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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최우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데요.”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4학년 이장욱

 

응급의학 실습 4일차. 간만의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유비무환?비가 오는 날엔 환자가 없다?라는 말처럼 실습 내내 바쁘게 돌아갔던 응급실도 고장난 정수기 때문에 왔다갔다하는 정수기 관련 업체 사람들과 간간히 오는 가벼운 상처를 입은 환자들 외엔 오전 내내 한산했다.  그러던 노곤한 오후 무렵, 갑자기 울리는 전화.

“4분 내로 CPR 환자 온답니다. 다들 프로토콜대로 준비해주세요”

군복무 중에 모형이 아닌 사람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것을 한 번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환자가 사망 상태로 실려왔었고, 그것도 응급실 문틈 사이로 먼 발치에서 언뜻 본 것이어서 실제 환자에게 심폐 소생술을 시행하는 것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같이 실습을 돌던 동기들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눈으로 이런저런 눈빛을 주고 받으며 소생술실 앞에서 환자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119 대원이 심장 압박을 하면서 들어왔고, 대기하고 있던 교수님, 전공의, 인턴, 간호사, 응급구조사들이 프로토콜대로 환자를 처치하기 시작했다. 소생술실 앞을 커튼으로 가려놓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이런저런 전극과 수액들이 몸에 꽃힌 환자의 모습과 구호를 맞춰 심장 압박을 하는 인턴과 응급구조사, 그리고  이런저런 처치를 조곤조곤 지시하는 교수님과 전공의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닥터 그린이 소리지르며 제세동 버튼을 하나 둘 셋 줄기차게 눌러대던 ER의 드라마틱한 장면과는 달리, 긴박하긴 했지만 의외로 차분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그리고 심장 압박에 맞추어 하나, 둘..외치는 소리가 없었더라면 여전히 평온한, 그저 그런 비오는 날의 응급실로 여겼을 것이리라.

직접 물어보진 못했지만 119 구급대원과 선생님들 사이로 왔다갔다 들리는 정보들을 조합해보니, 환자는 중년의 남자로  심장에 기저 질환이 있어 예년에 판막 교체술을 한 상태였고 회사에서 족구 시합을 하던 중, 갑자기 심정지가 왔던 모양. 그리고 병원까지 도착하는데 약 20분 정도가 걸렸고, 119 구급차에서 이미 5회 정도의 제세동을 시행했다고 했다. 열린 틈으로 제세동을 하기 전의 모니터를 살짝 보니 평탄파가 아니라 P파 소실에 wide QRS파 형태가 빠르게 반복되는 심실세동?다음날 오전 의국 환자 보고 시간에 교수님이 심폐소생술 시에 찍은 심전도 띠지를 보시더니 Torsade de Pointes라더라. 역시나 부족한 지식이 앞섰던 셈이다?의 파형을 보여서 심장압박과 함께 제세동을 계속 하면 아주 약간의 가능성은 있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마음 속에서는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의 20여분을 보고 있었을까. 심장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심장압박을 하던 인턴과 응급구조사들의 표정도 점점 지쳐갈 무렵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눈빛이 풀려 혼이 나간 듯한 중년 여자분이 들어왔다. 턱을 덜덜 떨면서 환자가 어디 있냐고 물으시기에, 안쪽에서 처치를 지시하던 내과 전공의에게 달려가 보호자가 왔다고 전했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던 보호자는 바닥에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주저앉고… 이를 부축한 내과 전공의는 응급실 한 켠 벤치로 보호자를 이끌며 ‘보호자 분께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지금 빨리 연락이 닿는 친척 분들에게 전화하셔서 이쪽으로 빨리 오라고 하세요’라고 말하고 다시 급히 소생술실로 향했다.

커튼 틈으로 보여지는 소생술실을 지켜보던 눈은 자연히 혼자 남게 된 보호자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기는 손에 들고 있었지만 벌벌 떨리는 손으로 도저히 전화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보호자에게 살짝 다가가 지금 심장이 완전히 멎은 것도 아니고, 선생님들이 환자 분 심장 제대로 뛰게 하려고 최선으로 노력하고 계시니까 절망하지 마시고 마음을 모아달라는 말?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도움이 안되는,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껍데기 말이었다. 이미 내 머리 속에서는 ‘환자의 심장이 결국은 멈출 것’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으니까. 차라리 그때 아무 말 말고 손을 꼭 잡아 주는 편이 보호자에겐 더 낫지 않았을까?을 하며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건네 받아 어느 연락처로 전화를 해야될 지 물어본 후, 전화를 걸어 다시 건네 드렸지만, 보호자는 그저 꺽꺽 울먹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전화를 걸어 ‘지금 동국대 일산 병원 응급실인데, 지금 전화하신 분 남편 분이 심정지로 심폐 소생술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빨리 이쪽으로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전하니 그때서야 전화를 받는 쪽에서도 상황을 알아챈 듯 알겠다고 하고 끊었다. 나중에 다시 확인을 하려고 전화를 했는데 그때는 이미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지금 가는 중이라고 하더라.

