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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여성이라면 묻지마 살인사건’에 관하여

- 심층취재

 

필자는 이 사건이 한국사회라는 재래식 변소의 문을 뜯어놓은 사건이라고 본다. 문제가 많고 냄새 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보기 흉하니까 가려놓기 위해 달아놓은 문을 제거함으로서, 수많은 문제가 실타래처럼 뒤엉킨 우리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꼬인 실의 시작을 알기는 어렵지만, ‘꼬인 실’이라는 사실만은 쉽게 알 수 있다. 

 

소모된 논란 속 호도된 핵심

그러나 정작 중요한 핵심은, 이 사건은 ‘여성혐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묻지마 범죄’도 ‘정신질환자 여부와 관계없이 순수한 여성혐오의 문제’도 아닌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이 저변에 있는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범죄의 특성을 한 구절로 규정하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우리가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피의자는 중증 조현병 환자로 절대 대한민국의 평균적 남성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을 바탕으로 남성 집단 전체를 잠정적 가해자로 모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며, 대다수의 남성들이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흔히 사회적 맥락을 포함한다. 왜 피의자의 무의식에 많고 많은 망상의 종류 중에 ‘여성혐오’가 타고 들어갔는지는 주목해볼만 하다.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사건의 종류를 이분법적이고 소모적으로 언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우리사회에 팽배했던 여성차별, 실질적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사회에서의 유리천장, 남성우월주의 등에 의해 다수 여성들의 불만이 표출된 발로였다는 점을 주목하고 그 저변의 사회적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토론하는 일이다.
흔히 정신분열증으로 일컬어지는 조현병은 ‘논리적 사고의 부재’, 피해망상, 환청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질병이고 법적 심신미약상태이므로, 피의자가 남성이라는 점과 피해자가 생면부지의 여성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왜 이 사건은 정신병 여부를 떠나서 여성혐오범죄인가’를 입증하려는 ‘논리적 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논리적 사고 회로’로 특징지어지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행동을 논리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접근법 자체에 자기모순을 포함하는 일이다. 정신질환자에 의한 범죄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에 대한 다수 여성들의 반응을 ‘연관이 없는 사건을 확대해석하는 비논리적이고 피해망상에서 기원하는 군중 병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피의자는 불특정인에게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범행 장소를 선택했고, 34분간 범죄의 대상을 물색했으며, 6명의 남성이 화장실에 출입하는 동안 일언반구도 하지 않다가 처음 들어온 임의의 여성을 찔렀다. 그 여성이 23살이 아니라 30살이었거나, 육체적으로 약하지 않고 종합격투기 선수였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수정 교수나, 권일영 경감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고른 것”이라는 주장이 전혀 논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시의적절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이유이다. 피의자가 앞서 들어온 6명의 남성들의 골격근량과 신장 등을 고려해서 자신보다 강해보였기 때문에 덤비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저 주장이 논리적이려면 6명의 남성이 모두 남성인 피의자보다 강한 사람이었다든가, 피해자 이전에 다른 여성이 화장실에 들어왔는데 그 여성은 보디빌더여서 근육이 우람했고, 피의자가 그것을 관찰해서 덤비지 않고 대기하다가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피해자를 찌른 상황이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 앞서 말한 구체적 근거는 없지만, 만약 이수정 교수나 권일영 경감의 발언이 “여성은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약하니까”라는 일반론에 기초한 것이었다면, 호모 사피엔스 종의 성별이 남,여 2개가 아니라 6가지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될 것이다. ‘여성이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약하니까 여성을 범죄 대상을 삼은 것이지 특별히 여성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것과 논리적으로 정확히 동일한 구조이다.

