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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슨, 사비스톤, 가이튼... 의대생이라면 누구나 봐야 하는 교과서들의 제목을 장식한 이 분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의대생신문에서는 올 해 6회에 걸쳐 의학교과서의 저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파헤칩니다. 가이톤, 해리슨, 홍창의, 그래이에 이은 다섯 번째 순서는 눈이 호강하는 책 ‘네터 컬렉션’의 저자, 프랑크 네터입니다.

의학계의 미켈란젤로, 프랑크 네터

예술계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다면 의학계에는 프랑크 네터의 네터 컬렉션(The Netter Collec-tion)이 있다. 처음에 시바(CIBA) 컬렉션으로 출판되었다가 판권이 ELISIVER로 넘어가면서 이름이 바뀌었는데, 13권으로 시작했던 컬렉션이 이제는 수십권에 달한다. 또한 온라인 버전, 3D 버전, 스마트폰 어플 등 계속해서 다양한 컨텐츠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의사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환상적인 그림 실력을 갖춘 저자, 프랑크 네터(Frank Netter)에 대해 알아보았다.

미술가 or 의사?

1906년 뉴욕에서 태어난 프랑크 네터(1906-1991)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뉴욕 대에 다닐 때에도 오후에는 만사 다 제쳐두고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에 미술을 배우러 다녔다. 당연히 학교 성적은 점점 곤두박질쳤고 결국 부모님께 미술공부를 하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씀 드릴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미술가라면 그저 방탕한 생활을 해대는 방랑자들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노발대발하시며 의사 같이 존경받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셨다. 하지만 네터는 어떠한 설득도 완강히 뿌리치고 미술가의 길을 선택했다.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꽤 성공적인 상업 미술가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끝까지 모른 체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결국 몇 년 못가서 어머니 소원대로 뉴욕대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입학 후에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남들이 부리나케 필기를 해댈 때 그는 강의내용을 그림으로 쓱싹 스케치하곤 했다. 한 눈에 들어오는 그림 정리가 동기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교수님들께도 알려졌고, 그때부터 강의 자료나 교과서 삽화 일을 도우면서 용돈을 벌기도 했다.
1931년 의과대학 졸업 후, 벨뷰 병원(bellevue)에서 인턴을 수료하고 맨하튼에서 외과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933년, 당시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부수적으로 삽화 알바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림 다섯 폭에 $1500을 요구한 일에 $7500를 받게 되면서 (그림 하나당 $1500으로 쳐준 것이다!) 그때부터 아예 임상의사로서의 직업을 그만두고 전업 의학전문 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술가 and 의사!

1938년 제약회사 시바(CIBA, 1997년 합병되어 현재는 세계 1위 제약회사 노바티스)에 고용되어 회사 홍보용 그림들을 그리게 된다. 첫 작품은 화일을 심장 모양으로 자르고 그 위에 그린 것이었는데, 많은 의사들이 홍보문구를 빼고 제작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다른 장기들에 대한 호응도도 마찬가지였다.
치솟는 인기에 힘입어 13권짜리 시바 컬렉션을 편찬하게 되었다. 총 4,000개가 넘는 그림이 삽입되었으며 인체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조직학 등을 각각 계통 별로 정리되어있다. 의학계의 큰 센세이션이었으며 1988년 뉴욕 타임즈가 ‘전세계 대부분의 해부학 교수들 다 합쳐놓은 것보다 의학교육에 더 많이 기여한 회가’라고 했을 정도로 수많은 기관, 평론가, 독자들에게 칭송받는 책으로 꼽히고 있다.
꼽을 수 없이 많은 표창과 영예 뒤에는 그만큼 쏟아 부은 노력이 있었다. 네터는 심혈을 기울여 시바 컬렉션을 완성하였고 집필 도중에 수많은 전문의들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직접 경험을 통해 얻을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료 수집을 위한 여행도 수없이 다녔다. 1980년 초 세계 최초 심장 이식 수술을 참관하고 그 모든 과정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물론, CT 스캔이나 MRI 같은 첨단 영상의학 자료들도 배제하지 않았다.
이 책의 큰 특징은 환자들의 표정, 안색, 몸짓 등에서 개개인의 인격이 묻어날 정도로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사람의 다양성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고자하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우리가 고장 난 텔레비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환자를 대할 때 하나의 독립적인 사고력 퀴즈로 보지 않고 환자 개인이 겪고 있는 복합적인 어려움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의학의 모든 분야를 다 어우르는 전공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물보다도 사진보다도 더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유져 프렌들리한, 네터 컬렉션이야말로 진정으로 이 시대의 최고 학습서라고 생각한다. 의학이 제아무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나간다 해도 미켈란젤로의 전지창조가 반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랑받듯이 네터가 남긴 4,000여종의 걸작들도 고이고이 만년야마로 내려올 것이다.

문정민 기자/중앙
<moon_jm@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