는다.”, “문벌을 중하게 여기는 한양사람들은 절대로 서북민과 혼인하지 않으려 한다.” 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시간이 흘러 조선 후기에 이르자 상태가 더욱 심각해져서 18세기 경 정3품인 당상관 후보자 명부에 조차 서북지방 출신은 한명도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을 뒤엎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순조 11년, 1811)”이다. 홍경래는 청천강 이북 8군을 점령하지만 이후 관군에 패해 무위로 끝났으며, 오히려 서북지방은 반역의 땅으로 여겨졌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4
- 현대시대의 지역감정 (1)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직후 우리 사회에는 남북의 이념대립은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영남 대 호남”과 같은 구도의 지역감정이 심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963년 제 5대 대통령 선거(국민 직선제)의 결과를 살펴보면 오른쪽 그림과 같다. (노랑-윤보선 우세/ 파랑 - 박정희 우세) 박정희와 윤보선의 양강구도로 펼쳐진 이 선거에서 영남과 호남에서는 압도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했다. 전체 총 투표 수가 1100만 표였는데, 두 후보간 표 차는 15만 표에 불과했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전남에서 약 28만 표, 경남에서 36만 표, 경북에서 36만 표를 더 얻었기에 “겨우” 당선된 것이다. 이 승리는 최근 정치 풍토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유형의 승리였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말하는 영호남 갈등은 적어도 투표에서 만큼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당선된 이후 경상도를 중점적으로 개발하여 (농토가 풍족했던 전라도보다 척박한 경상도를 우선적으로 개발했다는 주장도 물론 있다.) 호남의 민심을 많이 잃었고, 호남 지역을 차별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역사가 말하는 지역감정 4
- 현대시대의 지역감정 (2)
제 7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공화당 소속 박정희, 신민당 소속 김대중의 양강구도로 펼쳐졌다. 대선 유세기간 중에 서로간의 지역감정을 노골화하는 발언들이 상당히 많았다. 민주공화당에서는 “전라도 대통령을 뽑으면 경상 푸대접 내지는 보복이 온다”고 선전했고, 신민당은 "전라도에서도 이번에는 꼭 대통령을 내어 푸대접을 면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선거 막바지에는 영남 지방에 “전라도여 뭉쳐라”는 전단지,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전단지 등이 나돌아 영남 지역주민의 의식을 자극했다. 뿐만 아니라 1971년 4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효상 국회의장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는 언급을 하였다. 이효상은 박정희 지지 찬조연설에서 “쌀밥에서 뉘가 섞이듯이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경상도 사람 중에서 박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이다.”라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결국 현재와 같은 지역감정의 극한 대립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거를 목적으로 정치가들이 이를 상습적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짙은 것으로 판단된다. 특정 지역의 자원 배분 집중이나 소외 등이 실재하거나 실재한다고 느낄 때 지역주의가 나타난다는 점을 정치가들이 포퓰리즘 성격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이 지역감정에 이끌려서 투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때문에 지역감정을 ‘망국적인 고질병’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많다.
강상준 기자/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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