 

여자라면 묻지마 살인으로 확인된 불편한 진실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수십년간 강간, 살해 등의 강력범죄에 대해 불안에 떨며 살아왔지만, 대개는 “여자가 먼저 원인을 제공했겠지”라고 하며 넘어갔고, 피해자가 술집여자라든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는 기사가(왜 이런 기사가 나오는지 조차도 의문스럽지만) 나올 때마다 “거봐! 여자가 먼저 잘못했다니까” 하며 본인의 바람이 확인된 것에 모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지내왔다. 이런 피해자 책임론이 팽배했던 이유는 비단 남성우월주의로 인한 남성들의 사고뿐만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만약 끔찍한 범죄가, 피해자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고,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일어난, ‘누구나 당할 수 있는 범죄’라면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여성도 자신이 ‘잠재적 피해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술집여자’였다든가 ‘대로가 아닌 어두운 골목길을 지났다’던가 하는 점은 큰 위안이 된 것이다. 내가 ‘술집여자’만 아니고, 내 딸에게 ‘사람 많은 큰 길로 다녀라!’ ‘늦게 돌아다니지 마라’ ‘너무 짧은 치마 입지마라’고 가르치기만 하면 ‘나’나 ‘내 딸’은 범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믿음 혹은 실낱 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추모할 죽음이 적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이 큰 이슈가 된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김씨는 피해자에게 “술집여자냐”고 묻지 않았고, 피해자의 인상착의 중 자신을 무시했다는 여성들 중 하나인지를 확인해주는 “신학원에 다니는 증거”는 없었으며, “짧은 치마를 입었는지”를 따진 것도 아니며,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닌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자 ‘세계최고의 치안강국’인 대한민국의 천만국민의 수도 서울 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강남역에서 아무런 신상정보도, 인상착의도 범죄의 동기가 되지 않은 채 ‘화장실에 진입한 첫 번째 여성’이라는 사실에 의해 23살 여성이 살해된 것이다. 이로써 수많은 여성들은 지금껏 애써 부정해왔던 “조심여부와 무관하게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직면한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내 딸만’,‘내 부인만’,‘내 여자친구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나만’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빚어낸 허깨비였음을 자각한 것이다. ‘믿음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많았지만 불신은 쉬운 것처럼, 한 번 믿음이 깨진 이후에는 더 이상 이 사건이 ‘정신질환자에 의한 개인적 범죄’인지 아닌지 그 사실여부조차도 관심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은 성냥불에도 폭발한다면 그것은 원래 화약이었다는 뜻이다. ‘왜 관련 없는 사건을 이례적으로 확대하느냐’라는 비판보다는 ‘언제라도 단초만 생기만 폭발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들의 자발적, 집단적 분노가 축적되어왔구나’라고 보는 편이 바람직하다. 한 대상이 침묵해야만 이루어지는 평화는 평화가 아닌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화와 인식을 통한 공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주로 남성들)이 다양한 통계(남성과 여성의 강력범죄률이 큰 차이가 없다거나, 각종 여성의 대우 지표들이 개선된 것, 조현병환자에 의한 살인률 등)이런 현상을 ‘비과학적인 과잉반응’이라고 본다. 얼마나 과학적인 사람들이기에 각종 수치로 무장하는 것일까. 과연 이러한 여성들의 사회적 집단적 불만 표출 및 공격성은 비과학적인 것일까.
 
