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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경의 역사

77호(2010.10.11)/문화생활 2010. 10. 10. 21:39 Posted by mednews

응급의학에는 ‘ABC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응급환자의 생명 유지를 위해 기본적으로 행해야 하는 응급조치를 뜻하는 말로 각각 Airway(기도확보), Breathing(호흡유지), Circulation(혈액순환)을 일컫는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A, 바로 기도폐쇄 여부를 확인하고 교정하는 과정이다.
일단 환자의 목을 뒤로 젖히고 입안에 분비물이 있으면 제거한 후 자발호흡 여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호흡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면 기도를 확실히 유지하기 위해 ‘기관내삽관’을 시행한다. 후두경으로 혀를 옆으로 밀어내고 성대 사이로 튜브를 집어넣는 이 간단한 행위를 통해 환자는 충분한 양의 산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모두 후두경이 상용화되기 시작한 1940년대 이후의 이야기다.
그럼 그 전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몇 세기 동안은 기관절개술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기관절개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3600년경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길다. 하지만 소독하지 않은 수술기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이 매우 심각했다. 가로로 절개하다가 목동맥이 파열돼 죽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의 기관절개술과 비슷한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해 낸 사람은 16세기 말 해부학자이자 외과의사인 파브리우스였다. 그는 세로로 절개한 후 튜브를 꽂아 기도를 유지하는 방법을 제안했고, 이후 기관절개술은 발전을 거듭해 두부외상이나 종양으로 인한 심각한 기도폐쇄와 장기간 기계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중환자에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기도유지가 필요한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너무도 침습적이고 위험성이 컸다.
19세기 프랑스 소아과 의사 부샤는 디프테리아성 위막염으로 후두폐쇄가 온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작은 금속튜브에 실을 매달아 성문에 집어 넣는 방법을 썼다. 몇몇 외과의사들은 클로로포름으로 전신마취를 할 때 기도유지를 위해 구강을 통해 삽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대를 보기 위해 거울 두 개로 빛을 이리저리 반사시키는 원시적인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기관내삽관이 보편적으로 이용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모든 불편과 수고를 덜어준 사람은 독일의사 키르스타인이였다. 키르스타인 이전의 의사들은 바깥쪽에서 성대를 본다는 것은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키르스타인은 어느날 동료 의사 하나가 환자에게 식도경을 삽입하는 도중에 우연히 식도경이 후두를 통해 기관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후두경 검사법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윽고 그는 식도경을 변형시킨 기구를 만들어 한번에 성대를 보는 데 성공했다.
사실 그가 만든 최초의 기구는 현대적 관점에선 매우 조악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기구의 사용이 빈번해지고 또 그 모양이 실용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부상당한 병사를 수술할 때에 기도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두경’이라 이름 붙여진 이 기구는 이후 날 끝에 전구를 달고 자루에 건전지가 들어가고 부드럽게 휜 날 모양을 택하면서 점차 현재의 형태를 획득했고, 유용성은 나날이 높아지게 되었다.
현재 가장 널리 이용되는 후두경은 곡선형 날의 매킨토시 타입이다. 이보다 전에 개발된 직선형 날의 밀러 타입은 주로 소아에 사용되고 있다.
오늘 날에는 Fibrelight mccoy laryngoscope 등 여러 종류의 후두경들이 많이 개발되어 마취 및 호흡관리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정다솔 기자/중앙
<astronova@e-mednews.com>