사실 나는 내 주변의 구체적인 슬픔에 즉각적으로 공감하고 이를 또 밖으로 내어놓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까라마조프씨 네 형제들>에 나오는 구절이었던가.  ’개개의 인간에 대한 증오가 더해갈수록,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은 강해진다‘라는 역설이 갑자기 생각나는데…  나는 거대한 담론, 구체적인 주체가 희석된 문제에 대해서는 쉽사리 동의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내 주변 가까이에서 수없이 목격되는 슬픈 상황에는 도저히 몸이 즉각적인 자동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무슨 노동, 자본, 통일이 어쩌고 저쩌고 이런, 밑도 끝도 없을 이야기들에는 이성적, 감성적 동의와 긍휼 그리고 분노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아가페에 버금갈만한(?) 능력이  발휘되지만, 바로 나의 눈과 손과 발이 닿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분투하는 이름모를 조각난 사람들을 보면 심정적 동의에 앞서 ‘저 사람은 여기서 도대체 왜 저러고 있나’라는 냉정한 상황 판단 논리 회로가 먼저 돌아가며 손을 내밀고 잡아주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나 스스로 지금까지 슬픔이란 것을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 머리로만 받아들이고 이해한 탓에 타인의 구체적이고도 사적인 감정을 공유하는 능력 - 이건 내가 지금까지 ‘호혜적 연애’ 와 같은 사치를 제대로 누려본 경험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다. - 이 많이 결여된 탓이리라. 또 그것에 더불어  ‘인류의 비환은 상통하지 않음’을 예전부터 느껴왔기에…

보호자 옆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길 수 분…파르르 떠는 파란 입술이 더 없이 말라 보여서 옆에 있던 동기에게 부탁해 떠온 물을 마시라고 드렸지만, 몇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이내 손을 얼굴로 감싸쥐고 뭉크러지면서 얼굴을 무릎에 묻는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저 옆에 멍하니 서있는데, 보호자의 지인인 듯한 남자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응급실 문을 열고 두리번 거린다. 이내 보호자에게로 안내를 하고 나는 잠시 빠져 살짝 상황을 봤지만, 정말 그냥 ‘지인’인 듯 보호자와 몇마디 말을 나누고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전하는 듯 하더니 그냥 옆에 멀뚱히 앉아 있는다. 거기다가  정수기를 고치러온 기사가 ‘(터진 정수기 파이프)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데요’라는 통화를 큰 소리로 하며 보호자 앞을 빠르게 지나친다. 이 말을 아마도 남편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오해했는지, 어깨의 들썩임과 흐느낌은 더 심해지는 듯 했다.  물론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어쩔 수 없이 비수를 꽂은 격이 된 정수기사, 응급실의 이런 모습을 아이에게만은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던 한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그저 잉여인간으로 소생술실 밖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두커니가 되어 있던 나와 동기들… 물리적으로는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분명 존재하긴 했지만, 그때만큼은 모두가 고장난 라디오가 되어, 누군가가 간절히 발신하는 신호에 전혀 응답하지 못한 채 지직거리는 소음만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심폐소생술을 시작한 지 40여분 째… 구급차로 환자를 이송했던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한 시간 째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거다. 제세동 회수도 이미 10회를 넘어선 상황. 전자의무기록에서 파란색과 빨간색 화살표로 얼룩진 동맥혈 가스 분석 소견을 보며  절망적 예측을  굳혀가는 상황에서, 갑자기 소생술실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동기들과 함께 황급히 커튼 틈으로 소생술실에 있는 심전도 모니터를 보니, wide QRS이긴 했지만, P파와 T파가 언뜻 언뜻 보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파형을 보이고 있었다. ‘심장이 돌아왔구나!’  지금까지 비극의 전형적인 마무리 플롯을 짜는 것 마냥  파국적 상황을 예비했던 머리 속 한 켠이 갑자기 찌르르해온다. 순간 보호자에게 달려가려다, 아직 명확한 상황이 밝혀지지도 않았기에 발을 멈추고 시선만 다시 보호자 쪽으로 향했다. 보호자는 아직 그런 상황을 눈치를 못챈 듯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환자의 자발 호흡이 돌아오고, 내과 전공의가 소생술실에서 나와 보호자에게 다가가서 ‘지금 환자 분의 호흡도 돌아오고 심장 뛰는 것도 어느 정도 돌아왔지만 여전히 심장이 많이 흔들려서 환자 분의  생존 및 예후를 확실하게는 말씀드릴 단계는 아닙니다. 잠시 후에 제가 더 설명드릴테니까, 보호자 분께선 일단은 안심하셔도 될 것 같아요’라는 말을 전했다. 많이 진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몸을 의지하며 전공의의 설명을 듣던 보호자는 다시 흔들리는 눈빛을 하며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이윽고 환자의 친척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다급하게 응급실로 들어왔다. 처음 연락할 때 휴대폰 연락처에 OO고모라고 되어있던 것으로 보아 환자의 누나와 자형인 듯 했다. 벤치 한 구석에서 웅크린 보호자를 보자마자 보호자의 손을 부여잡고  품 안으로 무너지는 보호자를 부둥켜 안으며 같은 울먹임으로 위로해주는 모습에 마음 한 구석의 빚을 내려놓는 듯한 기분, 그리고 그에 뒤이어 드는 양가적 감정에 참으로 무참했다.

