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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2010.04.19.)/오피니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4.30 당신의 생각은 지배당하고 있다
  2. 2010.04.30 편집자가 독자에게
  3. 2010.04.30 사설

 

당신의 생각은 지배당하고 있다

생각하는 바에 관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
내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은?

깨져버린 달걀의 우리 사회

 콜럼버스는 달걀을 세웠다. 비록 달걀의 밑 부분이 깨지긴 했지만 말이다. 혹자는 그것을 발상의 전환, 획기적 아이디어로 추켜세운다. 하지만 홍세화씨는 말한다. 그것은 다만 자연의 섭리에 맞선 인위적인 폭력이었다고. 그 폭력으로 인해 피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시작되었다고. 그리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 모양이라고.
 깨진 부분에 속한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채 하루하루를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고민할 시간도 불만할 여력도 없다. 그보다 조금 위에 있는 중산층 사람들은 자신도 깨진 부분으로 내려가지 않을까 항상 불안해한다. 그들에게 물적 소유는 최대의 관심사이고 자본 앞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그 위를 차지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의 20%뿐이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의 80%를 지배하고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왜 민주주의 사회에서 80%의 사람이 20%의 사람에게 지배당하고 있는가? 어떻게 민주주의 하에서 20%가 80%를 소유하는 일이 일어났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의 생각은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 그것은 현실세계다

 몇 년 전 이랜드 어머니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 홍세화씨는 직접 질문을 던졌다. 그 동안 어느 정당에 표를 던져왔느냐. 그들의 시위를 도와주던 민주 노총을 비롯한 진보 정당에 표를 던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지지한 당은 지금 그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한나라당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문제에 직면하기 전까지 20%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에 무엇을 생각하는가? ‘왜 파업을 일으켰을까?’라고 생각하는가. 혹은 ‘파업=무질서=불안’이라는 공식에 의거해 ‘웬 파업이야! 괜히 불편하겠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한겨례 신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운동권 신문, 편파적 신문 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가. 그렇다면 그 생각은 당신이 직접 한겨례 신문을 구독해 보고 스스로 내린 판단인가.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칸트가 지적했듯이 인간은 ‘생각하는 바에 관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생각해 보라. 당신의 생각은 어떻게 당신의 생각이 되었는가? 폭넓은 독서, 열린 자세의 토론, 직접 견문, 혹은 성찰. 이 경로들을 통하여 형성된 것인가?



제도교육과 미디어, 그리고 ‘왜?’의 죽음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 존치되어야 하는가.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활발한 토론이 있어 왔다. 하지만 답은 없다. 인문 사회과학의 모든 문제가 그렇다. 생각과 논리를 요구하는 정답이 없는 학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해 이러한 문제를 낸다. ‘다음 나라들 중에 실질적으로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는?’ 이 문제를 맞힌 학생은 사형제에 대해 얼마나 생각을 해봤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미디어는 많은 지식을 준다. 어떤 책을 읽지 않아도 그 내용을 알 것 같이 해 주고, 어떤 대상을 조사해 보지 않아도 그에 대한 정보를 준다. 그 덕에 우리는 많이 유식한 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무지하다는 자각은 물론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 그 문제는 둘째 치고 그렇다면 과연 그 정보들을 필터링하고 가공한 자를 믿을 수는 있을까?
 아기들이 ‘엄마’라는 단어 다음으로 많이 쓰는 단어는 ‘왜?’이다. 아기들은 모든 게 궁금할 수밖에 없다. 하늘은 왜 파랗고 비는 왜 오는가, 손가락은 왜 다섯 개인가. 그러나 우리가 들어온 대답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건 원래 그런 거야.”, “몰라도 돼.”, “크면 다 알아.” 그리고 그 아기들이 사회에 나가 비정상적인 현실과 마주했을 때, ‘왜?’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왜 내 생각이 되었는가?