위험의 과학에 대해서  

이 소위 ‘비과학적’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해보자. 인간은 원래 숫자에 입각해서 위험을 느끼지 않는다. 위험은 불확실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1969년 미국의 엔지니어 c. 스타(chauncey starr)는 위험 확률과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적 위험의 정도를 비교했다. c.스타의 연구 이후 ‘위험 과학’은 미국에서 정식학문분야로 인정받았고, 폴 슬로빅 등 시민의 위험 인식을 오랫동안 연구한 연구자들의 연구결과가 줄줄이 출판되었다. 슬로빅은 사람들이 위험을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인가’, ‘결과의 끔찍한 정도’, ‘위험에 노출된 사람의 수’, ‘자기 스스로 선택했는가의 여부’ 등에 결정적으로 좌우됨을 증명했고, 영국 왕립협회의 연구 결과도 독립적으로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 스키를 타다 죽을 확률이 원전 옆에 살다가 죽을 확률보다 훨씬 높은데도 사람들은 매년 ‘자기 돈을 주고’ 스키를 타러 가는 반면 원전이 자기 동네에 세워지는 것은 결사(죽음을 무릅쓰고)반대한다. 자동차 운전은 내가 ‘자발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데, 비행기는 탑승할 뿐 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동차사고로 인한 사망률이 비행기사고로 인한 사망률보다 훨씬 높은데도 사람들은 비행기를 더 무서워한다. 광우병에 걸린 것이 확인된 소를 먹고 인간이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종간 장벽, 사망자수를 고려한 계산 결과 수 천만분의 일 정도이다. 만약 광우병이 확인된 소가 아니고 임의의 미국산 쇠고기를 먹었을 때는 이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일본의 한 과학자는 그 확률이 40억분의 1이라고 계산했다. 이는 골프에서 홀인원을 하고 환호하다가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과 유사하다. 이러한 수치들을 앞세워서 정부는 우리 국민이 ‘과학에 무지하며 이성은 실종되고 괴담과 선동에 속는 이들’의 하나라고 보았다. 그러나 수많은 국민들이 광화문에 모여 촛불집회를 했으며, 이를 무지하다고 보는 사람보다는 정당하다고 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위험에 대한 체감을 줄이는 데는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한데, 정부는 전근대적 과학 개념을 앞세워 대화의 의지는 상실하고 신뢰 구축을 위한 대화는 중단한 채, 국민의 총체적 공포를 무지와 선동의 결과로 몰아갔다. 게다가 광우병에 만약 걸린다면 이는 나의 문제일 뿐 아니라 후손들과 가족들의 문제이며, 유통과정에 대해 불투명한 상태에서 공포는 커져만 갔던 것이다. 수치를 앞세워 국민을 가르치려고만 하니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었다. 40억분의 1의 확률이지만 위험하다고 동의하는 데는 남녀구분이 없었다. 미국이나 영국 등의 ‘위험과학’ 선진국들은 위험 연구 전문가들은 위험 확률 계산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위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신뢰 구축과 대화 의지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험은 기본적으로 확률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다.

 

‘과학적’으로 강남역 사건 바라보기

이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강남역 사건을 바라보자. 위험을 체감하는 정도가, ‘자발성’, ‘위험 원인에 대해 모르는 정도’, ‘피해의 끔찍함’, ‘노출된 잠정적 피해자의 수’에 비례한다는 사실은 앞서 이미 기술했다. 실제로 강남역에서 여성혐오자에 의해 피살될 확률이 얼마인지는 중요치 않다. 지금껏 여성들이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위험체감이 덜했던 이유는 조심하는 방식으로 ‘자발적’으로 예방이 가능하며 ‘위험 원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짧은 옷, 골목길, 직업 등), ‘술집여자나 몇몇 특수한 대상만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수없이 기술했듯이, 이번 사건은 이 모든 연약한 가정을 보기 좋게 폐기했다. 내가 조심해도 피할 수 없고 무엇이 피의자를 자극했는지, 장소가 문제였는지 그 위험 원인도 알 수 없으며, 범죄의 결과 피해자는 ‘사망’했으며, 잠정적 피해자는 5천만 인구의 절반이 넘는 ‘여성 전체’인 범죄가 ‘얼마의 작은 확률이든 간에 일어날 수 있음을 확인’ 했다. 위험을 최대로 느끼기에 ‘과학적으로’ 너무나 완벽한 조건이 모두 갖춰진 것이다. 게다가 광우병 사태와도 유사하게, 잠정적 피해의 위협을 느끼는 여성들이, 대화를 원하는 당사자인 다수 남성들은 대화의 의지가 없으며, 여성들의 공포가 광우병을 무서워하는 국민이 그랬던 것처럼 ‘무지와 선동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에 관해서도 우리사회는 완벽하게 위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 것이다.
 
