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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의사가 되는가

113호/오피니언 2016. 11. 30. 23:48 Posted by mednews

우리는 언제 의사가 되는가

 

 

의대생은 대부분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다. 대부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의학전문기자나 보건사업자, 의료정책결정자, 가수, 요리사, 번역가 등 전공 관련 여부와 무관하게 의대생의 진로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분야 간 융합과 진로의 다양화는 곧 새로운 아이디어의 탄생으로 귀결되므로 이는 긍정적인 변화이지만, 의과대학의 기본 교육방향은 의료인을 양성하는 것이고 실제로 압도적 다수의 의대생이 의사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이상과 지향을 품고, 서로 다른 감정과 욕구에 이끌려 의과대학에 진학하며, 교육과정을 통과하면서 서로 다른 개별적 경험을 축적하여 서로 다른 가치관을 형성한다. 상이한 가치관과 인식의 틀은 다시 서로 다른 이상과 감정을 유발한다. ‘의사란 누구인가’에 대해서 개인이 품고 있는 생각과 이미지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의사라는 존재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인식을 품고 있다면, ‘의사는 누구이다’ 식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의사에 대해서 품고 있는 이미지가 서로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인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의사가 인간을 다루는 지식인이며, 타인의 삶에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직업이라는데 동의한다. 친절해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으며, 평균 스트레스 수준이 아주 높은 직군이고, 사회적 존중과 존경을 받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적대감과 불만, 불신의 대상이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이런 합의된 사항과 공통의 인식을 기반으로, 의사는 무엇을 하는 어떤 존재이며, 권리와 책무는 무엇이고, 어느 곳을 바라보고 지향해야하며,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 그리고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의사 혹은 의대생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봐야 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사가 누구인지 답하려면, 질병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부터 살펴봐야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다. 그 길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야만 삶을 의미들로 채우려는 의지를 십분 활용하며 사는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자신의 삶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질병은 그 원인이 심리적인 것인지 신체적인 것인지를 불문하고, 우리의 자유의지와 삶에 대한 열의, 애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회복불가의 신체, 정신적 장애를 겪으면서도 활력을 잃지 않고 보통 사람들만큼, 혹은 그보다 더욱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에 해당하며, 흔치 않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담은 에세이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보다 압도적으로 흔하게, 다양한 원인에 의해 질병을 제때 적절히 치료하지 못한 탓에 질병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삶의 일부 혹은 전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병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도 적지 않고, 병인 줄 안다손 치더라도 치료비를 대지 못해 태산보다 높은 병원문턱에도 오지 못하고 지병을 유일한 벗 삼아 살아가시는 독거노인들도 계신다.  
 
모든 일이 실상 그렇듯, 질병도 공평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좋은 영양을 섭취하는 사람보다는 끼니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더 자주 나타나고, 똑같이 무거운 것을 들더라도 헬스클럽에서 드는 사람보다는 공사장에서 드는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며, 무엇보다도 더욱 서럽도록 청년보다는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허벅지가 한껏 얇아지는 나이에 자주 찾아온다. 
열심히 산다고 비켜가거나 면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되려 열심히 살아온 그 결과로서 자주 발생한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질병은 멀기만 하고 객관적이며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환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실존적 존재, 혹은 역설적이게도 현재 자신의 삶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타인 인생의 의미를 대신 찾아줄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 의미를 찾아갈 수 있도록  의지와 용기를 회복하게끔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의사는 그럴 목적으로 질병을 관리하고 치유하며 싸우는 사람, 혹은 환자를 돕는 사람이다. 아픔의 종류만큼이나 도움의 방법도 다양하겠으나, 의사는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신속하게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병을 잘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만 집중하면 되는 것일까.