‘꿈나라’를 보다

77호(2010.10.11)/문화생활 2010. 10. 10. 21:38 Posted by mednews

“제 이름은 Chris이고, 이것은 제 직업이며,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 까지, 현지인도 관광객도, 관중들은 모두 힘껏 박수를 보냈다. “굳이 돈을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 쇼를 재미있게 보신 분이라면 저한테 ‘Thank You'라고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것이 제가 이 일을 하는 기쁨입니다.” 허리 숙여 인사하는 그를 향해, 관중들은 몰려들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미소, 그의 입가에 있었다.
런던의 한 광장에서 본 풍경이었다. 우스꽝스런 차림을 한 남자가 관객들을 불러 모으더니, 말재주와 신기한 묘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관객을 끌어내어 놀리기도 했고, 3미터 높이의 외발자전거 위에서 칼 3자루를 저글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실 유럽에서는 이러한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인터라켄의 조그만 시내에서도 로마의 커다란 광장에서도, 스프레이로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도 특이한 가면 춤을 추는 그룹까지, 참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광장뿐만이 아니었다. 뮌헨의 길거리엔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렸고, 샹젤리제 거리의 비보이들은 관객들의 춤 본능을 자극했다. 그런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내 이름은 무엇이고, 이것은 내 직업이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그 행복했던 유럽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의 일이다. 나는 운 좋게 괜찮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들어간 대가로, 매년 가을마다 입시 문의 전화에 시달린다. 학교나 학원의 선생님만큼이나, ‘현장경험’이 있는 학생의 말도 중요시 하는 것이다. 우리 애가 지금 성적이 이런데 이 대학에 지원하는게 어떻겠느냐, 대개 이런 내용이다. 나도 막막하고 답답한 입시생의 마음을 겪어 보았기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려 하지만, 항상 상담 후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유럽에서 받은 충격이 컸던지라, 사실 진짜 말하고 싶은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글쎄요, 아무리 A대학이 명문대학이긴 하지만, 지금 지원하려는 B과가 학생 적성과 별로 맞지 않다면 좋은 선택 같아보이진 않습니다. 저는 유럽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 나가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들의 입가에 얼마나 행복한 미소가 가득한지 보셨다면, 아마 제 의견에 동의하실 겁니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아마 며칠 만에 온갖 소문이 다 나겠지. ‘웬 X라이 대학생한테 전화를 했었다.’는 내용, 혹은 ‘자기는 대학 좀 갔다고 허세나 부리는 이기적인 대학생’ 정도의 평가를 받지 않을까. 그리고 꼭 그런 평가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도 그렇게 대답해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너무 ‘꿈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럽에서 본 자유로운 영혼들이 더욱 더 떠올랐다. 행복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 어떻게 그런 ‘꿈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내가 유럽여행을 간 것이 아니라 혼자 꿈을 꾼 걸까. 한국 사람들이 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소신껏 하며 행복하게 산다는 건 그저 꿈일 뿐인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에 보면 “천국에 대한 꿈보다 더 아름다운 꿈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그보다 더 헛된 꿈이 뭐가 있겠습니까?”라는 말이 나온다. 어쩌면 내가 꿈꾸는 그런 사회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허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같이 여행을 갔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있지, 저런 사람들은 광장 내 자리 선정은 어떻게 할까? 좋은 시간대나 장소를 가지고 싸우지는 않을까? 아니면 누군가 개입을 하는 걸까? 영화에 보면, 포장마차 자리를 두고 불량배들에게 자릿세를 주곤 하잖아.”
그 말을 듣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꿈 속에서도 현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이 ‘이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라고 강하게 밝히는 내면에는 스스로 확신이 부족해 그러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껏 웃다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완전히 꿈같은 세계는 없지.’
하지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내 앨범에는 유럽행 비행기 티켓이 간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유럽에서 본 세상은 꿈이 아니었다. 또한, 그 세상이 완전히 ‘꿈같은 세상’은 아니더라도, 여기 보다 더 꿈에 가까워 보였다.
1950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쟁을 보고 “이 도시를 복구하는 데에는 최소 100년이 걸릴 것이다.”라 했다. 우리는 세계가 감탄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한국에는 아직 복구되지 않은 이면이 남아있는게 아닐까. 원하는 일을 하며 살지 못하여 슬픈 영혼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쁘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본다. 아직 60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40년 이상이 남지 않았는가.
 아직 먼 미래지만, 나는 2050년 대한민국을 기대한다. 아니, 나는 2050년 대한민국을 꿈꾼다.

정세용 기자/연세
<avantgarde91@e-mednews.com>

경제심리학, 사회생물학 - 한번쯤은 갸우뚱 하게 되는 단어들입니다. 경제와 심리, 사회와 생물이라니. 하지만 이들은 뒤에 ‘학’자가 붙은, 엄연한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경제 심리학은 경제생활을 중심으로 인간의 생활 형태나 태도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사회생물학은 집단유전학과 개체군생태학을 통합한 현대적인 자연선택이론을 기반으로 동물의 사회행동이나 사회현상을 ‘유전적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겉보기엔 어색한 조합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잘 어울리지요. 요즘은 이런 ‘통합’이 대세입니다. 학문의 세 갈래 -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 내에서의 통합은 물론, 각 분과 간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통섭’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쌓아온 모든 지식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고, 이를 알기 위해 학문 간 교류와 통합을 역설했습니다. 통합이 이뤄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윌슨은 통섭을 가장 적절한 모델로 제시합니다. ‘통섭’에는 그가 생각하는 통합의 모습이 드러나 있지요. 이번 스터디에서는 윌슨의 통섭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섭 : 인간을 이해하는 통로

통섭은 19세기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휴얼에 의해 처음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그는 통섭을 ‘jumping together’, 즉 ‘더불어 넘다든다’로 정의했습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서로 다른 현상으로부터 도출되는 원리들이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는 학문의 성장을 강에 비유하여, 작은 지류가 모여 큰 강의 줄기를 이루듯 학문의 여러 갈래가 서로 합쳐져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휴얼의 통섭은 ‘융합적 통섭’입니다. 이는 윌슨의 통섭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하나로 합쳐진 강줄기 속에는 각각의 냇물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윌슨의 통섭에서는 여러 학문이 각자의 형상을 유지하며 그들 모두에게 통용되는 어떤 ‘진리’를 공유합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각 학문은 엄격히 분리되거나 하나로 뭉뚱그려진 상태가 아닌,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생동하는 존재가 됩니다. 사실 이와 같은 ‘교류’는 얼마 전 부터 꾸준히 일어나왔습니다. 1970년대 초 인지심리학, 인공지능, 언어학 등이 서로 협력하여 생겨난 인지과학이나, 최근 진화와 발생을 한데 엮어 설명하는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Evo-Devo)의 등장이 그 예입니다. 인지과학이나 이보디보에 몸담고 있다 해서 본래의 학문분야 - 언어학, 인지심리학, 진화학 등 -와 그 분야의 성과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각 분야에서 얻은 지식, 연구기법 등을 적극 활용하여 연구를 수행하고 있지요.  
윌슨의 통섭이 특별한 이유는 그러한 교류의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윌슨은 그 진리를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라고 여겼고, 그런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써 ‘자연과학적 환원주의’를 제시했습니다. 다시말해서 ‘인간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어떤 학문도 견고할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많은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들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이성이나 마음에 관한 논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도맡아 왔었습니다. 하지만 윌슨은 그런 논의 중 상당수가 주관적이고, 확실히 검증되지 못한 것이라고 여겼지요. 예를 들어 경제심리학에서 활용하는 심리학 지식들 - ‘사람들은 ~한 상황에서 ~하는 경향이 있다’ 등 -은 대부분 경험상 ‘그렇다’고 여겨질 뿐, 검증되지 못한 세간의 속설이 대부분입니다. 이에 대해 윌슨은 인간의 정신을 해부학적, 생리학적인 현상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고, 유전적 성향과 그에 따른 주위 환경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얻어낸 정보가 인간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인간의 신경회로 매커니즘이 완전히 밝혀지고 신경회로의 작용양상이 ‘대체로 선한 경향’을 보인다고 판단된다면, 성선설이 옳은 이론이 될 수도 있겠지요. 윌슨은 인간에 관한 ‘머릿속 이론’이 아닌 인간의 객관적인 형태와 구조에 기반한 인간이론은 어느 분야에서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 관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통섭의 화두 : 마음과 문화  