환자의 생명징후가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안정이 된 듯, 소생술실 안에서 환자를 처치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조금은 밝아진 듯 했다. 아직까진 많이 불안정해 보였지만 가끔씩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에 나도 조금은 안심을 하는 찰나, 안쪽에 있던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실습 학생들도 들어와서 심전도 돌아온 것도 한 번 보고, 환자 처치 외의 이런저런 것을 좀 도와주라기에 나와 동기들 모두 커튼 안으로 들어가 돌아온 심전도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듣고, 이런저런 주사와 수액 처치를 당하는 환자의 팔과 다리를  붙잡았는데…아까는 고통에 반응한 의식적인 반응으로 여겨졌던 팔다리의 움직임은 그저 팔은 굽히고 다리는 편 채 강직되는 전형적인 제피질 자세였다. ‘어쩔 수 없이 뇌에 손상을 입었겠구나.’라는 덜컹하는 생각과 함께, 또다른 사형 선고를 보호자에겐 또 어떻게 전달해야할까, 환자 자신으로서는 어떤 것이 최선의 결과일까, 그리고 또 남은 가족들에게는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라는 쉽게 답할 수가 없는 의문들이 스멀스멀 머리 속을 채웠다.

이후 응급실에서의 처치가 끝난 환자를 내과계 중환자실로 전동하기 위한 보호자의 동의서를 받음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위해 내과 전공의가 가족들을 다 불러모았다. 지금 심장의 상태가 여전히 위험한 상태로 빠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약 한 번 더 심정지 상태가 오면 그때는 다시 되돌아올 가능성이 적다는 것, 그리고 심장이 제대로 돌아오더라도  비가역적인 뇌손상의 가능성(정확한 손상 여부 및 정도는 일주일 뒤 MRI를 찍은 후에 알 수 있다는 말과 함께)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차분하게 전했다.  보호자와 그 가족들은 심장은 뛰고 있다는 말에 조그마한 안도를 표하는 모습이었지만…아마 그때는 이러한 말이 앞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미처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일주일이 얼마나 잔인하고 아릿한 시간이 될지도…

모니터링 장치와 함께 온몸에 수액과 튜브를 줄줄이 단 환자가 내과계 중환자실로 옮겨가는 것으로 응급실의 상황은 어느 정도 종료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 나와 같이 생동하던 한 존재가 누군가의 손에 맡겨져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 그리고 이런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받아들이고, 다시 받아들여야할 존재들의 모습을 최전선에서 목격한 경험…이렇게 보고 겪은 모든 일들이 나에게 어떤 생채기를 낸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습 기간 중에 겪은 잊지 못할 경험’이라는 식의 감당 못할 윤색을 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식의 오글거리는 싸구려 감상 한 줄로만 갈겨놓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렇게 글을 끼적여 본다. 친하게 따르던 선배의 자살을 겪고, ‘형의 죽음이 단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는 것만이 아닌, 혹은 나의 예술적 체험의 확장으로 이용되기를 않기를 바란다‘ 라고 담담하게 말했다던 기형도의 자기기만적이지 않은, 섬세하고도 묵직한 선언은 나같이 불비한 놈에겐 아직 요원한 것이긴 하지만…이렇게 흉내라도 내다보면 언젠가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내 삶의 오롯한 상흔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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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우수
50만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4학년 현명한