남성우월주의의 현주소  

‘여성 혐오’까지 발전을 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우리사회에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것은 의심의 가치조차 없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여성의 경제활동비율이 증가하고, 여성에 대한 처우와 인식이 많이 개선되어 역차별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이니,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 누가 우리 사회에는 남성우월주의가 없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이라는 통계청 공식 통계자료를 보면, 강력범죄의 피해자의 80%는 여성이고, 여성의 11.2%만이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대답했으며, 일반직 4급 이상 국가공무원 중 여성 공무원의 비율은 7.3%이다. 최근 한 누리꾼이 “UNODC 통계에 따르면 한국 강력범죄의 피해자의 49%가 남성”이라며 ‘여성과 남성의 강력범죄 피해자 비율이 큰 차이가 없어서’ 한국여성들이 느끼는 사회적 위험은 비과학적인데다가 무지의 소산이라고 주장했지만, 같은 통계의 OECD 회원국 강력범죄의 여성피해자 비율의 평균은 21%였으며, 대한민국은 통계대상국 34개국 중 1위였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성범죄에 대한 자발적 신고율이 매우 낮은 국가임을 고려하면, 실제 피해자 중 여성의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최근 섬마을 여교사 윤간 사건이 발생했지만 대부분의 섬 주민들의 반응은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였고, 지역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려했다. 동기를 성추행하여 퇴학당한 학생이 타명문 의대에 버젓이 입학해서 동기들을 가르쳐주며 잘 지내는 모습, 입학취소를 하지 않는 학교당국, 지식의 전당인 대학의 축제에서 신입생 여학생들이 선배들을 찾아서 술을 따르고 ‘화대’를 받거나 높은 선배일수록 예쁜 여학생을 옆에 앉혀주는 문화, 대기업 면접에서 버젓이 “여자가 다리가 그렇게 두꺼워서 쓰겠어?”라고 물으며, 이것이 언론에 보도가 되어도 크게 조명되지 않고, 8살 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해도 12년만 감옥에서 참으면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는 풍토를 볼 때, 우리사회는 경제적 수준이 비슷한 국제국 평균에 비견해도 아주 심각한 수준의 공기와도 같은 남녀차별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토론과 교육의 부재에 관하여

우리는 교과서에서 ‘여성은 사회적 약자다’라는 문구를 수도 없이 보았다. 그러나 교과서에 ‘여성은 사회적 약자다’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현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교과서를 보기 전에 이미 체득했기 때문에 자명한 명제를 보듯 지나친 것이다. 여성은 생물학적 약자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약자가 사회적 약자로 귀결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약자가 사회적 약자가 되는 세계를 ‘정글’이라고 한다. 가장 인간과 가까운 유인원들조차도 힘으로 알파수컷을 가린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야생성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합리적 사고로 야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회적 시스템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왔고, 반대로 그런 특성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은 인식에서 기초한다는 점에서, 공감의 부재는 교육 부재의 문제이다. 현 교육제도에서 학교는 학생 한 명이 한 사회인으로서,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는다.(명백히도 이는 후천적인 것이다) 우리사회의 차별은 어떤 것이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는다. 토론문화가 부재한 우리나라에서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곧 지는 것이다. 정신질환자의 범죄를 바탕으로 일반남성을 모두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여성입장에서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정신질환자인지 정상인인지 알 방법이 없는 만큼, ‘나는 불안해 왔고, 지금 불안하다.’라는 의사를 남성 개개인이 모여 형성한 ‘남성집단’이라는 사회적 유기체에게 표출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그것을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닌, 집단에 대한 요구로 건강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진정으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사는 나라이다. 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옆 집 여자가 나를 범죄자 취급한다면 정당하게 화를 내야 한다. 내 개인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의 여성집단이 불특정 다수의 남성집단에게 불안을 호소한다면 함께 고민해야한다. 타인의 인권이 잘 보장되는 나라가, 내 인권이 잘 보장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집단’은 유기체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일단 형성되면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특성과는 다른 특성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사건을 ‘묻지마’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의 절대 다수도 ‘내 엄마’ ‘내 부인’ ‘내 딸’의 안전을 걱정한다. 무고한 남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고 있다’는 취급을 받는 여성들의 절대 다수도, ‘내 아빠’, ‘내 남동생’ ‘내 아들’을 의심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 간의 문제와, 개인 간의 문제를 명확히 구별해서 ‘집단에 대한 항의를 개인에 대한 항의로, 혹은 역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꽤나 명백히 교육의 문제일 것이다.