하지만 ‘사람은 눈이 두 개, 코가 한 개, 입이 한 개’ 라는 사실만으로는 인간존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마음을 구성하는 세포적인 사건’을 밝히는 것은 윌슨의 통섭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가령 ‘기쁘다’, ‘슬프다’라는  감정을 느낄 때의 신경회로 매커니즘이 밝혀진다면 뇌의 물리 과정들이 어떻게 주관적인 감정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신경회로 양태를 비교해봄으로써 ‘공감한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의 범위를 좀 더 확장해봅시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윌슨은 ‘유전자-문화 공진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인류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병행해왔으며, 두 진화가 상호작용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입니다. 두 진화는 후성규칙에 의해 매개됩니다. 후성규칙이란 어떤 자극에 민감하고 어떤 기억이 오래가는지,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지를 결정하는 유전적인 성향, 즉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뜻합니다. 문화는 어떤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질 지 결정하는 것을 돕고, 그 결과 살아남은 새로운 유전자는 개체(군)의 후성규칙을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변화된 후성규칙은 다시 개체의 문화적 선택,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문화의 진화가 일어나도록 돕게 되지요. 여기서 ‘문화’의 범주는 연구대상에 따라 가정, 학교, 회사, 지역 또는 국가 등 다양하게 설정될 수 있습니다.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은 ‘마음’ 연구에서 밝혀진 자연과학적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하여 올바르게 추리될 수 있겠지요.

불가피한 ‘가치의 부재’   

9장 사회과학 편에는 의학에 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와 있습니다. 윌슨은 극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학과 그렇지 못한 사회과학을 대비시키면서, 통섭이 잘 이뤄지고 있는 학문의 한 예로써 의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자는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질병을 물리화학적 수준에서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러한 객관적인 정보를 기반으로 과학적인 치료계획을 수립합니다. 확실히 현대의학은 인간탐구에 대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꽤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요.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도 안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현대의학으로 질병의 ‘원인’을 찾을 수는 있지만 ‘무엇이 건강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몸의 상태를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윌슨은 ‘가치’와 관련된 문제들 중 상당수를 관념적인 언쟁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인 자연과학적 사실들을 기준으로 인간과 사회현상을 분석, 정의하려고 시도했지요. 그는 윤리나 종교, 예술도 유전자-문화 공진화에 의해 그 양상을 완벽히 분석하면 향후 그들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예측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측뿐만이 아닙니다. 인간 본성을 논함에 있어 ‘인간이라면 어떠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빠져선 안 되겠지요. 하지만 이 질문을 윌슨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통섭 범위를 넘어선 개념으로 여긴 탓인지 책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학문에 임하는 ‘자세’로서의 통섭

이런 가치관의 문제 이외에도, 윌슨의 통섭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시선은 꽤 많습니다. 이 중에는 통섭의 결과 마음의 세포적 매커니즘이 완전히 밝혀지고 문화현상이 완벽하게 분석되어 인간이 완전히 ‘과학적’으로 인식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테이프를 끊은 통섭의 마지막을 예측하는 것은 이른 감이 없지 않고, 확실치 않은 추측으로 통섭론을 논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혹자는 윌슨이 통섭을 외치면서 ‘더 잘게 쪼개는’ 환원주의를 강조하는 것을 모순이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통섭에서의 환원주의는 기존의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다루던 사회나 인간 정신의 거시적인 현상들을 인간, 혹은 세포 단위로 분석하여 더 객관적인 매커니즘을 추론해보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윌슨이 사용한 ‘환원주의’는 본래의 관념적 의미보다는 ‘“왜” 라는 의문을 갖는 자세’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
‘통섭’의 의의는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 자연과학의 위상을 재조명한 것입니다. 윌슨은 관념적인 논의를 최대한 배재하고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을 통섭의 목표라 여겼습니다. 현재의 통섭개념은 가치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줄 수 없고, 그 끝에 인간이 어떠한 모습으로 남을지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점을 분명히 인식하고서 긍정적인 부분을 수용한다면, 다른 학문에 대한 편견을 줄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윌슨의 통섭이 인간에 관한 학문에 임하는 자세로써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스터디를 마칩니다.

김정화 기자/한림
<eudaimonia89@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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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3일 백범기념관에서…안경환 전 인권위원장 등 특강

신문 청년의사는 오는 23일 오후 3시30분부터 서울 효창동에 위치한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MSD청년슈바이처상 10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한다.
올해로 제정한 지 10년째를 맞이한 'MSD청년슈바이처상'은 한국의료윤리학회와 신문 청년의사가 공동으로 제정하고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장협회와 한국MSD가 공동으로 후원한다.
이 상은 지난 2001년 전인교육을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한 의사를 길러내는 일이나 창조적 연구자를 길러내는 일에는 무기력했던 의과대학의 주입식 교육을 반성하고, 미래의 한국의료를 책임질 의대생 및 전공의들이 전인격적 치료자로 성장할 것을 격려하기 위한 취지로 제정됐다.
이에 따라 신문 청년의사는 MSD청년슈바이처상 제정 10주년을 맞아 한국의 의학교육에 관심이 있는 각계 전문가 및 역대 수상자, 특히 한국의료를 책임질 의대생 및 젊은 의사들을 모시고 10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날 강연에서는 ▲연구자의 삶과 개인의 삶을 조화시키기(서울아산병원 김종성 교수) ▲기부의 즐검움(션, 가수)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등의 특강이 진행된다.
강연회 참가 신청은 온라인(신청 홈페이지 클릭)으로 가능하다. 참가신청 문의는 02-2646-0852.