 

“폴리클 학생 선생님,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봐.”
교수님의 말에 순간 트랙터※를 쥔 손을 놓칠 뻔 했다. 내가 졸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30분 째 교수님들의 뒤통수만 보이는 수술대에, 두 손만 뻗어 시야를 확보해 주고 있는 인간 트랙터에게 말을 걸어 주다니! 머뭇거리는 사이, 그네들의 관심은 다시 내게서 떠나 갔다. 엊그제 수술 했던 환자 상태, 아들의 중간고사 시험,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 수술을 하면서도 그들의 대화는 병원 안팎을 망라했다. ‘졸지 말아야지’. 새하얀 조명이 비춘 수술대에서 시선을 돌렸다. 초록빛 덮개 위에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검붉은 물감이 보였다. 문득 스쳐 지났던 미술 작품이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멀리 수술 방 구석에서 레지던트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며칠째 안감은 머리에 엉망인 피부, 문득 아침 브리핑 시간에 어제 밤에도 응급 수술이 생겨 새벽 5시 반에 끝났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 마취 기계를 보았다. 환자의 호흡에 맞춰 오르내리는 피스톤. 계속 보고 있자니 최면에 빠져들 것 같다. 기계 버튼을 조절하는 마취과 선생님과 간호사는 아이돌 가수 얘기로 분주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신호음. 팔이 저려온다. 환자 몸에 내 몸을 기대었다. 받침대가 있으니 한결 편해졌다.
삐. 삐. 삐.

문득 초록빛 덮개 아래 발가락이 보였다. 매니큐어가 반쯤 지워져 있는 새끼발가락. 이 공간의 주인공이 발을 내밀고 누워있다. 몸 안 가장 깊숙한 곳을 손으로 가리지도 않은 체. 그의 몸은 호흡과 혈압을 유지해 주어야 하는 대상, 잡고 자르고 당겨야 하는 대상이다. 몇 시간 전에 보았던 그의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등록번호, 진단명, 수술명, CT 사진이 컴퓨터 화면에 반짝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늘 해오던 수술을 하느라 지루할 터이고, 한쪽에서는 그 수술을 지켜보기만 하느라 졸릴 것이며, 다른 한 쪽에서는 잠을 못 자서 피곤할 터이다. 그렇게 그 곳은 나른한 일요일 오후처럼 적막한 공기가 흘렀다.

“다음 환자 내리라고 하세요”
수술이 거의 끝났을 때 교수님이 하는 말이다. 이 말에 모든 사람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지겨운 일상 하나가 끝난 표정. 곧 있을 퇴근과 식사시간의 즐거움. 교수님과 레지던트 선생님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음 환자는 급성 충수돌기염 환자라서 30분 이내에 끝날 것이라고 한다. 너무도 간단한 수술. 예전 수업시간에 외과 교수님이 이 수술은 수백 번 해서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학생인 나도 몇 번 보고나니 해보고 싶다는 자신감마저 생기는 수술이었다. 오늘 수술 일정이 일찍 끝난다는 기대감에 모두가 부풀어 있었다. 이윽고 이번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환자는 원래의 모습으로 고이 몸을 닫은 체 퇴장하였다.

곧, 다음 환자가 내려왔다.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중년의 여자 환자였다. 하얀 얼굴, 고은 주름과 손 모양이 어머니 나이 또래를 연상시켰다. 기도하는 듯 손을 모으고는 한번도 눈을 뜨지 않고 조용히 숨쉬는 모습이 마치 자는 사람 같았다.

“이건 산소예요. 아직 마취 안 하니까 숨 크게 쉬세요.”
마취과 선생님이 마스크를 환자 얼굴에 대자 입을 열고 크게 숨을 쉬었다. 폴리클 학생의 주된 임무는 환자가 마취되기 까지 수술대에서 떨어지지 않게 지켜보는 것이다. 나는 내 역할을 충실히 지키며 환자 옆에 바짝 붙어 서서 퇴근하고 있을 저녁 약속을 생각했다. 오늘은 무엇을 먹지. 집에 가서 뭘 하지. 문득 멀리 레지던트 선생님은 환자 차트를 입력하느라 바빴다. 주변의 간호사들은 수술 준비를 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마취과 선생님은 마취기계를 열심히 만지고 있었다. 이윽고 마취에 쓰일 우유 같이 하얀 포폴 주사가 준비되었다. 곧 이 주사와 함께 환자는 잠이 들 것이다. 그리곤 충수돌기를 수백 번 떼어 보았다는 하얀 가운의 기사가 나타나 눈 깜짝할 새에 못된 충수돌기를 떼어 버리고는 이 무대는 막이 내릴 것이다.
마취 주사를 놓기 직전, 갑자기 환자가 산소 마스크에서 고개를 돌려 내 팔을 잡고 말했다.

