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의료, 오해와 진실
민주당이 지난 1월 ‘무상의료’안을 당론으로 채택한데 이어 ‘무상급식’,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까지 정책과제로 내세우면서 복지 논쟁이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진작부터 무상의료 및 보편적 복지를 주장했던 진보정당들은 민주당의 좌클릭에 환영과 지지의 뜻을 밝혔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금씩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야당의 이러한 움직임이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악화시키는 포퓰리즘이라며 연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의협신문이 최근 의사 1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무상의료에 대해 의사의 93%는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응답했고 72%는 정책방향도 옳지 않다고 답했다. 문태준 의협 명예회장은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현재도 보험재정이 적자인 상황에서 무상의료 하자는 것은 의사들 보고 공짜로 환자보라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상의료에 대한 추측과 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향후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게 될 의대생들의 머릿속도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 고액 중증질환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국민의 비율
꼭지 하나. 무상의료,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무상’이라는 표현이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의료비를 전면 무료로 하자거나 의사가 환자를 공짜로 봐야 한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실질적 무상의료의 목표는 건강보험 입원진료비 보장성을 90%로 높이고 병원비 ‘본인부담상한액’을 100만원으로 낮추는 것이다. 입원진료비 보장성 90%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이다. 보장성이 90%라는 것은 병원비가 총 100만원이 나왔을 때 이 중 90만원은 국민건강보험이 지불하고, 나머지 10만원은 환자 본인이 직접 부담한다는 뜻이다.
OECD 최저수준의 의료 안전망
우리나라의 입원진료비 보장성은 현재 60% 정도로, OECD 국가 30개국 중 29위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보장성이 낮기 때문에 누구라도 중한 질병에 걸렸을 경우 진료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과거 희귀 질환을 앓고 있는 딸을 10년 넘게 돌보던아버지가 치료비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인공호흡기를 떼어 내 숨지게 한 사건은 높은 개인부담률로 인한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난치병에 걸린 환자의 딱한 사연을 공개하고 사랑의 모금을 하는 프로그램이 매회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가족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저질러지는 범죄가 사회면에 등장하는 일은 일상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인 현상이 아니다.
OECD 국가 중에서 호주, 캐나다, 덴마크, 그리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뉴질랜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등 11개 국가는 입원 진료비가 무료이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핀란드, 독일,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 등 9개 국가는 입원비 하루정액제를 적용하고 있다. 본인부담상한제도 100만원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병원비가 1천만원이 나오든 1억원이 나오든 본인이 40~50%를 부담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건강보험하나로 시민회의’는 실제로 연 1천만원 이상 고액 진료비를 내는 사람들의 수가 무려 11만 여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했고, 전체 국민의 20-30%는 한 해 동안 중증질환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고액의 진료비를 부담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건강보험에서 한 푼도 지원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상의료의 핵심은 이러한 비급여 항목들 중 미용성형수술이나 지방제거술과 같은 것들은 제외하고 선택진료비(특진비), 병실 차액, MRI, 초음파, 각종 의약품 등 치료에 필요한 항목을 건강보험의 영역에 포함시켜 실질적 보장성을 높이자는 데 있다.
불필요한 의료 이용은
오히려 감소할 것
한나라당은 하지만 이러한 야당의 제안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고령화 등 의료비 증가를 부추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존재하는데다가, 본인 부담률을 낮추게 되면 병원가기가 쉬워져서 의료비가 폭등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야당이 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발맞춰 조선일보는 지난 1월 17일 ‘盧정부때 시도한 무상의료, 2년도 못 버티고 폐기됐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어, 2006년 노무현 정부가 시도한 ‘6세 이하 무상 입원비 정책’이 과잉 입원 현상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이를 ‘무상의료의 위험성이 입증된 사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건강보험하나로 시민회의’가 내놓은 조사 결과에 의해 조선일보의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책 기간 동안 진료비 총액은 오히려 비슷하거나 더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 보고서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강화되면 오히려 불필요한 의료이용을 잘 관리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보장성 강화로 비급여 항목이 대거 건강보험 적용 항목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공적 관리를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의 무상의료에 가까운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영국의 국민 일인당 연간 의사방문 횟수는 우리나라의 3분의 1 수준이다. 오히려 OECD 국가 중 본인부담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의 국민 1인당 의사 방문횟수와 평균 입원일수가 OECD 평균을 웃돌고 있다.
밑 빠진 독도 손봐야
우리나라 국민의 의사 방문횟수가 많은 이유는 공급자에 대한 적절한 규제가 없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행위별수가제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유일한 나라다. 행위별 수가제 하에서는 의료 공급자가 소득 증대를 위해 불필요한 검사를 하거나 외래 방문 횟수를 늘리는 등 의료서비스를 과잉 공급하거나, 비급여 의료서비스의 제공을 늘리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행위별수가제에 민간병원의 영리 추구가 맞물려 의료비는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 진보 개혁 세력은 건강보험 재정을 상당부분 확충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낭비적인 구조를 막지 못한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보고 있다. 대안은 포괄수가제, 총액계약제 등으로 지출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다.
무상복지, 서민 주머니 털기?
최근 한나라당의 안상수 대표는 “무상복지는 서민 주머니 털어 부자에게 혜택 주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무상복지가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말하지 않는 사실은 증세 부담이 고소득층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모든 현대 국가는 고소득층일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누진세율’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증세해서 복지를 확대할 경우, 부자들은 세금 부담에 비해 더 적은 혜택을 받고, 서민들은 세금 부담에 비해 더 많은 혜택을 받는다”며 한나라당의 세금폭탄론이 ”부자 보호 논리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