의사를 ‘환자를 돕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으니, 우리는 이제 의사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서 ‘환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답해야 한다. 그 대답은 비교적 명확하다. 환자는 ‘아픈 ’‘사람’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아프다’의 의미를 알아야하고, 구태여 자명한 명제인 환자가 ‘사람’임을 강조한 이유도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는 삶, 아프지 않은 인간은 없다. 특별히 그 위험성이 크고, 실체가 파악되어서 ‘의학적 질병’으로 정의된 것만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것도 아니다. 명백히 인간을 짓누르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현대과학이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아픔은 질병으로 정의되지 못한다. 과거의 정신병은 ‘천벌을 받은 것’ 혹은 ‘멀리 해야 할 대상’을 알려주는 징표의 취급을 받았을 뿐, 치료의 대상인 ‘질병’으로 분류되지 못했다. 인식과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그들이 치료를 받을 권리와 필요가 있는 ‘인간’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의학이 아직 특정 아픔을 질병으로 ‘규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존하는 아픔을 아픔이 아니라고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학문의 역할은 존재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일이지,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의학이 규명해놓은 범위 안에서만 의사가 환자에게 해줄 일이 있고, 그 밖의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태도는 언제나 무책임하고도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환자는 단순히 병리적 변화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며, 그것을 단지 하나의 특징으로 갖는 복잡다단한 다면체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도움을 줘야하는 의사는, 다방면의 관심을 토대로 다양한 분야를 두루 탐독해야하며, 환자가 삶 속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빠르게 포착하는 능력과 그러려는 의지 또한 갖춰야 한다.

따라서 정확한 정의로 다시 말하자면, 의사란 ‘아픈’‘인간’을 보듬어 살피고, 건강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존재로 회복시킨 후 본래의 혹은 새로운 삶으로 투입시켜주는 것을 소명이자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료실에 들어서는 ‘의학적 환자’에게는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지만 병원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하는, 잘 보이지 않고 여지껏 보지 않으려 애써온 ‘병원 밖 환자’,‘병리적 사회’에 대해서도 진심어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적이고 열정적인 노력과 책임을 개인과 집단의 차원에서 반드시 다해야 할 것이다. 요컨데 의사는 사회적 지식인이자 가장 인문학적이고 사회후생적인 현대과학자여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아픔으로 진료실 문을 넘어 의사에게 온다. 세상은 교과서만큼 깔끔하고 단순하지 않다. 별안간 화를 내는 환자도 있고, 치료과정을 잘 따라오지 않는 ‘순응도’가 떨어지는 환자도 많으며, 자신을 해치는 무언가를 자신의 삶으로 여기며 내려놓지 못하는 환자도 더러 있다. 참으로 고되지만 의사는 그들을 보듬어야하기에, 자신 스스로도 한 명의 인간일 뿐인 의사가 수없이 많은 인간의 행위동기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유연하고 열린 사고를 하는 것은 의사의 제 1 자격조건일 것이다. 세상의 동기는 다양하며, 어떠한 사람도 나와 완전히 동일한 동기로 행동하지 않는다. 의사는 한 가지 문제를 다양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모저모 따져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깊고 진심어린 인간관계도 많이 맺어야 한다. 섣부른 가치판단 이전에 충분한 정보와 사실을 접해야한다. 자신의 깊은 사유와 이해의 결과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평이한 용어로 풀어내야하는 소명도 갖는다. 의사가 평생 공부하는 직업이라는 이야기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리라.

의사의 역할에 대해 참고할만한 좋은 예시가 있다. 한국 바둑의 국수, 조훈현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는 일본의 바둑영웅이었다. 그는 지독한 외골수로, 평생 바둑과 저녁에 마시는 정종을 자신의 인생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이다. ‘죽으라 해도 좋으니 금주만은 명하지 말아 달라’는 그에게 주치의는 딱 한 잔만 마시라는 권고를 했고, 세고에 겐사쿠는 이를 평생 지키며 살았다. 만일 주치의가 오로지 의학적 판단에만 근거해서, 하루에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면, 가장 다행스레 치료에 응한 경우에도 조금 더 생명을 유지했을 뿐 자신의 삶이 이전만큼 가치 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정신과 육체의 단순한 이분은 잘못된 구별이라는 현대의학의 관점에 따르자면, 그는 자신의 삶이 의미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정신적으로는 물론, 신체적으로도 큰 타격을 지속적으로 입으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일본의 바둑 영웅이 아닌, 짜증 많고 참을성 없는 노인으로 회귀했을 것이다.
 
인간 의사만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의학은 차가운 것이지만, 의사는 따뜻해야한다. 교과서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환자의 재정 상태나 사회적 배경, 가족관계, 그 시대, 지역의 문화 사조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환자는 단순히 병리적 변화로 정의될 수 없고, 상기한 모든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그것들의 산술합 이상인 복잡미묘한 다면체이다. 교과서의 담담한 문장이 실은 누군가 겪을 끔찍한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학은 차갑지만 의사는 따뜻해야한다. 인간 의사의 역할은 차가운 의학적 원리와 규칙을, 환자의 다양한 인간적 요구, 감정, 상태와 종합적으로 고려, 조율하여 최선(의학적 최고와 다를 수 있다)의 방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부터는 안 되는지 자신이 어렵게 배운 내용을 쉬운 용어로 풀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가 그것을 수용하도록 종용하고, 그것을 수용했다면 그에 이어지는 처치를 적합히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높은 차원의 심리적 조율까지 해야 하기에, 나는 빅데이터 시대가 도래 하더라도 인간의사는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고 믿는다.
 
