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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18 지못미 내성적 : 성적공개와 익명성 보장

 

지못미 내성적 : 성적공개와 익명성 보장

 

지켜줘야 할 학생들의 권리

 

A모 대학의 P양
시험이 끝나면 우울한 기분도 잠시 뿐. 삼삼오오 모여 궁금한 문제를 맞추어 보는 무리만 무사히 지나치면 아무도 더 이상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설마 F는 뜨지 않겠지 하며 불안해하는 애들도 보이지만 곧 저녁 술 약속을 잡으며 다 같이 시험 끝난 기쁨을 누린다. 얼마나 잘 보았는지 못 봤는지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없으므로 굳이 알려하지도 않는다. 시험지에 쳐놓은 별표를 떠올리면 우울하다가도 금세 잊어버린다. 학기가 끝나고 성적표가 뜨기 전까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B모 대학의 L양
또 그날이 왔다. 몇 번이나 더 반복되야 공개적인 성적 발표에 무뎌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과대가 강의실 뒤쪽에 등수별로 나열된 명단이 적힌 A4지를 붙인다. 벌써 확인한 애들이 웅성웅성된다. 상위권에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나보다. 안 그래도 시험 못 봐서 속상한데 이렇게 또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확인 받는 다는 건 정말 스트레스다. 친한 친구들의 등수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용기내서 명단을 살펴보니 점수는 낮지만 평소 등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어려웠나보다. 친한 친구 한명이 이번에도 뒤에서 3등이다. 착하고 성격도 좋은데 그놈의 술이 문제다. 이번에는 공부좀 시켜야겠다.

C모 대학의 K군
마지막 문제의 답을 마우스로 클릭하고 컴퓨터로 보는 시험이 끝나면 곧 내 점수, 등수가 뜬다. 물론 나 혼자만 볼 수 있다. 문제가 쉽다고 느꼈는데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평소보다 등수가 좀 떨어졌다. 돌아가서 내가 어떤 문제를 틀렸는지 확인한다. 역시 실수가 많았다. 다음 시험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험 없는 의대란 존재할 수 없으며 시험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하지만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자신이 어떠한 환경에서 공부하느냐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성적 공개, 익명성 보장이 다른 학교에서는 상상에만 불과한 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학습 분위기 조성을 명목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성적공개. 학교 별 현황을 조사해 보았다.
설문조사는 총 22개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시험 성적을 공개하는 학교로는 (가톨릭대 고신대 관동대 대가대 동국대 아주대 연세대 울산대 을지대 이화여대 인제대 한림대) 총 12개 대학이 있었고 6개 대학(경희대 계명대 단국대 원광대 전남대 중앙대)에서 성적을 공개하지 않았다.
성적 개별공지하는 학교와 닉네임 또는 아이디로 등으로 익명성을 보장받는 학교를 포함하여 모든 학년에서 성적에 대한 익명성을 보장받는 학교는 총 7개 대학이 있었다. (가톨릭대 관동대 동국대 아주대 연세대 울산대 인제대)

그렇다면, 성적 공개 여부, 또 공개 방법 등에 있어서 ‘학습 분위기나 동기들 사이에 어떤 영향을 주며, 어떤 방식에 학생들이 가장 만족하는지’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익명성 보장 없이 모두 공개하는 학교

 

시험이 끝날 때마다 A4용지 한 장에 이름, 학번, 점수, 등수가 찍혀 교실 뒤에 붙는다면?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의견이다. 물론 공부를 하지 않아 낮은 점수가 모두에게 공개 되는 것은 부끄러우니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경쟁이 필요 이상으로 치열해지고 매 시험마다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점수만 전체 공개하는 한 학교의 학생은 ‘성적 나올 때마다 합산해서 등수를 매기고 내가 얼마나 되는지, 내 뒤에 몇 명이나 있는지, 얘보다는 몇 등이나 높은지 확인하고 안심하는 것이 반복된다. 다들 이기적이고 까칠해지는 것 같고, 성적 좋은 사람끼리도 더 좋은 성적 욕심으로 서로를 시기 질투한다’며 성적공개가 동기들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또 다른 학생은 ‘의대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줄세우기 문화가 문제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소집단인 이곳에서 학생들을 줄을 세워 동기가 경쟁자로 인식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는 의견을 전했다.
반면, 처음 몇 달이 힘들어서 그렇지, 익숙해지고 나면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는 학생도 있었다. ‘익명성을 보장한다 하더라도 어떤 루트로든 뒤에서 성적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는데, 다른 말 나오지 않게 다 공개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닉네임이나 꼬리표를 통해 익명성을 보장하여 공개하는 학교에서도 동기들끼리 서로 물어보거나 교수님이나 조교님의 말씀을 통해 결국은 개인의 성적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아예 공개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학생은 성적공개 때문에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안 했으면 더 불안했을 것 같다고.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혹시 유급권에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들을 확인할 길이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다양한 이견 외에 이런 공개방식을 가진 학교의 학생들의 공통적인 의견이 존재했다. 무책임한 전체공개 방식은 학교 측의 학업 분위기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이며, 좋은 인성을 가진 의사를 배출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익명성을 보장하며 공개하는 학교