최성욱 기자/울산
<palpitation@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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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2010.10.11)/문화생활 2010. 10. 10. 21:35 Posted by mednews

트위터 하는 의사들

“요즘 혼인을 보면, 취업처럼 스펙이 중요하더군요. 서로 '완전한 충만'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 막장이 예사롭겠죠. 무턱대고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고루한 세대로서 청년들이 ‘인연’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느 신문에 기고된 유명 작가의 한 마디일까. 아니라면 어느 수필집에 나오는 한 구절일까. 정답은 지난 3일, 시골의사 박경철씨[@chondoc]가 본인의 트위터에 직접 작성한 짤막한 트윗[i]. 포털에 접속하기 무섭게 기사가 튀어나와서 이제는 별로 신기할 것도 없게 되어버린 연예인들의 트위터 사용처럼, 의사들에게도 더 이상 트위터는 이국적인 서비스가 아니다.


요즈음 싸이월드를 모르는 의대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트위터 역시 싸이월드 같은 SNS의 범주에 속한다. SNS란 Social Networking Service의 약자로, 온라인상에서 불특정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서비스를 일컫는다. 이용자들은 SNS를 통해 인맥을 새롭게 쌓거나, 기존 인맥과의 관계를 강화시킨다. 최근 아이폰을 필두로 한 스마트폰 열풍에 힘입어, 가볍고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는 트위터가 인기를 얻고 있는 것. 실제 작년에 비해 올해 국내 트위터 접속자 수는 무려 20배 가량 증가했다고 한다.
트위터 사용자들의 순위를 보여주는 트위터 그레이더에 접속해서 ‘Korea, republic of’을 검색해보면, 랭킹 상위권에 포진해 있는 의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일 현재 20위에 랭크되어 있는 치과의사 류성용[@gnathia]씨는, 트위터하는 기업인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릴 신세계 그룹 정용진 부사장[@yjchung68]보다도 무려 4 계단이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윗 글을 쓴 박경철씨 역시 웬만한 연예인 부럽지 않은 팔로어수를 자랑하고 있다.
의정부성모병원장 김영훈 소아청소년과 교수[@pedkyh], 서울성모병원 순환기 내과 노태호 교수[@DrArrhythmia], 서울아산병원 응급의학과 이재호 교수[@jaeholee2010] 역시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노태호 교수의 경우 트위터를 통해 활발한 의료 상담을 벌이고 있고, 김영훈 교수는 육아당, 아빠당과 같은 트위터 내의 모임을 통해 육아 관련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이재호 교수는 주로 전자의무기록 관련 정보를 트위터 유저들과 나눈다.
의사뿐만 아니라 대형 병원들도 트위터 계정을 통해 환자들에게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가톨릭중앙의료원[@CMCMedicalNews], 서울아산병원[@Asanmedicalnews], 세브란스병원[@iseverance], 한림대 의료원[@HUMC] 등이 트위터에도 둥지를 마련한 상태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환자와 의사의 소통의 장을 마련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자칫하면 지나친 환자 유인과 홍보 활동으로 이어져 의료법에 저촉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 실정이다.

권의종 기자/가톨릭
<isnell@e-mednews.com>

[i] 트윗(tweet) :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를 묘사한 동사. 트위터에서 사용자들이 올리는 짤막한 글을 지칭함)

쿠바의 의사들

77호(2010.10.11)/문화생활 2010. 10. 10. 21:34 Posted by mednews

세계 재난지역에 파견된 의사들, 그 주역에는 쿠바의 의사들이 있다.
국민 1인당 의사비율 최고, 1세미만 영아사망 1000명당 4.8명(미국 6.7명), 국민평균수명 살78.7살(미국 78.4살). 미국을 뛰어넘는 이 기록들의 주인은 쿠바이다.
쿠바는 체게바라와 카스트로가 주도한 혁명으로 1959년 1월 1일 사회주의 국가가 된 나라이다. 혁명당시 쿠바의 의사 6000명 중에 절반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 때 쿠바에는 의과대학 1개가 있었고 교수는 단 16명이었다. 이런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고 선진 의료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쿠바의 의료는 1차 의료를 중심으로 하는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쿠바의 의료는 3단계로 구성된다. 1차 가정의, 2차 지역진료소, 3차 종합병원이 그것이다. 가정의는 약 150가구, 600명을 배정받아 책임지고 돌본다. 오전에는 병원으로 오는 환자를 진료하고 오후에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가정방문을 한다. 가정의 제도는 질병치료중심의 의료에서 질병예방중심의 의료로 중심이 옮겨간 방법이다. 가정의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환경적, 정서적 문제도 파악하고 있으며 질병의 약 80%를 치료한다. 가정의가 감당하지 못하는 나머지 20%는 2차 지역진료소가 감당하며 여기서 감당할 수 없는 질병은 3차 종합병원이 담당한다.