“저기요.. 선생님, 아까 남편한테 깜빡 잊고 말을 못했는데, 옆집 순영이 엄마한테 50만원 빌려준 게 있는데 그거 꼭 좀 받으라고 하세요...”

너무도 진지한 표정에 난 나도 모르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두 눈을 감고 천장을 바라본 환자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옆집 엄마한테 빌려준 50만원. 그 얘기를 내게 왜 한 것일까. 이윽고 빨간 베타딘 소독약이 몸에 흩뿌려지고는 초록색 덮개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삐. 삐. 삐.

50만원. 그 돈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옆집 순영이 엄마한테 빌려준 50만원. 그것이 마취 직전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녁에 무엇을 먹을 지 생각하는 것 조차 잊어 버렸다. 이 수술이 얼마나 간단한 수술인지, 30분도 안돼서 깨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자신이 다시는 깨어나지 못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내가 졸면서 당기고 있던 환자의 몸을 위해 그의 가족들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기도하였을 것이다. 어제 본 티비 드라마 내용을 얘기하며 잘라낸 그 부분은 사실 누군 가에게는 소중한 몸의 일부였던 것이다. 모두가 일상이 되어 버린 이 수술 장이 그들에겐 간절한 기도의 공간이고, 운명이 공간이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보며 부탁한 50만원은, 그녀가 본 마지막 사람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무대가 주인공인 그들에게는 운명을 걸고 맡기는 마지막 장소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익숙해 지는 삶. 처음 해부학 실습 때 만졌던 카데바의 차가움. 처음 수술 방에서 살아있는 환자의 장기를 만졌을 때의 설렘. 처음 임종을 경험하였을 때의 숙연함. 익숙함의 그늘이 그 모든 것에 대한 감정적 역치를 높게 만든다. 그녀가 부탁한 50만원. 그것은 그들이 영혼을 가진 작고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 수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환자의 몸을 벌리는 기구

(수필부문) 심사평

90호(2012.12.13)/문예공모전 2013. 1. 1. 13:43 Posted by mednews

(수필부문) 심사평
더 깊이 사고하고, 더 깊이 고뇌하라

권순긍 (세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전국 의과대학 학생들의 신문인 <의대생 신문>에서 문예공모전에 응모한 학생들의 글을 보내왔다. 다량의 응모작과 함께였는데 그 중 최우수작과 우수작 두 편을 뽑아달라는 주문도 함께였다. 내심 “머리가 좋은 의대생들은 어떤 글을 쓸까?”라는 호기심으로 글을 읽었다.
읽다가 보니 어디선가 익숙하게 본 듯한 느낌의 글들이 많았다. 그렇다. 바로 ‘교과서식 논리’거나 ‘모범생적인 감상’이었다. 말하자면 이렇다. “살아가는 순간순간을 사랑하고 알차게 보내라.”거나 “사회에서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꼭 필요한 일들이 있다.”거나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살한다.”거나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의사가 돼서 치료해드려야겠다.”는 생각들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마땅한 일이지만 그것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논리나 감상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어서 감동을 주지 못한다. 문학작품이 윤리교과서와 다른 점이 그것이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윤리적인 가르침이지만 문학은 착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흥부처럼) 가난 속에 허덕이는 것을 다룬다. 그럼으로써 왜 세상은 불조리한가를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사고와 느낌의 폭이 얕고 좁은 이유는 당연한 말이지만 아직 사회경험이 적은 데다가, 의대생이다 보니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까이서 발견한 소중한 보물들>이라는 글처럼 눈을 돌려 저녁노을 물든 하늘을 보듯이 주변의 보물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교과서식 논리나 모범생적인 감상으로 무장한 글 속에서도 좋은 글들이 많았다. 반수를 하고 휴학을 하며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자기성장을 체험한 <다크 초콜릿>은 평범하면서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것이 의대생들이 겪는 현실이기 대문이리라. 쾨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나 멕시코 영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연상시킨다. 다만 더 깊이 사고하고 고뇌한 흔적이 없어 아쉽다.
‘의학과 문학을 모두 품고자 하는 청년’이 쓴 <그 사람이 문학을 하는 이유>는 문학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자기고백이 돋보이지만 너무 자아도취에 빠져있다. 자기고백으로서는 훌륭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메시지라고 생각하면 어설픈 것이지 않을까? 마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중계방송 하듯이 어색하다.
병실에서의 급박한 상황을 서사적으로 그린 <50만원>과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데요>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다. <50만원>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수술대에 오른 환자가 자신이 죽을 지도 몰라 마취 직전에 수련의에게 “옆집 순영이 엄마에게 빌려준 돈 50만원을 꼭 받아달라.”고 남편에게 전할 말을 남긴다. 이런 말을 하는 엉뚱한 환자의 모습을 통해 병원의 환자가 단순한 의료대상이 아닌 영혼을 가진 인간임을 자각한다는 내용이다. 수필이라기보다 짤막한 ‘꽁트’로 사건의 집약과 50만원을 받아달라고 내뱉는 환자의 부탁이 ‘촌철살인’의 묘미를 주는 수작이다. 사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시키고 치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서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 ‘우수작’으로 선정한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데요>는 응급실에서 수련의가 겪었던 일을 다루고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심폐소생술을 통해 가까스로 깨어난 환자를 보고 그것이 ‘잊지 못할 경험’이거나 ‘문학적 감상’이 아닌 진정 삶의 무게를 느끼는 현실이었음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점이 탁월하다. 다소 문체가 지루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조차도 고뇌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하여 ‘최우수작’으로 선정한다.
가장 고귀한 일 중의 하나인 의료는 어떤 것 못지않게 좋은 문학의 소재가 된다. 인간의 삶과 죽음, 그 존엄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통해 보다 깊이 사고하고, 더 깊이 고뇌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생각과 고뇌 혹은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언어야말로 우리들 삶의 진면목이지 않겠는가? 모두의 건투를 빈다.