 그 동안 머릿속에서 아무 의심 없이 머무르던 생각을 깨끗이 지우기란 불가능 하다. 그 생각들을 뒤엎고 새로운 생각들로 덮어 쓰는 것 또한 한계가 있다. 생각이 많이 바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홍세화 씨는 항상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것을 요구한다. ‘내 생각은 왜 내 생각이 되었는가?’ 어떤 존재에 대한 판단을 했다면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한 것인가, 그 근거는 옳은 것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어야 한다.
 매트릭스의 세계, 하루 빨리 모피어스를 만나야 하고 빨간 약을 선택해야 한다.

※ 본 기사는 홍세화 씨의 ‘생각의 좌표’를 읽고, ‘2010보건의료진보포럼’에서 홍세화씨의 강연 ‘생각의 좌표-내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듣고 작성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정세용 기자/연세
<avantgarde91@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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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2010.04.19.)/오피니언 2010. 4. 30. 10:20 Posted by mednews

 

김예슬을 지지한다

 시계 바늘은 벌써 새벽 세 시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3월 12일 산부인과 시험 날.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뜬눈으로 지샜던 수많은 밤들과 별다를 것도 없는 날이었지만 그날은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요.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며,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눈을 좀 붙여야 하나... 아니야, 공부해야지.’
 그런데, 의과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누구나 한 번 쯤은 하게 되는 이 고민의 근원을 생각해보면, 슬프기가 짝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본다면 한 사람의 환자라도 더 살리기 위해 열심히 정진하는 예비 의료인들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이 그렇지 못함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요. 시험 전날의 그 밤은,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서로가 서로를 밟고 일어서기 위한 각축장일 뿐입니다.

 그 이틀 전, 고려대학교 김예슬양이 교정에 대자보 한 장을 남기고 자퇴했습니다. 그녀는 경쟁만을 부추기는 대학과 사회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대학 교정에 붙은 한 장의 대자보는 적지 않은 울림을 일으켰지요. 그 파장만으로도 김예슬씨의 이야기는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20대, 모든 대학생의 것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입학과 동시에 ‘의사’로서의 미래가 보장되는 우리에게는 그들의 고민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과대학도 역시 목적 없이 달리는 경주마들의 경연장의 축소판이 아닐까요. 바깥의 친구들이 수만명과 경쟁하며 ‘스펙’을 쌓는다면, 의과대학에서는 50명 100명의 동기 사이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학교마다 분위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서로 도와주고 챙겨주는 분위기의 학교도 있고, 족보 때문에 서로 싸우고 얼굴을 붉히는 학교도 있지요. 하지만 그 밑에 깔린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의사가 되겠다는 철학은 없이, 유급과 재시를 피하고 성적표에 찍히는 알파벳을 결정하기 위해 바둥댈 뿐입니다.
 
 김예슬씨의 결정에 대해 소설가 공지영씨는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386세대의 방법인 대자보를 택한 점은 아쉽다. 지금의 20대 만의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김예슬 선언’이후 많은 대학생들이 인터넷 까페 등에 모여 지지를 보내는 한 편 새로운 행동을 취할 방법을 강구중입니다.
 그에 비해 ‘대한민국 1%’라고 자부하는 우리 의대생들은 어떤가요. 방법론에 접근하기는커녕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사’로서의 길이 보장된다고 해서, ‘88만원 세대’로 대변되는 우리 세대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로서, 같은 대학생으로서의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우리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더욱 그렇지요. 게다가 지금과 같은 분위기로 의료 민영화와 원격 진료 등이 진행된다면 졸업 후 우리가 처할 의료환경도 엄청난 경쟁의 장이 될 것이 뻔해 보입니다.

 한 달음에 현실에서 이상으로 달리기는 힘이 듭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김예슬씨에게 지지를 보내는 일 뿐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드디어 기성세대에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 때, 그저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편집장 김민재
<editor@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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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2010.04.19.)/오피니언 2010. 4. 30. 10:18 Posted by mednews

 