쿠바의 빈틈없는 의료시스템을 누리기 위해 국민들은 한 푼의 돈도 내지 않는다. “모든 국민은 무상의료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들에게 의료를 무료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쿠바헌법 제 50조에 명시된 이 권리는 쿠바 국민의 99%가 골고루 의료해택을 누리게 한다. 특히 쿠바가 영아들에게 무상 제공하는 의료는 인상적이다. 쿠바의 건강한 어린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열네 살까지 총 162회의 의사의 방문 진료 서비스와 무료 예방접종을 받는다. 임산부는 지역산전센터에서 규정상 최소 12회 이상 의료서비스를 받는다. 가난하거나 위험요소가 있는 임산부들은 산전센터에 머물며 영양관리를 받는다. 이 제도는 낮은 영아사망률을 이끌었다.

쿠바가 뛰어난 의료수준을 가진 이유는 제도 때문만은 아니다. 쿠바 의사들의 봉사정신은 높은 의료수준의 또 하나의 기둥이다. 1963년 이후 세계 101개 나라에 10만이 넘는 의사들이 무료 의료봉사에 참여했다. 쿠바의 의사들은 그들의 손길이 필요한 어는 곳이든 나타난다. 2005년 8월 파키스탄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그 어떤 구호단체도 지진의 위험을 감수하고 히말라야 산맥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쿠바의 의사들은 그곳에 병원을 세우고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베네수엘라 빈민촌에도 그들은 있다. 베네수엘라 빈민지역 무상의료운동 ‘바리오 아덴트로’에 참여하는 의사는 대부분 쿠바 의사들이다. 돈이 없어 백내장 수술을 할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 다시 세상을 보여주는 일도 한다. ‘기적의 작전’으로 불리는 이 유명한 프로젝트는 수만의 빈민들에게 시력을 돌려주었다. 또한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무료로 의료교육을 시킨다. 의료 봉사대를 파견하는 것은 그 나라의 자체적인 의료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의사들의 봉사정신은 이런 실적들로 다 표현해 낼 수 없다. “아이의 순수한 미소, 부모의 감사하는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한 쿠바의 의사의 말에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쿠바의 의료수준은 높고 의료 관광국으로의 명성은 두텁다. 이런 높은 의료수준은 근본적으로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이고 국방비의 55%를 삭감해 교육, 의료에 투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의료는 무상의료가 힘든 시스템이고 의사들이 무료봉사를 활발히 하지 않는 것도 사실 사회시스템상의 열약함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쿠바의 의사들은 돈, 편안한 삶,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선택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많은 의사에게 혹은 의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바람직한 의사의 모습을 생각할 기회를 준다.

이현도 기자/연세
<loverboy@e-mednews.com>

국내 최초로 의료진 악단을 창립한 심승철 박사님을 만나다

전국 의과대학에서 의대생들이 가장 많이 기본적으로 가입하게 되는 동아리라 하면 대부분은 오케스트라 동아리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오케스트라 동아리일까? 라고 자문해봤을 때, 클래식 음악이 우리 스스로가 존경받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지덕체(智德體) 중 덕육(德育)을 쌓는데 지대한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고 그저 음악 자체가 좋아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여기 의대생이라는 관문을 넘어 의사의 신분으로도 아직까지 바이올린을 키며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사람이 있다. 그 분은 바로 2004년 국내에선 최초로 의료진으로만 구성된 악단을 결성하신 심승철 박사님(현 대전을지병원 내과과장).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자문의 해답이 의료인으로서 스스로 고심하고 또 다짐해야 할 과제와 함께 눈앞에 제시되었다.    

- 먼저 이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게 된 동기를 알고 싶습니다.
“아, 우선 우리 악단의 경우에 '오케스트라'라는 말은 틀린 것 같네요. 우리는 소규모로 연주를 하기 때문에 ‘챔버(Chamber)’가 더 맞는 말이에요. 그리고 처음에는 분명 의료진으로만 구성된 악단이었지만 요즘은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 약사, 환자 등 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굳이 가릴 것 없이 함께 연주하고 있습니다.
동기라.. 모로코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 줄 아세요?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왼쪽 윗부분에 있는 나라죠. 그 나라가 예전에 사하라의 서쪽 사막을 침략해서 그곳에 사는 소수 부족에게 그들의 영토-사막-을 뺏는 대신 다른 좋은 아파트에 거주하게 해주었죠.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 소수 부족은 더 깨끗하고 쾌적한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 훨씬 좋아할 것 같지 않나요? 하지만 그들은 아파트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황폐한 사막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죠. 마찬가지에요. 우리 대전을지병원이 이 곳(둔산동, 대전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옮겨 새 단장을 한 후 환자들은 새 병원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예전 병원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진 거죠. 또 나는 예전 병원에 있을 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환자의 입장에서는 나란 사람까지 병원 분위기와 덩달아 멀리 느껴지게 된 거죠. 그래서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다시 친근한, 오고 싶은 병원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러던 도중에 나온 아이디어가 우리 의사들이 직접 연주하는 작은 음악회였습니다. 아무래도 하얀 가운을 입은 어렵게 느껴지기만 하는 의사가 자신들을 위해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걸 보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했죠.”

- 처음 결성된 후로 요즘도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고 계신가요?
“결성 된 당시 초기에는 3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공연을 했어요. 그 때 우리 공연에 대한 호응이 꽤 좋았지요. 그래서 요즘은 그 음악회가 계기가 되어 매주 병원 로비에서 수요 음악회가 열리고 있어요. 우리는 항상 보는 업무가 또 따로 있기 때문에 매번 참석하기는 사실상 어렵죠. 그래서 병원 측에서 외부악단을 초청하기도 하고 외부에서 자발적으로 신청도 많이 해주셔서 수요 음악회가 그렇게 매주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종종 특별한 날 행사가 있을 때 연주를 하고 있어요.”