 

익명성을 보장받는 학교의 학생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성적공개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다른 학교에서 왜 ‘성적공개’에 대해 질문하고 관심을 갖는지 의아해 하는 경우도, 공개하지 않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은 ‘학번 자체가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라 딱히 공개 때문에 스트레스 더 받는 것은 없다. 그냥 자기 시험 망친거만 짜증날 뿐’이라며, ‘안 알려줬으면 궁금했을 것 같고 학업분위기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만, 이처럼 개인의 점수를 본인만 확인할 수 있게 하는 학교에서는 유급이 많은 과목에 한해 학생들끼리 자체적으로 쪽지에 익명으로 점수만 적어 분포를 확인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익명성을 보장받는다 하더라도, 40명 내외의 적은 인원의 학교에서는 한 학기만 지내보면 알음알음으로 결국은 성적이 윤곽을 드러낸다고 했다.
익명성을 보장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었는데, 개인이 정한 닉네임만 표시해 본인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경우, 꼬리표로 나누어 주는 경우, 학과 사무실에서 개인에게 나누어주는 암호를 제시하면 성적을 알려주는 경우 등으로 아주 다양했다.

 

성적을 공개하지 않는 학교

 

학교 분위기는 평화롭지만 그 속에서 불안함과 답답함이 존재하는 듯 했다. 거기다가 당장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니 나태해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란다.
일절 성적을 공개하지 않는 학교에 크게 불만을 나타낸 한 학생은 ‘어떤 근거로 학점이 나오는지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어서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데도 답답한 부분이 많다’며, 더 큰 문제는 학기가 끝나고야 성적을 알 수 있어서 유급할 정도의 성적인지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 맞은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최소한 진급이 힘들 수도 있는 학생들에게는 개인 통보해서 공부하도록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도 비췄다.
또 다른 학생은 ‘점수를 모르니 맘 놓고 놀다가 유급할 수도 있어서 좀 불안하다. 차라리 내 점수를 알면 다음 시험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라도 들 것 같은데, 모르니 답답하다’고 의견을 전해왔다.
그리고 성적을 공개하지 않는 학교는 대체로 문제나 정답도 공개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피드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공부 양 자체만으로도 벅찬데, 성적까지 공개한다면 심한 경쟁으로 더한 스트레스가 올 것 같다는 의견을 준 학생은 ‘성적을 공개하면, 성적으로 판단해서 친구를 대할 수도 있고 분위기가 흐려질 것 같다’고 했고, 다른 학교의 한 학생도 ‘성적이나 등수를 전체 공개하는 것은 지나친 스트레스를 줄 것 같고 딱히 크게 학습 분위기 형성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는다’면서 ‘다만 매 시험마다 개인별로 성적을 알려준다면 다음 시험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의 신청

 

성적 공개 여부와 함께 이의 신청에 대해서도 함께 질문했는데, 학교별로 성적 공개 방식에는 큰 차이를 보이는 반면, 이의신청에 관련해서는 다소 비슷한 양상이었다. 의대의 특성상 교수님께 직접 이의를 제기하러 찾아가기가 힘드니 가능하더라도 이의신청을 하지 않는 분위기라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문제가 대부분 객관식인데다 교수님까지 찾아가며 성적을 잘 받으려 하는 이미지가 생길까 봐 더더욱 이의신청은 하지 않는 분위기인 학교가 많았다.
어떤 학교에서는 성적에 민감한 학생들이 많은 학번 분위기인 경우에 몰래 교수님 찾아가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이의신청이 많은 경우 나중에 복수 정답 인정해주시는 교수님도 있긴 하지만, 성적 변화가 거의 없어 나중에는 소득이 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은 별로 가지 않는다고 한다.

 

맺으며

 

학생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의대에서 성적은 무척 중요한, 어쩌면 객관적인 유일한 기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학교의 모든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없었지만, 다양한 학교의 경우를 통해 미루어 봤을 때, 성적을 공개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의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해야 하되 개인의 익명성은 어느 정도 보장하는 것이 가장 긍정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학생이 말했듯이, 힘든 의과대학 공부를 하면서도 최소한 ‘의사가 될 사람들의 인성’은 지켜낼 수 있는 분위기는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 그 자체를 치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성적을 어떻게 처리하고 활용하여 더 나은 자원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학교 측과 학생 사이의 유연한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문정민 기자/중앙
<jmmoon@e-mednewws.com>
하진경 기자/계명
<jinkyeong@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