 

어떻게 고쳐야 할까

예과 1학년 시절 성교육을 받았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성교육을 들을 때마다 뭔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주로 강사들이 남성을 ‘성욕을 참지 못하는’ 원시적이고 덜 이성적인 ‘유전적으로 설계된 가해자’라는 식의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예과 1학년 때 받은 성교육은 부족하기는 했지만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다. “성폭행은 남성이 꼭 가해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남녀에 관계없이  사회적 지위와 권력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참지 못할 성욕 같은 생물학적 원인 때문이 아니다”라고 알려준 것이다. 흥미가 생겨 개인적으로 사례를 찾아보니, 대기업 여부장이 부하 남직원을 성폭행한 사례도 더러 있었고, 노예제 폐지 이전 미국에서 백인여성이 흑인남성을 강간한 사건도 많았다. 주목할만한 점은 그러다가 적발되었을 경우, 퇴직한 것은 부하 남직원이었으며, 하퍼 리의 소설의 <앵무새 죽이기>의 소재가 되기도 한 백인여성의 흑인남성 강간 사건에서는 판사 만장일치로 흑인남성에 대한 사형이 선고되었고 여성은 풀려났다는 점이다.
인간은 길어야 100년을 살기에, 자기가 사는 시대의 특징이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으로 봐서는 남성우월주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며 앞으로도 그러할 불치병인 것 같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보면 남성우월주의가 ‘처음’ 생겨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만 2천년 전,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인류는 보통 근대의 남성 역사가들에 의해 ‘위대한 사냥꾼’으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남성들의 사냥은 1~2달에 한 번 꼴이었고, 여성들이 채집해오는 식물들과 버섯이 주식이었다. ‘경제권’을 가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남성우월주의에 의한 여성차별은커녕, 남성은 자기 자녀에 대한 친권이 없는 등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남성차별’이 많았다. 그러다가 농업 혁명이 일어나고, 농업을 위한 노동력이 생계의 핵심 요소가 되면서, 남성에게 경제권이 넘어왔고, 여성은 집을 지키고 아이를 낳아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로 지위가 강등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단적으로, 많은 이분적 집단 간의 분쟁, 대표적으로 남녀 간의 분쟁이 생물학적, 유전적인 요소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분배, 교육의 불균형, 소득의 격차)에서 오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연한 요소 (농업에는 육체적 힘이 중요하다는)로 인해 일단 차별이 생성되면,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집단은 자신의 우위가 근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인종논란이 그랬고, 신분논란이 그랬고, 남녀문제도 그렇다. 그것을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연에서 기인한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종과 신분문제는, 상공업의 발달과 유전학의 발달로, 흑인-백인, 귀족-천민이 생물학적인 차이가 전혀 없으며, 다른 우연한 계기로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는 불완전 우열관계라는 것이 인식되어지면서 개선되기 시작했다. 필자는 강남역 사건이 발로가 되어 터져나온 (계기는 대개 분출의 내용물과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한열 열사 이전에도 많은 학생운동가가 죽었지만, 최루탄을 맞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일반시민들의 공감을 얻기 시작했고 그것이 전국적 민주항쟁의 계기가 되었듯이) 한국 사회의 남녀차별, 남혐, 여혐의 문제도 동일하다고 본다. 개선에는 쌍방의 노력이 모두 필요한 만큼 여성 측에서도 ‘한국 남자란 쯧쯧’ 이런 식의 ‘사회적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어서 개인이 바꿀 수 없는 부분을 비판하는 소모적인 비판보다(한국 남자인 것을 이민 말고 어떻게 바꾸겠는가),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끼리의 실사구시적인 토론을 제기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현재 사회적 강자라고 볼 수 있는 남성들은, 개개인의 인격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집단 간의 토론에 적극 임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위험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신뢰 구축과 대화 의지이다. 남성들은 ‘내가 잘못한 거 아닌데’라는 자세가 아닌, 함께 더불어 사는 수많은 여성들이 받고 있는 차별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개선의 노력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우리사회가 민주사회이기를 바라고, 나의 인권이 보장받기를 바란다면 더 이상은 타인의 문제를 묵인하지 말고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공론화된 이후, 유사 범죄에 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19일에는 일면부지의 20대 여성의 눈을 찌르고 달아난 사건이 보도되었고,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SNS에서는 편의점에 들어선 여고생을 일면식이 없는 남성이 무차별 폭행하는 장면이나, 엘리베이터에서 20살 여대생을 벽돌로 머리를 가격한 16세 남학생이 담긴 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그러한 유형의 범죄들이 17일을 기점으로 갑자기 많이 생겼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입장일 것이다. 그간 주위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몰랐거나, 알면서도 묵인했기에 이슈화되지 않았는데, 강남역 살인사건을 분수령으로 관련 사건들에 대한 언론과 누리꾼들이 추적에 나선 결과로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개선의 첫 걸음은 인식인 만큼, 이러한 문제를 수면 위로 노출시키는 것이 개선의 제 1과제가 될 것이다.        
 