완벽을 가하는 ‘연주회’가
아닌 모두 함께하는
‘음악회’를 추구한다

- 악단에 들어가는 특별한 자격 조건이 있나요?
“얼마 전에 했던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오디션을 봤다죠? (웃음) 하지만 저희는 특별히 오디션을 봐서 단원을 뽑거나 자격 조건이 갖추어져서 뽑히거나 그런 건 없어요. 그저 하고 싶으면 들어와서 함께 연습하고 연주를 하는 겁니다. 우리는 보여주기 위한 완벽한 ‘연주회’를 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환자들과 교감하고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음악회’를 하는 것이죠.”

실제로도 작년 12월 연주회 때는 희귀 난치병인 베게너 육아종증과 싸우고 있는 환자분이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하였고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병원에 늘 모시고 다니는 환자의 딸분이 재즈 싱어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 그리고 공연 중 일어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라 하면 .. 아무래도 첫 번째 공연이겠죠? 그 날 마침 병원에서 첫 돌을 맞은 아기가 있었어요. 그래도 명색이 태어나서 첫 번째 맞는 생일인데 갑갑한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아이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연주했던 기억이 나네요.
잊지 못할 에피소드라... (고심하다가) 아. 저기 액자 속에 피아노 치시는 분. 저 분이 우리 병원 환자신데, 저 분과 로비에서 음악회를 준비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연주회 당일 날 저 분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ktx를 타고 내려오시던 중에 나한테 전화가 온 거에요. 지금 기차를 탔는데 악보를 서울역에 두고 온 것 같다고.. 전 바이올린을 하다 보니 악보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그 분도 당황하고 저도 순간적으로 당황했었죠. 여차저차 인터넷에서 피아노 악보를 다운 받아서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음악회를 시작했던 적이 있었어요. (웃음)”
 
병원을 환자들이 부담 없이
올 수 있는 곳으로

- 앞으로 악단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아무래도 악단이 처음 만들어진 동기가 환자와의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였다보니 당연히 앞으로도 그런 쪽으로 쭉 나아가야 겠죠.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환자의 병실에 직접 찾아가서 공연을 해주는 것도 좋은 시도가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이 모든 것 에 앞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료진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가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요즘은 어느 병원이든지 컴퓨터가 있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어서 의사가 환자를 잘 바라보지를 못해요.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할 때 행여 실수를 할까봐 모니터만 보죠. 환자의 눈을 쳐다보는 시간은 기껏해야 30초 정도 될까요. 그건 분명 한국 의료 실정이 미국과 같은 시간제가 아니다 보니 발생한 문제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의사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봐요. 요즘은 인터넷만 찾아봐도 의학적 지식이 얼마나 무궁무진하게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라는 직업이 필요 없어지진 않거든요. 의사는 그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 지식에 의한 효과를 최대한으로 올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 시너지효과를 내는 가교역할로 음악을 선택한 거죠. 우리 악단이 지향하는 바도 그런 맥락에 속해요. 좀 더 환자와 의사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게끔 이끌어 주고 치료 효과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그런 악단, 그런 음악이 병원에 있다면 환자의 입장에서 병원이라는 곳이 좀 더 오고 싶은 장소가 되지 않을까요?”

- 마지막으로 학업으로 힘들어 하는 의대생에게 음악 몇 곡 추천해주세요! 
여러 가지 장르의 음악이 있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재즈로 몇 곡 추천하자면 Wynton Marsalls의 ‘The very thought of you’, 트럼펫티스트 Chris Botti의 ‘In the wee small hours’(feat. Sting) 정도? 그리고 클래식 중에선 음악의 아버지 바하의 ‘파르티타(Partita)’를 빼놓을 수 없네요.”

이선민 기자/을지
<god0763@e-mednews.com>

- 『Clinical Road Map of Internal Medicine』의 저자 조재형 교수님을 만나다 -

현재 우리나라의 의과대학에서 시행하고 있는 교육은 이른바 ‘서양의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일까, ‘Grey's anatomy’와 ‘Harri-son's Principles of Internal Medicine’을 비롯하여 기초과목에서 임상과목까지 ‘교과서’로 추앙받고 있는 책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미국에서 물 건너온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져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내과학 책이 있다. 바로 그림과 알고리즘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Clinical Road Map of Internal Medicine (이하 로드맵)’ 이 주인공! 본과 4학년 시절부터 불철주야 한국교과서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신 가톨릭 대학교 내분비 내과의 조재형 교수님을 만나 책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부터 내용까지를 들어보았다.