(시부문) 최우수
응급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2학년 홍정표

 

기숙사 앞 응급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통장 안 잔액을 확인하러 온 학생 하나가 수수료도 못되는 전 재산의 일의 자리부터 백의 자리까지 몇 번이고 되뇌어보다 텅 빈 담뱃갑을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한다 오늘 에이티엠을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을 뽑지 못하는 사람들뿐이다 그의 어미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이곳의 누구도 알지 못했으므로 오늘 그는 이곳 응급실 대기의자의 붉은 야경이 될 운명이다 그런 그의 옆으로 한사코 이곳 응급실 대기의자가 편하다는 노인이 불안히 그 공간으로 제 몸을 구겨넣는다 학생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기로 한다 이곳의 어디도 자막은 없었으므로 오늘 이곳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기로 한다 티브이도 나오지 않는 새벽, 째깍째깍 익숙한 소리가 방을 메운다 하루에 꼭 일이초쯤은 함께하자던 바늘 가족들이 가까스로 새벽 4시, 각자의 자리에 홀로된 몸들을 누인다 때마침 또다시, 로비의 전등 하나가 위태로이 점멸하기 시작한다 빨간 응급실 간판 아래로 한 구의 붉은 이와 두 명의 흰 이들이 몸을 내린다 너는 피가 왜 붉은지 알아? 라고 묻는 한 흰 이에게 헤모글로빈? 이라고 다른 한 흰 이가 무심히 대답한다 그럼 헤모글로빈은 왜 붉을까? 라고 묻는 한 흰 이에게 다른 한 흰 이는 말없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안으로 몸을 들인다 그 길로 오늘 하루 그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던 간이침상의 늙은 바큇살이 붉은 이의 숨결을 거칠게 흩뜨린다 그리고 조용히 그 길을 좇던 청소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늙은 대걸레의 치맛자락 속으로 바닥에 스러진 혈흔과 통증들을 한 방울 한 방울 남김없이 주워 담는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많았다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학생은, 그리고 당신을 너무도 오래토록 홀로 두었기 때문에 노인은 나의 피는 붉다, 고 믿는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그 글귀가 오늘따라 붉다 문이 여닫히고 낭자한 방울방울들의 채도를 하나하나 머금은 그 글귀는 누구보다 진실하고 침착하게 당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 이름이 종종 질병, 그 자체보다 무서울 때가 많았다 일방통행만이 유일한 교통법인 이곳에는 네 발로 들어간 붉은 이들은 많았지만 두 발로 걸어 나온 붉은 이는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 그 글귀의 색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이들의 무지개 색을 감추기 위함임을 어렴풋이 눈치 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병동에서 진정 피가 붉은 이유는 붉지 못하고, 동시에 아름답지도 못한 당신의 모든 마지막들을 감추기 위함임을 이곳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암전 그렇게 이 문이 영원히 닫히기를 누군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추적추적 눈 밑이 새까만 여자가 자신의 하얀 가운보다 곱절은 창백한 미소들을 걷으며 오늘의 죽음을 선고하러오고 있었다 계속 고집부리시다가 육 인실이 만원되면 당신은 배는 비싼 일 인실에 입원해야해요, 라고 말하는 여자의 손이 스멀스멀 자신의 배를 감싸고 있다 생리와 당직의 불온한 주기들과 불순한 교집합이 돼버린 여자의 아래로 치열한 감동이 되지 못한 체온들이 뚝뚝뚝, 뜨거운 하혈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런 여자의 눈앞으로 차마 돈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 노인이 끝내, 죽지 못하여 자는 척을 하고 있다 로비에 누운 그의 실눈 새로 보이는 하얀 천장이 떨어지는 별들의 잎새들을 감추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학생은 기어코 그 표정을 기억해야한다는 것을 안다 그 표정이 그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창백한 예감만이 침묵처럼 이곳, 응급실의 로비를 무겁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구도 환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오늘 죽을 수 있다 그런 웃지 못 할 농담을 들은 기분이 든 학생이 도망치듯 서둘러 제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소매에서 나던 쾨쾨하고 썩은 질병의 냄새들 새를 비집고 외로운 살들의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쓰레기통 속으로 때 묻은 지포라이터를 쑤셔넣으며 그는 내일부터 담배라도 끊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은 듯 의자에 누워있던 노인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내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별밤에 기도한다 현재시각, 새벽 4시, 아직도 그들의 생명은 접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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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문) 우수
사과