감동으로 다가온 ‘환자체험’을 배우자

 지난 달 초, 국내 한 대학병원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의예과 신입생들이 병원으로 몰려가 직접 접수를 하더니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관동의대에서 시행된 <가치관 재정립을 위한 집체 체험연수>의 일환이었다. 병동에 입원한 학생들은 환자들과 면담을 통해 그들의 고충과 바람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이 대학 신입생들은 보호자, 간병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나눔을 실천하는 명사들과 만남을 통해 인성을 재고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모든 체험활동을 마친 학생들은 감상과 포부를 적어 타임캡슐에 보관했다. 대학 측은 졸업 후 의사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학생들에게 다시 나누어줄 것을 약속했다.
 기존의 의과대학에서 행해지던 인성 강화 프로그램과 차별화 된 이 프로그램은 의학교육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비의료인들이 의학과 술기를 배우기 이전에 피행위자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역지사지의 묘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의학교육이 잊고 있었던 ‘공부’의 참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옛 현인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피력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든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덕행과 수양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공부(工夫)’다.
 안타깝게도 다른 모든 근대화된 고등교육과정과 마찬가지로 의과대학 교육과정은 ‘공부(工夫)’보다는 ‘훈육(訓育)’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교육과정 상의 한계는 환자들이 의사들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사를 속되이 일컫는 ‘칼잡이’와 같은 말에는 영혼이 없는 일부 의사들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의대생이 ‘칼잡이’가 아닌 참의사가 되는 도상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때문에 그 길을 올곧게 닦는 일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의과대학 당국은 진정으로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의사의 영혼을 회복할 수 있는 ‘공부’에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한 의과대학의 실험이 예비의료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의료, 거꾸로 갈 셈인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3일, 하원을 통과한 건강보험개혁 범안에 정식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건강보험 개혁이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었다. 이번 개혁안은 10년간 9400억달러를 투입해 무보험자 3200만명에게 보험 혜택을 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빈곤층에게 제공하는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의 수혜 대상을 늘리고 중산층에겐 보조금을 지급한다. 또한 민간 보험회사들을 규제하는 조처도 마련되어, 계약자를 상대로 한 보험업계의 횡포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은 OECD에 가입된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국가이다. 때문에 직장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민간의료보험을 이용하여야 하지만 이마저도 비싼 보험료를 요구하기 때문에 결국은 의료의 사각지대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 미국 인구의 17%인 5400만명이 의료 보험 없이 생활하고 있다.
 의료보험 개혁안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은 지난 100년간 숙원사업이었던 전국민 보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 개혁의 의의는 크다. 민영화의 최전선에 있던 미국이 시장에서 운영되는 의료 시스템의 비인간성과 비효율을 인정하고 공공성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6일 보건복지부는 의료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시키고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번 개정안에는 원격 진료 및 의료 기관의 부대사업 허용, 의료기관 간의 합병을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의료기관이 병원경영지원사업 등의 부대사업으로 수익을 창출 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이번 개정안에 시민단체는 민영화의 서곡이라며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당사자인 의협은 원격 진료 도입에는 반대하지만 다른 쟁점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손익 계산 후에 1차 진료의에게 불리할지 모를 원격진료 안에는 반대하고, 의사에게 유리할 수 있는 의료 민영화 관련 사안에는 조심스레 찬성표를 던지는 모양세다.
 많은 의사들과 몇몇 의대생들은 의료 민영화가 되면 의사에게 유리한 진료환경이 펼쳐질 것이라며 반가워한다. 하지만 민영화는 의료의 운영주체를 자본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이지 의사에게 주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민영화로 이익을 보는 이들은 대형병원과 민간 보험회사, 소수의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의사들이다. 절대 다수의 의사들은 병원에 고용되어 경영진의 지침에 맞춰 진료하는 샐러리맨 ‘의사’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의료 민영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온다. 진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몇몇의 환자들은 수준 높은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영화의 수순으로 당연지정제 마저 폐지된다면 건강보험에 의지해 살아가는 평범한 국민들에게 병원 문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의사단체와 공화당의 반대가 있었지만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세금을 조금 더 내더라도 공동체가 함께 건강해지는 길을 택했다. ‘국민의 건강권을 책임지는 의료인’이라는 명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의료의 공공성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지켜가야 한다. 의료권마저 승자독식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의사가 꿈꾸는 진료환경은 결코 의료 민영화를 통해서 실현될 수 없다. 의료 민영화 환경에서 의사는 노동자일 뿐 주인이 아니다. 민영화의 최전선에 있던 미국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한국의료는 오히려 시간을 역행하는 결정을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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