90년대 후반에 국가고시에서 합격률이 60%대까지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로 인해 각 학교에선 국가고시를 상대로한 ‘족집게 강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 교수님은 이때 본과4학년 시절이었고 이 ‘족집게 강의’에서 들은 엑기스 내용과 칠판 필기방법을 응용하여 노트를 정리하였고 이에 대하여 동기들에게 폭발적 반응을 듣다보니 문득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 이거 책으로 내도되겠다!’ 국가고시 합격 후 책을 출판하기 위해 여러 출판사를 돌아다녔지만 학생의 노트를 쉽게 출판하기는 어려웠다. 그 후에 수련의를 거쳐 바쁜 시간들을 보내다 군 복무를 하게 되고 여유시간이 조금씩 생겨나니 다시 책을 출간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친했던 동기 주지현, 장정원교수님과 함께 지금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어 다시 책을 다듬는 작업을 시작했었다. 이 세명이 모여 2만장이 넘는 슬라이드를 스캔하고 그들 스스로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도 배워 그림들을 다듬고 하는 막노동 끝에 드디어 2004년 1판이 발행되었다. 당시 소프트커버판을 포함하여 해리슨다음으로 많이 팔린 내과학 책이었다고 한다. 몽골 울란바토르의대 교수가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이 책을 국가 보조로 출간하겠다고 요청했던 것과 인도의 한 출판사에서도 인도번역판 출간을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이 세명의 저자가 로드맵을 출판하면서 세웠던 두 가지 목표는 다름아닌  아마존닷컴에 책을 올리는 것과 하버드 의대생들이 이 책을 보면서 공부하게 되는 것! 이것을 충족하기 전까진 그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이후 2년 뒤 이들의 노력을 지켜봐왔고 꿈을 잘 알고 있는 출판사의 편집장이 다시 한번 세계를 겨냥해 보자고 하며 로드맵 2판 제의를 해 왔다. 좀 더 양질의 책을 출판하기 위해 메디컬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를 교육하기도 하는조교수님의 색다른 노력과 책의 커버를 담당한 동양화 화가부터 본과4학년 학생까지의 총 120명의 도움을 바탕으로 4년 만에 새로운 2판이 나왔다. 문제풀이도 첨가되었고 외국 유수의 교과서와 비교해도 자랑스럽다는 주변의 반응을 등에 업고 그들의 첫 번째 목표였던 아마존닷컴에의 등록을 당당히 성사시켰다. 그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 하기 힘들다고 하셨다. 이제 두 번째 목표를 향해 유수 해외 출판사와 계약의사를 타진 중이다.

처음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로드맵을 읽어 보았을 때에는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과 노력들보다는 세련되고 한눈에 들어오는 편집방식이 흥미로웠다.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Part 1 부분엔 문장 없이 거의 모든 부분이 플로우차트, 표, 그림등으로 채워져 있어 가독성이 상당히 좋다. 명화와 질병을 접목시킨 점도 재밌었다. 이런 구성 하나하나가 그냥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학생 때부터 갈고 닦아온 노력과 노하우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말씀하시는 조재형 교수님의 모토는 ‘미쳐야 미친다.’이다. 의대생 대부분이 본과에 진급해 내과학을 막연히 접하는 시기엔 해리슨 정독을 통해 영어와 의학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꿈을 꾸지만, 실제 수업이 진행되고 나면 넘쳐나는 족보와 끝없는 야마 외우기에 급급해 해리슨을 원서로 멋있게 보는 로망은 점차 희미해져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노트로 책을 내야겠다는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힘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재형 교수님은 같이 미쳐 주었던 친구였노라고 말씀하셨다. 맹목적임 암기에 시들어 갈 지라도 , 쏟아지는 시험에 척추가 마비될지라도 서로의 목표를 기꺼이 위하여 미쳐주며 소중한 꿈을 잊지 않고 나아갈 의대생이 있을거라고 믿는다. 그들이 만들어 낼 새로운 한국판 의학 교과서를 희망하며 건투를 빈다.   

김지은 기자/가톨릭
<jieunapple@e-mednews.com>

故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

아들을 잃은 85세 노모가 슬프게 운다. 48세, 젊은 나이에 어머니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못난 아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향기는 진하게 남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영화 ‘울지마, 톤즈’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의사에서 신부로
이태석의 의대 진학은 10남매를 키우며 고생한 홀어머니에게 탈출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태석은 인턴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하느님에게 끌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며 사제가 되기로 한다. 신학교를 졸업 후 사제서품을 받은 이태석 신부는 또 한번 놀라운 결심을 한다. 한국인 사제로서 처음으로 아프리카 근무를 자청한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황폐해진 땅 수단, 그 중에서도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부 수단으로 떠난다.
2001년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이끌려 오랜 내전과 전염병으로 병든 땅, 남수단 ‘톤즈’에 온 이태석 신부는 지역의 유일한 의사로써 병원을 세우고 직접 아픈 이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그가 세운 ‘돈보스크 병원’은 금새 유명세를 탔다. 매일 300명에 가까운 환자를 보는 강행군이었지만, 결코 한밤 중 이라고 병원에 찾아온 환자를 돌려보내는 일은 없었다. 그는 진료실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직접 한센인 마을을 찾아가 진료를 하고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펌프를 만들고, 한센인들의 발에 맞춘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

학교를 세우다
“예수님이 이 곳에 오신다면 성당을 먼저 지을까 학교를 먼저 지을까 생각해보았다. 예수님이라면 필히 학교를 먼저 지었을 것이다.” 소년병으로 차출되어 연필보다는 총을 먼저 손에 드는 아이들이 가난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했다. 이를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돈보스코 학교를 건립한다. 톤즈 유일의 밴드, 35인조 브라스 밴드도 그의 작품이다. 자신이 그랬듯이, 아이들에게 음악이라는 친구를 선물해 전쟁으로 상처받은 마음에 희망을 선물하고자 했다.
열정적으로 일하던 그의 몸에 점점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휴가 차 한국에 들러 우연히 시행한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암세포는 이미 간까지 전이되어 있어 여명이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톤즈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지난 1월 14일 선종했다.