충남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2학년 김호준

 

살을 푹 파낸 사과가 병실 침대에 누워있다    
눈물처럼 흘러나오던 과즙이 이제는 멎은 걸까
상처로 속살이 배어나와 갈변하는 하루하루
할머니가 거기 누워계신다
 
창틀로는 나비 한 마리가 힘껏 기어오르는 중이다 
사과의 속살을 노린 게지 
제 짝짓기와 산란만 생각할거야       
배를 든든히 채우고선 
온몸을 치장하러 떠날 테지 쉬이  

굳어버린 팔 애써 벌려 할머니가 미소를 보내자
날개가 그만 오므라지고 촉수는 촉촉해진 나비
체온보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더라   
쪼글쪼글 상처에도 고일 수 있게 

똑 똑 
흰 옷을 걸친 히포크라테스 흉상이 들어와  
서로가 포개어진 사과를 진찰한다  
상처도 아물어가고 있고 몸 상태도 좋아요

나비는 날개를 펴 사과를 향해 두 번 펄럭인다
남은 상처에는 하얀 속살이 들어찬다
할머니는 차마 버릴 수 없는 사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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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문) 우수
삶의 무게

동아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2학년 류시웅

 

이른 새벽 거무죽죽한 겨울코트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가냘픈 옷걸이를 꺾어버리고 아버지는 출근길에 나선다
가끔씩 아버지도 한 손에 든 서류가방을 떨어트린다

옷걸이도 본래는 땅이 고향이었다
쇳물로 녹고 가래떡처럼 길게 뽑혀
외팔로 공중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녹슬고 뒤틀린 손목만이 그의 노고를 증명한다

어릴적 여리던 아버지의 손목도
힘줄이 드러난 채 비틀어져 간다
돌아오는 아버지의 한숨이 깊을수록
옷걸이도 야위어만 간다

왜 몰랐을까
가끔씩 이유 없이 떨어지는 옷들이
옷걸이가 떨쳐낸 삶의 무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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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문) 심사평

90호(2012.12.13)/문예공모전 2013. 1. 1. 13:41 Posted by mednews

(시부문) 심사평

박덕선 (시인, 민족문학작가회)

 

