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를 품은 의대생
전남의대 문학동아리 ‘보라문학회’를 만나다
의대생들에게 ‘학교생활’ 이라는 주제를 던져주고 떠오르는 걸 말해보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대부분이 시험과 동아리라 답하지 않을까. 의대에서 공부하다보면 20대의 정체성을 잃은 채 뒤 한번 돌아보지 못하고 시험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의대생활에서 삶의 지향점을 잃고 방황하지 않기 위해 한 줄 한 줄, 문학 작품을 써내려가며 사색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4월 4일, 봄 햇살 따스했던 광주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동아리방이 위치한 남광회관 204호, 열세명의 의대생들이 테이블에 앉아 직접 써온 글을 발표하고 있었다. 왠지 의대 문학동아리라고 하면 시사적인 주제보다는 무언가 의료쪽과 가까운 주제만 다루지 않을까 하는 기자의 생각과는 달리, 일본 지진 혹은 천안함 사건 1주기를 기념한 추모시나 학교생활에 관한 글을 써서 발표하기로 했다고 한다. ‘죽음은 무엇을 낳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천안함 추모시를 낭송하는 본과 1학년 김진영 학생, 발표를 듣는 회원들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하지만 무거운 분위기도 잠시, 본과 2학년 양해영 학생이 ‘질병에 대한 고찰 - 본1병(Von ill disease)’을 발표하자, 동아리방 전체가 웃음으로 가득하다.
가슴 밖으로 뛰쳐나오는 감정을 기꺼이 글로 표현하는 이들. 스스로를 의대 담장을 넘어 세상의 리더(leader)를 꿈꾸는 리더(reader)라고 칭하는 이들, 전남대학교 보라문학회의 양유 회장과 12명의 보라문학회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동아리 이름이 ‘보라 문학회’라고 하셨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요?
선배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두 가지 어원이 있는 것 같아요. 가장 유력한 어원은 ‘보라’색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건데요, 수술복에 묻은 핏자국이 보라색으로 보이잖아요, 그걸 보신 선배님께서 보라 문학회란 이름을 떠올리셨다고 하더라구요. ‘보다(see)’라는 어근에서 파생된 ‘보라’에서 ‘멀리 바라보라’는 의도로 지으셨다고 설명해주시는 선배님들도 더러 계셔요, 저희는 이 두 의미 모두 맘에 들어서 중의적인 의미의 ‘보라’라고 생각한답니다.
- 역사가 아주 긴 동아리라고 들었는데, 간단한 동아리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희 보라문학회는 전남대 의대와 간호대 문학 동아리이구요. 현재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전국 의대에서 보기 드문(?) 문학 동아리 입니다. 처음에는 전남의대 교지반과 함께 활동했지만 1980년대에 교지반과 문학회가 따로 분리됐다고 해요, 물론 지금은 저희 보라문학회만 남아 있고요.
- 의대 간호대 문학 동아리라 하면 말씀하신대로 매우 낯설텐데, 주로 어떤 활동들을 하시나요?
저희는 매주 한 회의 모임을 갖습니다. 주로 책을 읽고 발제해 온 주제에 맞춰서 독서토론을 합니다. 동아리 이름이 문학동아리라 시나 소설만 읽는 걸로 생각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시사와 관련된 좋은 평론도 읽고, 문화/예술 분야 외에 역사나 사회, 정치 분야 책도 읽습니다. 예를 들어, 저번 주엔 자본주주의와 바나나의 관계를 다룬 ‘바나나’라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가끔은 서로 글을 써 와서 담소를 나누는 ‘품평회’라는 행사도 하구요. ‘OB 선배님들과 함께 하는 영화 감상’나 여름방학에 하는 인문학 스터디와 수련회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글 맞춤법 공부와 간단한 글쓰기 공부도 하고 있어요. 하지만 가장 보라문학회 다운 행사라면 일 년에 한번 ‘학동일기’라는 문집 발간과 선배님들과 함께하는 문집 발간회, 겨울 방학에 있는 ‘작가탐방’을 들 수 있겠네요.
- 문집 발간과 작가 탐방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문집은 저희가 일 년 동안 활동한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저희 학교가 ‘학동’에 있어서 선배님께서 ‘학동일기’라고 쓰신 게 지금까지 내려오게 됐어요. 문집은 저희가 쓴 시나 수필을 비롯해서 다양한 글을 담고 있고요, 작가탐방을 가서 작가 분과 나눈 대담 녹취록과 여름 수련회에서 하는 익명 백일장 작품들도 담고 있습니다.
작가탐방은 저희가 직접 작가를 정하고 겨울 방학 동안 작가가 쓴 책과 글을 찾아서 공부한 뒤에 작가를 만나러 가는 행사인데요, ‘사평역에서’를 쓰신 곽재구 시인도 만났고요,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내가 결혼했다’를 쓰신 소설가 박현욱 씨도 직접 만났습니다. 선배들께서는 소설가 이외수 씨나 나희덕 시인도 뵙고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 의대 간호대 문학 동아리인데도 회원 수가 상당히 많네요.
재작년까지만 해도 재학생 회원이 5명이었는데, 최근에 많은 후배들이 들어와서 함께하게 됐어요. 아무래도 답답한 학교생활 속에서 책을 읽음으로써 해방구를 찾으려는 친구들이 늘어난 거 같아요. 근데 회원 수가 많아지다 보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 같아요.(웃음) 원철이 형 같은 경우는 공모전에 자주 응모하고, 작년엔 ‘청년토지문학상’ 상금을 타서 저희 식비 지원을 해줬고요. 호길이 형은 소설을 주로 쓰시는데 의대생 문학상 소설부문 수상하신 경력이 있어요, 저랑 기홍이형은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 소설도 좋아하는데, 서로 좋아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 하나 되는 걸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문학동아리만의 특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타 동아리와의 차이점이 있을까요?
보라문학회의 홍보 문구는 ‘찻잔 속에 피어나는 문학의 향기, 보라문학회’랍니다. 기자님도 의대 생활을 하시면서 거의 보지 못하셨을 술 모임이 거의 없는 동아리입니다. 무엇보다도 강압적인 분위기 없이 본인의 글을 통하여 문집을 발간한다는 매력이 있지 않을까요. 공연동아리에서 공연을 하고 난 기분과 비슷하게 자신이 쓴 글이 누군가에게 읽혀지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보라문학회는 글쓰기를 강요하는 동아리는 전혀 아닙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합니다. 의대의 힘든 커리큘럼 속에서 서로의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는 점에서 저희 동아리는 가족 같은 동아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의대라는 담장을 넘어 세상에 소통할 수 있는 의사, 간호사가 되고 싶다면 문학 동아리를 적극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나 본교 학생이 아니더라도 문학 활동에 관심 있으시다면 저희 카페(http://cafe.daum.net/bora)를 찾아주세요.
이승현 기자/을지
<toypotato@e-mednews.com>
'80호(2011.04.11) > 의대의대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시원, 필기시험문제 공개 추진 (2) | 2011.05.06 |
---|---|
예과탐구생활 (2) | 2011.05.06 |
여과되지 않은 앵글 속 희망 찾기 (0) | 2011.05.06 |
과톱은 아무나 하나 (0) | 2011.05.06 |
의대생, 치대생을 만나다 (3) | 2011.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