2010년, 멈춰버린 톤즈의 시계
영화의 제작진이 방문한 톤즈의 시계는 2008년 이태석 신부가 떠나왔던 그 시간에 멈춰있었다. 의사가 없는 돈보스코 병원의 진료실은 텅 비어 있었고, 학생들은 교장선생님이었던 쫄리 신부님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휘자가 빠진 브라스 밴드는 더 이상 연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0년 2월, 이태석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브라스 밴드가 다시 뭉쳤다. 지휘자는 없어도 아이들은 선배가 후배에게 가르쳐 주며 연주를 준비했다.
영화의 마지막, 브라스 밴드가 그를 추모하면서 마을을 행진한다. 환하게 웃는 이태석 신부의 사진과는 달리 톤즈의 사람들은 오열했다. 그렇게 노모의 눈물로 시작한 영화는 저 먼 아프리카 땅, 톤즈 사람들의 눈물이 되어 끝을 맺었다.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 마지막으로 10남매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다.”
-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中에서

이예나 기자/순천향
<lyna@e-mednews.com>

9월 개봉한 영화 ‘울지마, 톤즈’는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6만 관객을 돌파했다. 몇몇 극장에서만 개봉했으나 이제는 전국 54개 극장으로 확대되어 상영 중이다. 상영관은 홈페이지 www.dontcryformesudan.com 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리슨, 사비스톤, 가이튼... 의대생이라면 누구나 봐야 하는 교과서들의 제목을 장식한 이 분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의대생신문에서는 올 해 6회에 걸쳐 의학교과서의 저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파헤칩니다. 가이톤, 해리슨, 홍창의, 그래이에 이은 다섯 번째 순서는 눈이 호강하는 책 ‘네터 컬렉션’의 저자, 프랑크 네터입니다.

의학계의 미켈란젤로, 프랑크 네터

예술계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다면 의학계에는 프랑크 네터의 네터 컬렉션(The Netter Collec-tion)이 있다. 처음에 시바(CIBA) 컬렉션으로 출판되었다가 판권이 ELISIVER로 넘어가면서 이름이 바뀌었는데, 13권으로 시작했던 컬렉션이 이제는 수십권에 달한다. 또한 온라인 버전, 3D 버전, 스마트폰 어플 등 계속해서 다양한 컨텐츠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의사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환상적인 그림 실력을 갖춘 저자, 프랑크 네터(Frank Netter)에 대해 알아보았다.

미술가 or 의사?

1906년 뉴욕에서 태어난 프랑크 네터(1906-1991)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뉴욕 대에 다닐 때에도 오후에는 만사 다 제쳐두고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에 미술을 배우러 다녔다. 당연히 학교 성적은 점점 곤두박질쳤고 결국 부모님께 미술공부를 하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씀 드릴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미술가라면 그저 방탕한 생활을 해대는 방랑자들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노발대발하시며 의사 같이 존경받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셨다. 하지만 네터는 어떠한 설득도 완강히 뿌리치고 미술가의 길을 선택했다.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꽤 성공적인 상업 미술가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끝까지 모른 체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결국 몇 년 못가서 어머니 소원대로 뉴욕대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입학 후에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남들이 부리나케 필기를 해댈 때 그는 강의내용을 그림으로 쓱싹 스케치하곤 했다. 한 눈에 들어오는 그림 정리가 동기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교수님들께도 알려졌고, 그때부터 강의 자료나 교과서 삽화 일을 도우면서 용돈을 벌기도 했다.
1931년 의과대학 졸업 후, 벨뷰 병원(bellevue)에서 인턴을 수료하고 맨하튼에서 외과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933년, 당시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부수적으로 삽화 알바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림 다섯 폭에 $1500을 요구한 일에 $7500를 받게 되면서 (그림 하나당 $1500으로 쳐준 것이다!) 그때부터 아예 임상의사로서의 직업을 그만두고 전업 의학전문 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술가 and 의사!

1938년 제약회사 시바(CIBA, 1997년 합병되어 현재는 세계 1위 제약회사 노바티스)에 고용되어 회사 홍보용 그림들을 그리게 된다. 첫 작품은 화일을 심장 모양으로 자르고 그 위에 그린 것이었는데, 많은 의사들이 홍보문구를 빼고 제작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다른 장기들에 대한 호응도도 마찬가지였다.
치솟는 인기에 힘입어 13권짜리 시바 컬렉션을 편찬하게 되었다. 총 4,000개가 넘는 그림이 삽입되었으며 인체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조직학 등을 각각 계통 별로 정리되어있다. 의학계의 큰 센세이션이었으며 1988년 뉴욕 타임즈가 ‘전세계 대부분의 해부학 교수들 다 합쳐놓은 것보다 의학교육에 더 많이 기여한 회가’라고 했을 정도로 수많은 기관, 평론가, 독자들에게 칭송받는 책으로 꼽히고 있다.
꼽을 수 없이 많은 표창과 영예 뒤에는 그만큼 쏟아 부은 노력이 있었다. 네터는 심혈을 기울여 시바 컬렉션을 완성하였고 집필 도중에 수많은 전문의들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직접 경험을 통해 얻을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료 수집을 위한 여행도 수없이 다녔다. 1980년 초 세계 최초 심장 이식 수술을 참관하고 그 모든 과정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물론, CT 스캔이나 MRI 같은 첨단 영상의학 자료들도 배제하지 않았다.
이 책의 큰 특징은 환자들의 표정, 안색, 몸짓 등에서 개개인의 인격이 묻어날 정도로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사람의 다양성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고자하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우리가 고장 난 텔레비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환자를 대할 때 하나의 독립적인 사고력 퀴즈로 보지 않고 환자 개인이 겪고 있는 복합적인 어려움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의학의 모든 분야를 다 어우르는 전공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물보다도 사진보다도 더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유져 프렌들리한, 네터 컬렉션이야말로 진정으로 이 시대의 최고 학습서라고 생각한다. 의학이 제아무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나간다 해도 미켈란젤로의 전지창조가 반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랑받듯이 네터가 남긴 4,000여종의 걸작들도 고이고이 만년야마로 내려올 것이다.

문정민 기자/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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