어김없이 가을이 가고 겨울바람 소식 따라 의대생 문예 공모전 출품작이 내 손에 당도합니다. 한 해의 마무리 행사 같이 치루는 젊은 지성들의 글 잔치에 초대받고 심사를 맞는 일은 조심스러우나 신명나는 일입니다. 여전히 의학도들의 현장은 뜨겁고 그 속에서도 철학적 고민과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뜨거운 시의 옷을 입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도 용납 않는 병실과 수술실에서도 아름다운 서정의 감성은 시의 꽃으로 피고 있었습니다.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문학을 사랑하는 의학도들에게 보내는 경외심으로 심사에 임했습니다.  
올 해는 지난해에 비하여 공모편수가 다소 줄어들어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한 작품 한 작품 읽어 내려가며 눈에 번쩍 띄는 수작들을 비교적 고민 없이 선택할 만큼 작품의 질이 뛰어났다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특히 자연친화적 정서를 노래하는 작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시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아쉬웠던 점은 서정성은 풍부한데 그 속에 삶의 진정성이 결여된 작품이 많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전체 작품들을 살폈는데 비교적 편차가 심해서 1차 예심에서 10여 작품 정도 밖에 안 나왔으며 3차 예심까지 남은 작품은 7편이었습니다. 그 때부터의 고민이 일주일은 걸린 것 같은데요. 손에서 놓아버리기에 너무 아까운 작품들을 애정을 갖고 살피며 제가 만들어서라도 상주고 싶은 몇 작품을 소개하며 심사평에 임합니다.
먼저 7편의 작품 중 ‘누에’를 먼저 뽑아들었는데 ‘누에’는 고학생의 삶과 누에의 삶을 대비시킨 작품으로 삶의 진정성과 치열함이 아주 잘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주제와 상(像)이 참신하여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호흡이 너무 길어 긴장미가 떨어지고 추상적 시어들이 주제를 전달력을 떨어뜨린다는 아쉬움 때문에 밀렸습니다. 이어 ‘단상’은 따뜻하고 소박한 기차안의 풍경을 애틋하게 그렸는데 제목에서처럼 단상에 그쳐서 약한 주제로 완성도가 낮아 밀렸습니다. 또 ‘흔들의자’는 낡은 의자하나에 스며있는 시간의 지문을 다정한 시선으로 엮어내는 솜씨가 빼어났습니다. 시어를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고 소품으로서의 형상화에도 성공했지만 이 작품 역시 첫 연의 서두열기가 추상적이고 진부한 표현에서 아쉬움을 남겼 습니다.     
위 세 편을 아쉽게 미루고 남은 네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며 시시때때로 순위가 바뀌는 고민 속에 빠졌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우수상은 선명하게 뽑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세 작품으로 우수상을 골라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모두 다 뽑아 주고 싶은 수작들이었거든요. 그 중 ‘기쁨이 느려서 참 다행이다.’를 먼저 뽑아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아버지의 병환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따뜻함과 공동체적 사랑이 햇살처럼 환하게 잘 표현된 수작이었습니다. 굳이 미룬 이유를 대자면 1~2연의 반복이 긴장감이 떨어져 시적 감흥을 방해한다는 아쉬움입니다. (첫 연의 4~7행을 빼고 2연으로 들어갔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 밀어낸 작품이 ‘삶의 무게’입니다. 이 작품은 우수작으로 뽑은 ‘사과’와 함께 정말 고민을 많이 한 작품입니다. 공동으로 줄 수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수작입니다. 아버지의 옷걸이를 통하여 아버지의 삶을 이해해나가는 치밀한 과정과 절절한 연민의 과정이 감동적으로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시어들 간의 조화나 긴장미. 참신함까지 고루 갖춘 빼어난 작품으로 계속 시를 쓰라는 격려와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마지막 고민을 거쳐서 결국 ‘사과’를 우수작으로 뽑았습니다. 상해가는 사과 한 알과 병마에 시달리는 할머니의 삶을 등치시켜 절묘한 시어들로 잘 버무린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연과 연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며 주제를 형상화해내는 솜씨가 수준급입니다. 특히 의사로서 환자를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과 애정이 시를 더욱 빛나게 하는 탁월한 작품입니다.
최우수작은 망설임 없이 ‘응급실’을 뽑았습니다. 시가 갖고 있는 미덕을 골고루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산문시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호흡과 탄탄한 긴장미로 응급실의 급박한 상황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뛰어난 영상미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비유와 상징, 아이러니들의 조합이 너무도 치밀하고 자연스러워서 숨 가쁘게 따라 내려 가다보면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맺히는 감동의 드라마를 시어로 짜내는 솜씨가 기성시인을 능가하는 필력입니다. ‘기숙사 앞 응급실~로 시작하여 ~아직도 그들의 생명은 접수중이다.’ 라는 깔끔한 마무리까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엮어 내려간 절창의 시어들에 압도당하는 독자들을 떠올리며 행복한 심사자의 마음으로 아낌없는 박수와 찬사를 보냅니다.
환자의 생명을 돌보는 의사는 인체뿐만 아니라 환자의 마음까지 치유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졌을 때 명의가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의대생 문예를 사랑합니다. 앞으로 글을 쓰는 의사들이 더 많이 나와서 영혼까지 풍요로운 건강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나의 즐거운 심사평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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