종합검진의 중요성에 대하여

위에서 충분히 언급했듯이, 추모현장에 나온 여자들은 피해망상에 젖은 메갈리아 회원 등의 소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추모현장에 나왔거나 이 사람이 묻지마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모두 일베 회원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비논리적일 것이다. 이번 사건과 여성혐오의 논리적 인과관계, 혹은 상관관계의 여부를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음은 이미 지적했다. 나무만 바라보며 걷노라면 숲에 갇히게 되는 법이다.
이 사건은 하나의 발로였을 뿐, 이제는 시대의 흐름상 넘칠 때가 되어서 넘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열이 난다는 증상만으로 다른 검사 없이 감기라고 진단하고 해열제만 준다면 우리는 그를 무지한 의사라고 하거나, 의사일 자격이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사회는 오늘날 심각한 기저질환으로 인해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사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는 아이러니 하게도 사회구성원 그 자신뿐이다. 이번 사건을 단순히 표면적 증상만 관찰하고 단순히 치부하여, 저변의 문제들에 대한 종합검진 없이 방치하거나 해열제만 준다면, 치료의 기회를 놓치고 숙주의 희생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숙주는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이장원 기자/중앙
<wonwon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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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그 이후

111호/의대의대생 2016. 7. 11. 16:11 Posted by mednews

강남역 살인사건, 그 이후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주점 종업원인 피의자 김 씨는 강남역 인근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불특정 여성을 주방용 식칼로 찔러 살해했다. 사건 초기에는 여성 혐오 살인으로 초점이 맞춰졌지만 사건 발생 이틀 후 서울서초경찰서는 “김 씨의 과거 기록과 경험을 기초로 하여 판단할 때 심각한 수준의 조현병을 앓고 있는 만큼 이번 범행의 동기가 여성 혐오 살인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후 실시된 프로파일러의 심리분석 결과, 김 씨는 부모와 대화가 거의 없이 단절된 생활을 하였으며 청소년기부터 이상행동과 대인기피증 등의 증세를 보여 병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2년 전부터 여성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구체적인 사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피해를 받았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피해망상으로 말미암아 2008년 병원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고 정신과에 입원해 치료받았지만 1년 이상 씻지 않고 최근에는 노숙생활을 하는 등 기본적인 자기관리 기능이 손상된 상태였다. 하지만 김 씨는 자신의 정신 질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2016년 1월 초 퇴원 이후 약물 복용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범행 당시 망상이 상당히 심해진 상태로 추정된다.
조현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사실이 아닌 것을 확신을 가지고 믿는 망상과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감각을 경험하는 환각이다. 조현병은 조기 치료 시 별다른 장애 없이 사회로 복귀가 가능하지만, 치료를 중단해서 재발한 경우 치료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 지난 2월 보건복지부는  ‘정신 질환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자료를 통해 “조현병 환자들은 범죄와 폭력의 위험성이 매우 낮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자료는 “일부 충동성이 조절되지 않으면 자해 및 타해 위험성을 보일 경우가 있지만 이마저도 타해 위험성이 자해 위험성의 100분의 1 수준”이라고도 강조했다. 조현병과 극단적 폭력 간의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자칫 조현병 환자들에게 부당한 낙인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이번 범죄가 ‘정신 질환’의 문제로 치부되는 것에 대한 우려의 여지가 있다.