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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진료 통제” vs “최선의 진료 보장”

올 하반기 의료계를 뜨겁게 달굴 이슈 중 하나는 ‘총액계약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달 29일 하반기 건강보험 수가 협상이 시작되면서 총액계약제 전환 논의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정형근 이사장은 올해 3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2012년까지 총액계약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논의에 불을 지폈고 가입자 단체는 적극 환영, 의료계는 강한 반대 의사를 밝혀왔다. 지난 달 15일 민주당이 총액계약제를 당론으로 채택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 논의가 의료계를 넘어 주요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총액계약제? 행위별수가제?

진료비 지불 방법은 통상적으로 지불단위에 따라 행위별수가제, 포괄수가제, 인두제, 총액예산제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행위별수가제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시행하는 제도로 서비스 항목별로 가격을 매겨서 보상하는 방식이다. 한편 총액계약제는 정부나 보험자와 의료기관이 미리 계약을 통해 일정기간 의료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총액으로 결정한 뒤 이를 의료기관에 보상하는 방식이다. 행위별수가제 하에서 의료제공자는 제공한 모든 서비스에 대해서 지불을 받지만, 총액계약제에서는 환례 수가 증가하거나, 등록 환자수가 늘어나더라도 일정금액밖에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미래에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서 행위별수가제 하에서는 전적으로 보험자가 모든 위험을 떠안게 되지만, 총액예산제는 의료제공자가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이처럼 위험 부담의 주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의료제공자는 행위별수가제를, 반대로 보험자는 총액예산제를 선호하게 된다.

왜, 지금, 총액계약제인가?

건강보험공단은 올해 1~8월 건강보험 재정수지가 2965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보고했다. 재정 불안은 곧 건강보험 체제 자체를 흔들 수 있고, 보장성 약화로 이어져 의료 안전망을 취약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이에 전문가들은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를 위해 국고 지원 확대, 건강보험료 인상 등의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현행 지불 제도의의 개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행위별 수가제 하에서는 의료 공급자가 소득 증가를 위해 불필요한 검사를 하거나 외래 방문 횟수를 늘리는 등 의료서비스를 과잉 공급하거나, 비급여 의료서비스의 제공량을 늘리려는 강력한 유인이 존재한다. 또 치료 효과가 높은 의료서비스보다는 높은 이윤을 보장하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경제적 유인을 가지게 되고, 이는 나아가 진료과목별 의사 수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의사들의 전문 과목 선택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현행 지불제도를 개편하여 과잉진료와 비급여 진료 팽창이 해소되면 의료비가 적정화되고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 또한 확보되어, 급여 수가 인상과 급여 범위 확대도 꾀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불제도 개편으로 공급자의 적정 수가 보장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의료계 ‘절대 불가’

한편 의료계는 이번 사안에 대해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총액계약제는 비용절감의 유인을 가지기 때문에 의사가 최소한의 처방만 하게 하여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행위별수가제와 달리 총액계약제 하에서는 첨단 의학기술을 도입하려는 동기가 저하되기 때문에 의학 발전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건보 정형근 이사장은 다양한 인센티브와 모니터링을 하면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독일 등의 사례를 보면 의료 서비스 질이 저하됐다는 연구는 없다’고 밝혔지만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지불제도 개편과 함께 지불 수준(수가) 향상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의료 서비스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 의료계는 특히 원가보전률이 90%에도 못 미치도록 책정되어 있는 불합리한 수가 체계를 개선하지 않은 채 총액계약제를 논의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개원가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라며 이번 총액계약제 논의에 대해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정책’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한편 일부 공급자 측은 총액계약제 논의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지불제도 개편 이전에 의료전달체계 확립, 보험료의 적정수준 인상, 국고보조 확대 등을 우선 해결할 것을 주문했다.

외국의 사례는?

행위별 수가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독일의 경우 의원급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총액계약제를, 병원급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포괄수가제를 적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도 행위별수가제와 총액예산제를 병용, 미국 역시 행위별수가제와 포괄수가제를 병용한다.
아시아 국가 중 총액계약제를 적용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대만이다. 대만은 1995년 전국민 건강보험 제도를 실시하면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행위별수가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재정 적자가 심각해지면서 총액계약제를 도입했고 재정 안정성을 확보했다. 현재 대만의 건보 보장률은 85%, 국민의 의료 이용 만족도는 80%에 이른다. 현재 우리나라 건보공단은 이런 대만의 성공 사례를 총액계약제 추진의 모델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성공 뒤에는 의료 공급자들의 희생이 강요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총액계약제가 도입되는 과정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공급자 단체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다. 대만의 사회적 합의가 반쪽짜리 사회적 합의였다는 비난을 받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함께 맺는 합의 계약제로

총액계약제 문제로 보험자와 가입자, 그리고 공급자는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첨예한 의견차를 드러내 논의가 앞으로도 난항을 계속할 것임을 시사했다. 하지만 수가를 정상화 하는 동시에 합리적인 지불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서로 간 합의점을 찾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있다. 서울대 이진석 교수는 건강보험 가입자 포럼에서 "건강보험제도를 구성하는 이해당사자간 힘의 관계가 맞선 상태에서 일방의 주장만을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현재 제도 유지를 답습만 하게 된다"며 합의를 통해 접점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전진한 기자/대구가톨릭
<redpill@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