변하지 않는 생각은 없다. 생각의 주체인 사람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20살 의대생이 생각하는 의사와 40대 의사의 의사관은 얼마간이든 다를 것이며, 하물며 20살 의대생간에도 다른 생각과 시선을 품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같은 사람의 생각이라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차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할 생각이라면, 과연 ‘의사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꼭 나름의 답을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개인적이며 가변적인 생각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의사로서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도 적고 배움도 부족한 학생의 의사관을 소박한 글 솜씨로라도 적으려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그런 의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바람들은 젊은 날의 치기일 뿐일까 아니면 실현가능한 꿈일까. 우리 주변에 이미 이윤초월적인 삶을 자신의 온 몸으로 살아내시는 이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이 많이 계신다.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점점 더 많아져야 할 것이기에, 나는 그런 삶이 반드시 실현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참된 의사의 길을 걸어가고 싶다. 남을 도우려는 의지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삶은 큰 보람과 가치를 갖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럴 재목이 되는지 부끄럽기도 하고, 개인의 소명으로는 고되고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들의 소명이 그렇다니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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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0) 2016.11.30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수필부문
금   상

 

고통의 병태생리학(Pathophysiology of the Pain)

 

김양우 (한양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4학년)

 

며칠 전, 누군가 힘없는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고. 신을믿지 않는 나에게는, 그다지 깊은 울림은 아니었다. 독방으로 돌아와 책을 펴니 니체가 말했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 고통은 우리를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이렇게 전해들으면, 고통은 인간에게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주는 좋은 것이다.
MRI 촬영을 위해 온몸을 포박당한 채 시끄러운 기계음이 울리는 속에서, 나는 그렇게 지난 시간을 하나씩 복기해 보았다. 아무래도 성경보다는 니체 쪽이 이해하기 쉬웠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고통’이라니 내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말이다. 나의 고통은 두 군데에서 출발해 퍼져나갔다. 한쪽으로는 엉덩이에서 허리를 타고 올라가고, 다른 쪽으로는 이성에서 마음으로 내려왔다. 흉추가 가장아픈 걸 보니 두 줄기가 아마 여기서 만나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지…’라는 원망에서 ‘내가 왜 강해져야만 하는지’라는 한탄으로 머릿속 질문이 바뀌어 갔다. 이 고통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 나는 결국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강해질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강해져야 하는 걸까? 제발 나에게서 이 고통을 거둬 가시고 나를 나약한 그대로 내버려 두소서. 직접 겪는 고통은 전해들은 것과는 달리 하나도 좋지 않았다.
감정이 점차 격해지고 있던 찰나에 촬영기 밖으로 끌려갔다. 끝난 줄 알았는데 조영제 주사를 맞고 다시 촬영기로 들어갔다. MRI도 조영제를 맞는구나, 그때 알게 됐다. 일주일 뒤 나온 판독 소견은 역시 예상대로 강직성 척추염이었다. 양쪽 천장 관절(sacroiliacjoint)에 염증이 심하게 생겼고 뼈와 힘줄, 인대 군데군데에 손상과염증이 보였다. 제법 진행한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포도막염이 생겼고 안과에서 진료를 받은 뒤에HLA-B27 유전자 검사와 골반 X선 촬영을 했다. 의대 생활을 시작한 후 만성적으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 후 나온 영상의학적 소견까지 더하면, 나는 강직성 척추염의 교과서적 증례에 해당했다. 강의로만 듣던 희귀병인 줄 알았는데 바로 나한테 있던 병이었다. 현대 의학은 아직도이 병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바꿔 말하면 의대생인 나는 이병에 대해 알만큼은 알고 있었다.
병원 실습중에 외래 진료를 참관하면 수많은 환자를 보게 되는데 간혹 의사를 힘들게 하는 환자가 있다. 의사가 더 해줄 수 있는게 없는 상황에서 떼를 쓰듯이 말하는 사람들이다. 가만 들어보면 무엇을 해달라는 구체적 요구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달라는 하소연을 하고 있다. 대기자는 수없이 밀려 있고 응급 상황도 아닌데 자기 생각만 하는 이런 사람들은 종종 교양이 없다는비난을 듣는다. 누구나 고통스럽고 어렵다. 병원이라면 특히. 의사가 이미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문제다. 아무래도 의학지식과 사회경제적 수준이 배려심의 양을 정하는 게 아니겠냐는생각이 들곤 했다.