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제기된 여성혐오에 대해서 JTBC ‘썰전’의 유시민 작가와 서천석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는 “정신병에도 맥락이 있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는 많은 조현병 환자들이 중앙정보부가 자신을 미행하고 도청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8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면서 CIA가, 2000년대 이후에는 삼성의 지배력이 커지면서 삼성이 소재가 되었다.”라고 언급하였다. 피의자의 정신 질환 역시 개인의 정신 질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고‘여성 혐오’라는 시대적 맥락 안에서 사건을 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언론은 범죄의 원인이 조현병인가 여성 혐오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어느 누구도 피의자 심리분석 결과 발표 전문에 나타난 김 씨의 성장배경 및 생활환경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 사건발생 후 나온 대책이라고는 조현병 환자 격리를 주장하고, 여성 혐오 현상을 비판하며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조악한 화장실을 고치라고 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한 사람을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해결을 위한 근본적이고 바람직한 목소리가 나와야 할 때이다.

 

 

서예진 기자/성균관
<jasminalex@naver.com>

의대생 봉사캠프를 가다

111호/의대의대생 2016. 7. 11. 16:02 Posted by mednews

의대생 봉사캠프를 가다

- 의대협 기획국장과의 인터뷰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이하 의대협, 회장 박단)가 주최하고 한국인체조직기증지원본부(이하 KOST, 이사장 서종환)가 후원하는 ‘의대생 봉사캠프’가 5월 14일부터 1박 2일의 일정으로 여주 라파엘의 집에서 개최됐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한 의대생 봉사캠프는 의대협의 대표적인 행사 중 하나로서 의대생이 주체가 되어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활동을 했다.   
캠프에 참여한 의대생 100명은 시각장애를 비롯하여 발달·지적·지체·청각·언어장애 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라파엘의 집 시각중복장애인들을 위해 식사와 세면을 도와주고 산책을 함께 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시각장애인체험’, ‘점자 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장애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캠프에 참가한 참가자로서 봉사 캠프를 기획한 서강현 기획국장(한림대학교 본과 3학년)과 의대생 봉사캠프를 기획하는 과정과 의대생으로서 봉사와 장애에 대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Q. 어떤 취지에서 봉사 캠프를 기획하게 되었나?
A. 의대협 봉사캠프는 의대생들이 예비 의료인으로서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단순하게 병의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치유까지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게 하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Q. 봉사캠프를 진행한 여주 라파엘의 집은 어떤 곳인가?
A. 여주 라파엘의 집은 국내 최초로 시각장애와 함께 지적장애, 발달장애, 지체장애, 청각 언어장애 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시각 중복 장애인들만을 위한 보금자리로 만들어진 곳이다. 1991년에 여주에 지어진 이후 지금까지 발전해 왔으며 현재 본관과 별관을 통틀어 약 150여명의 중복 장애인들과 90여명의 직원들이 서로 어울려 지내고 있다.
시설 내부에는 성당, 학교 등 중복장애인들이 교육받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으며 소속 밴드인 라파엘 밴드 또한 활동하고 있다.   
Q. 봉사캠프 이전에도 비슷한 종류의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전에는 의대생이 아니라 일반 학생으로 참가하였다. 의대생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참가하는 봉사활동이었는데 의대생에게 장애의 의미는 좀 남다른 것 같다. 의대생에게 장애란 어떤 의미인가?
A. 의대생들은 장차 의사가 되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을 환자로서 처음 대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환자는 약자의 입장에서 의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만큼 장애를 가진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며 그들의 편에 서서 도와야 한다.

