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광주 비엔날레 <만인보>전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날도 어느새 저만치 물러가고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파란 하늘과 함께 가을이 돌아왔다. 무더운 날씨에 밖으로 나가기도 두려웠던 과거는 접어두고 쾌청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예술의 세계로 꿈같은 일탈을 해보는 건 어떨까.
지금 전라남도 광주에선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광주비엔날레’가 한창이다. 이번 2010 광주비엔날레의 주제어는 바로 <만인보-1000Lives>. 이 주제어는 고은 시인이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투옥생활을 하던 중에 쓴 연작시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4000여개의 시로 구성된 이 작품 속에는 시인이 살아오면서 현실에서건 문학에서건 역사 속에서건 그가 마주쳤던 모든 인물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번 <만인보>전에서는 현대인들이 광적으로 갈구하며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미지, 그 중에서도 특히 인물에 초점을 맞춘 예술작품들이 주제의 맥을 관통하고 있다.
전시회는 비엔날레관, 광주 시립 미술관 그리고 광주 시립 민속 박물관에서 각각 펼쳐지고 있다. 먼저 주전시관인 비엔날레관에서는 5개의 전시실이 따로 또 같이 이미지에 대한 화려한 변주곡을 울리고 있다. 제 1 전시실은 사진을 이용한 여러 가지 시도를 보여주며, 이미지의 재활용 혹은 차용을 통한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고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산야 이베코비츠의 <바리케이드 위에서>(2010)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기존의 도상학적 틀에서 벗어난 초상사진-인물의 눈이 감긴-을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기리고 있다. 또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사진작가 워커 에반스의 대표작들과 신세대 사진작가 셰리 레빈이 똑같은 그 대표작을 다시 찍어 나란히 전시해 놓은 것도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며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제 2 전시실은 실험적인 테크놀로지에 매료된 아티스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들과 환영, 혼돈을 심도 있게 나타내는 드로잉과 콜라주※, 비디오 작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카르슈텐 휠러는 어두운 방안에 적외선 카메라(cctv)와 대형 스크린을 설치했고 제이콥 케세이는 캔버스에 은도금 작업을 했다. 이들은 관람객 스스로가 작품의 주인공이 되게 함으로써 전시관 내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또 아르쿠르 즈미예브스키는 청각 장애인 학생들에게 합창을 시키고 시각 장애인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영상을 찍어 예술계에 큰 논란거리를 낳았는데 이는 과연 이러한 작업들이 창조적인 이미지를 갈구하는 행위를 넘어서 일종의 폭력으로까지 변질되는 것은 아닌가 고찰해보게 한다.
이제 옆 건물로 넘어가 제 3 전시실로 들어가면 전쟁과 압제의 비극적이고 처절한 장면들이 예술로 승화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올해 광주 비엔날레 총 예술 감독을 맡은 마시밀리아노 지오니가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복합적인 이미지’ 라고 말한 바 있는 <뚜얼슬랭 수용소 초상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한다. 1975년부터 약 5년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일어난 끔찍한 대학살의 희생양이 된 이들의 마지막 기록. 이 기록과 예술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작품은 우리에게 증오라는 감정이 얼마나 허공에 쏜 화살과도 같은 허무하고도 위험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거대한 오브제들과 아카이브※를 연상시키는 작품들로 시각적인 흥미를 돋우는 제 4 전시관은 ‘은유’로서의 이미지를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눈에 관람객의 발길을 이끄는 이데사 헨델레스의 <테디베어 프로젝트>(2002)에서는 테디베어와 관련된 사진 3천 여 장이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따뜻한 노스텔지어로서의 은유로 작용한다. 또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검열을 피해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헤르만 글뢰크너는 언젠가는 큰 오브제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작고 보잘 것 없는 재료들로 아쌍블라주※를 제작했다. 하얀 테이블 위에 전시된 그 작은 오브제들이 내뿜는 아우라에는 그 시절에 어떠한 압제에도 꺼지지 않았던 작가의 열정이 그대로 담겨있다.
저우 샤오 후의 기발한 비디오 아트가 상영되고 있는 제 5전시관까지 관람을 다 했다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생각이 트이고 눈이 뜨이는 창작물들의 향연이 막을 내린 것에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아쉬워하기 전에 비엔날레관에서 도보 5분 거리에 광주 시립 미술관과 광주 시립 민속 박물관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 보자. 광주 시립 미술관에서는 그동안 쉬이 접할 수 없었던 앤디워홀이 모아둔 잡동사니와 기념품들을 볼 수 있고 사진을 좋아하는 이라면 관심 있게 볼만한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의 1000장에 달하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디저트’라는 컨셉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기발한 전시회도 마련되어 있다.
아직도 예술을 그저 감상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야 있을까 만은 이번 2010 광주 비엔날레에서도 관람객은 직접 예술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도 있고 그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술이 될 수 도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신발을 벗고 거대한 방수천 속으로 기어 들어가 대형 사진을 보며 사진 속 인물과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고 셀프 포토샷을 찍은 후 전시실 벽에 걸어 관람객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작품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다. 또한 광주 지역 대학생 예술인 창작집단 ‘잉여인간 프로젝트’가 무료로 그려주는 초상화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쏠쏠한 재미까지 있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책상에 앉아 똑같은 책을 보며 똑같은 지식을 흡수하고... 사실 어찌 보면 우리는 참 비인간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일상 속에서도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달콤한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그 디저트 속에는 우리와는 조금 다른 시공간에서 세상속의 질서와 혼돈에 항거하고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의 활화산과도 같은 혼이 녹아있다. 그 맛은 깊고 진하여 길을 걷다가도 문득 생각날 듯한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맛이었다.
+) 2010 광주 비엔날레는 11월 7일까지 광주 비엔날레관에서 열린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참조.
이선민 기자/을지
<god0763@e-mednews.com>
※ 콜라주 : 풀로 붙인다는 뜻으로 1912년경 입체파 화가들이 유화의 한 부분에 신문지나 벽지 등의 인쇄물을 풀로 붙인 기법에서 유래.
※ 아카이브 : 특정 장르에 속하는 정보를 모아둔 일종의 정보창고.
※ 아쌍블라주 : (미술에서) 일상용품 따위를 조합시키는 기법 또는 그러한 작품.
'77호(2010.10.11) > 문화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바의 의사들 (5) | 2010.10.10 |
---|---|
음악으로 환자에게 한 걸음 더 (0) | 2010.10.10 |
세계를 향한 토종 한국 내과학 교과서 (0) | 2010.10.10 |
아름다운 이의 삶을 기억하며 (0) | 2010.10.10 |
의학서의 저자들 : 5회 - 프랑크 네터 (0) | 2010.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