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교육의 역사: 더 좋은 의사로
의학은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 간단한 외과 수술은 이집트 시대에도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의학을 마술의 범주에서 분리시켜 논리적 학문으로 진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00년대의 사람이다. 병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바로 의학이 되었고, 의학의 역사는 인류 문화의 역사와 같다고 평해도 될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의학 과학적 방법론 부족해
의학은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 중 하나이며, 이런 인식은 과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대인들도 의학을 중시하였고, 영원히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후대에 넘겨주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의학 교육의 역사의 깊이는 의학 교육의 역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의학이 현대의 의학과 다르듯, 의학 교육도 현재와 달랐기에 현대적인 의학 교육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고대에는 세습을 바탕으로 한 도제식 교육이 주가 되었으며, 중세에는 중세 대학에서 법학, 신학, 철학과 함께 교육되었다.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의학은 과학적 방법론이 주가 되지 않고, 주술적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당시의 교육의 형태 또한 체계적이지 못했다.
중세까지만 해도 의사는 전문직이라기보다는 직업학교의 졸업생에 가까웠다. 철학 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이 2년 정도의 직업교육을 거쳐 의사가 되었다. 요약하자면, 당시까지는 의사는 있었지만 의학은 없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2+4년, 혹은 4+4년의 대학 과정, 나아가 수련 과정까지 완전히 정립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해부학의 재조명, 그러나...
의학이 과학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로 넘어가서부터다. 이 당시에 현대의학에 와서도 의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해부학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원후 100년대에 갈레노스가 수행해서 정립해놓은 해부학에서 더 이상 발전이 없다가 1500년대 벨기에의 베살리우스에 의해 근대 해부학이 탄생했다.
이 시기부터 실증적인 학문으로서의 의학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해부학이 발전했음에도 그것이 바로 의학의 발전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의 구조와 산 자의 구조가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죽은 사람의 사인으로 인해 발생한 해부학적 변화 등이 특정 질병과 연결된다는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다.
과학 혁명으로 병원, 비로소 의학의 공간으로
병원 실습은 근대적 의학 교육에서 필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 시기까지는 의사들은 병원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의사들은 그저 이제까지 알려진 것들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신학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사유하는 연구인에 가까웠으며, 실제 병원에는 더 이상 상태가 호전될 가망이 없거나 요양을 제공받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수녀와 신부들이 주축이 되어 식사와 침상을 제공하는 형태에 가까웠다.
이 때까지의 의학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으로, 유럽의 의과대학(college), 병원, 대학교(university)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온 서로 다른 기관에 불과했다. 현미경의 발견, 세포의 발견 등은 조직학과 병리학을 탄생시켰고, 프랑스 혁명을 촉발점으로 하여 병원은 비로소 과학적 방법론의 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강의실에서 스승의 강의로만 진행되던 의학 교육이 비로소 병원에서의 임상 환자와의 조우를 도입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기초 + 임상 = 2 + 2, 그 근간은 플렉스너 보고서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유럽, 미국 양 측 모두의 의학교육은 통일성이 없었고, 학교마다 교육 과정도 상이했다. 졸업하고 나면 같은 의사가 되지만, 아는 지식은 모두 달라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수학과와 미국의 수학과, 한국의 수학과를 나온 사람들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배운 것 또한 모두 다르다면 그것을 진정한 학문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의학의 뿌리는 물론 유럽이지만, 현재의 표준화된 의학 교육의 뿌리는 미국이다. 당시 미국의 의과대학(College)들은 종합대학(University)에 편입되어 과학적 연구론을 통해 큰 발전을 이루었으나 병원과의 연계가 부족하여 재정난 등으로 충분한 연구를 하지 못 하는 상태였다.
이에 당시 미국의사협회 의학교육위원회는 카네기 교육재단에 미국 의대들의 실태조사를 의뢰했고, 카네기 재단이 선정한 인물이 바로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였다. 플렉스너는 현재 최고의 병원을 가진 것으로 손꼽는 존스 홉킨스 대학을 졸업한 인재였다. 그는 미국과 캐나다의 의과대학들을 근대적 시선으로 평가했고,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바로 ‘플렉스너 보고서’였다.
플렉스너 보고서, 미국 의과대학을 절반으로
플렉스너 보고서의 파장은 대단해서, 조사 당시 155개 의과대학이 조사 이후 76개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게 되었다. 적절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의대들이 모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현대의 2+2 의학교육은 이 당시에 정립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뒤의 +2에 해당하는 임상교육을 확실히 제공할 수 있는 의대만 남은 것이다.
플렉스너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의사들의 과학적 소양이었다. 플렉스너의 모교였던 존스 홉킨스는 무려 1893년에 의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해 기초 교육과정을 수료한 학생들만을 입학시켰는데, 당시 다른 의대들은 기초 과학을 전혀 배우지 못한 학생들도 많이 입학시켰다. 또한 임상의학과의 조화도 중요하게 여겨 교육과 실제 임상에서 기초와 임상 양쪽 모두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순히 학문의 교육을 넘어서 의사가 될 학생들은 통찰력을 갖추어야 하며, 환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과 동시에 여러 문화적 경험 또한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사람을 치료하는 전문직이 되어야 한다는 현대에도 강조되는 가치는 플렉스너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PBL, TBL, 다양한 시도, 전인의학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나라 의학과 의학 교육 또한 유럽이 그랬듯 당시 미국의 플렉스너가 정립한 방법론에 영향을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일본의 도제식 교육과 군사 문화가 섞여 부조리한 것이 더해지고 말았다. 교육과정과 수련과정에서 과학적인 의학은 충분히 강조되고 있으나 의학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무, 문화적인 측면은 무시되고 있다. 국민들은 의사를 정보 제공자와 술기 시행자 이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의사 스스로의 인식도 별로 다르지 않다.
PBL, TBL, 그리고 추가되는 수많은 도덕과 문화교육은 결국에는 이 이상적인 교육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의 의사는 직업학교 졸업생이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교육 방식들이 탁상공론을 거쳐 도입되는 만큼 학생들에게는 불편하고 효율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플렉스너가 제시한 전인적인, 존경받는 전문직으로서의 의사가 되는 것은 교육받는 학생들 본인이다. 역사를 알고 나아갈 길을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더 좋은 의사로 만드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준형 기자/가천
<bestofzone@e-med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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