Q. 참가자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던 의견 중 하나가 ‘봉사 캠프를 왔는데 오히려 봉사보다는 체험을 많이 하고 간 것 같다.’라는 의견이었다. 생각했던 만큼 봉사를 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A. 우리 주변에 환경 미화를 하는 사람이 없으면 많은 불편함을 느끼듯이 환경 미화와 같이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을 청소하는 일은 정말 필요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직업재활센터에서 진행된 활동도 평소 우리가 생각 없이 사용하는 물건들이 이런 곳에서 만들어진 물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파엘에 집에서 봉사라는 이름으로 한 모든 활동이 참가자들에게 특별하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만 참가자들이 아쉬워한 부분은 다음 있을 의대협 봉사 행사에서는 개선해나가야 할 것이다.

Q. 봉사 캠프를 기획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A.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참가자분들께서 지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지만 인원수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다 뽑아드리지 못해서 죄송했다. 선발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좋은 취지로 가는 봉사캠프이지만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숙박, 교통, 예산과 같은 현실적인 부분 또한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이상적인 부분과 현실적인 부분 사이에서 조율하는 것이 좀 어려웠다. 전국에 있는 의대생이 모이는 행사이다 보니 장소를 선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서울과 대전에서 모이는 것이 그나마 절충안이었는데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면 죄송하게 생각한다.   

Q. 봉사캠프에 원래 모집했던 100명의 인원보다 훨씬 많은 200여명의 인원이 몰렸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기본적으로 의대에 들어온 사람들 자체가 봉사나 남을 돕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생각한다.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도 의대생들이 봉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앞으로도 의대협 차원에서 봉사활동과 같은 일들을 정기적으로 계획할 예정이다.   
Q. 그러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A. 봉사 활동 중에서 장애인 분들과 산책을 하고 말벗이 되어드리는 활동이 있었다. 할머니와 참가자 분께서 같이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행복해보였다. 같이 장난도 치고 노래도 부르면서 허물없이 친할머니처럼 지내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 봉사자의 입장을 떠나서 서로 순수하게 마음을 나누는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 같다.   

Q. 의대생에게 봉사란? 
A. 의대생들은 의학도로서 배우는 단계로 아직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의료행위를 통해 남을 돕기는 어렵다. 하지만 장차 의사가 되어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의대생에게 봉사는 올바른 의사로서의 삶을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파엘의 집의 경우 현직 의사 분들이 주말에 시간을 내서 진료를 봐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이번 봉사캠프가 많은 의대생들이 장차 의사가 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진료 봉사를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A. 이번 봉사캠프에 많은 관심 가져주고 적극적으로 참가해주어서 고맙다. 단순히 1박 2일 동안 봉사 캠프에 참가했다는 것이 끝이 아니라 봉사캠프의 경험을 평생 기억하여 환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의료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창희 기자/이화
<patty9032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