포도막염을 진단받던 날, 눈의 통증이 극에 달해 있었고 자가면역이 원인일 수도 있기에 걱정이 많았다. 병원 실습도 계속되어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환자로서는 최고의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교수님께 공손히 내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차분하게 검사를 받았다. 실습과 진료를 같은 병원에서 해결하니 동선도 간단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일정을 위해 응급실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 카톡이 왔다. 오랫동안 아프시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모든 상황은 우연히 이어졌다. 그런데 아버지의 카톡을 본 순간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 그 어떤 드라마도 소설도 흉내낼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가 있다는 사실을. 사르트르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사이에 선택만이 있다고 했지만, 틀린 말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는삶이라는 무의미하고 가는 실로 이어져 있고, 삶은 고통이라는 주파수로 가끔 흔들리며 의미를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일부러 고통을 선택하는 인간은 없다. 스스로 고통을 선택했다며 자기 위안에빠질 뿐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친할머니의 장례는 미사로 치러졌다. 신부님은 죽음 앞에 삶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예수님이 나약한 우리를 어떻게 품어주시는지 나긋나긋 시를 읊듯 말씀하셨다. 친할아버지는 지난 삶을 회고하고 남은 삶을 두려워하며 관을 부여잡고 슬프게 우셨다. 따라 울음을 터뜨린 아버지는 입을 벌리고 목을 놓았다. 마치 갓난아기 같았다. 아버지의 아들인 나도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포도막염이 낫지를 않아 눈물이 차오르면서 안구에 통증이 왔고, 피로가 겹쳐서 허리가 너무 아팠다. 참기 어려운 고통속에서 내 몸과 내 영혼은 파르르 떨며 “끼이익 끼이익” 서툰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이 비명 같은 연주는, 인생에서 서곡조차도 될수 없는,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를 확인하는 조율 정도였을 것이다.이 고통을 이겨내면 나는 더 나은 인간으로 더 좋은 소리를 낼 텐데,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차라리 아무 일 없는 채로 그냥 못난인간이 되고 싶었다.
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분명 종교나철학보다는 훨씬 고통의 실체에 근접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을넘어 고통을 낫게 하거나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의학이 참 대단하다고 믿었는데, 나에게 찾아온 만성적 허리통증과 희귀병이라는 절망감, 가족이 함께 겪는 상실감 앞에서 이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말기암이나 중증 폐질환도 아니고 내가 열심히 살면 극복할 수 있는 ‘나를 죽이지 않는 고통’임을 잘 알고 있는데도 나는 한없이 나약해졌다. 고통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고통 그 자체다. 의학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의사는 인간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가치중립적이고 차가운 의학과는 달리 의사는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고통에 대해 잘 알려줄 수 있다.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고 치료법은 무엇이고 그다음 치료법은 무엇인지까지 알고있다. 나도 내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을 잘모르겠다. 내 삶은 왜 이렇게까지 고통에 떨면서 가냘픈 울음을 울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서 사실 나는 내 고통에 대해 잘모르고 의사 역시 인간의 고통에 대해 조금도 아는 바가 없다.
이제 내가 의사가 된다면, 인간의 고통을 실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나는 의사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도 그 고통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고통이 흔들고 있는 삶의떨림을 보고, 그 떨림이 내는 서툰 연주를 들으면서, 내 고통의 악보로 내 삶을 함께 연주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유일하게 이해할수 있는 고통의 의미다.


│금상소감│
고통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이해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에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 두 번째 응모했습니다. 일찌감치 글을 준비하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이 많은 제 작품에 큰 상을주신 것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수필의 제목을 다소 특이하게 짓고 싶었습니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대학교 학보사에서 학생 기자 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제목을 짓는 데 세심하게 공을 들였습니다. 병태생리학이라는 말은 의학 교과서에서 질병의 생물학적 기전을 다루는 기초적인 단원의 제목입니다. 고통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이해를 말하고 싶은 의도도 있었고 프랑스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깡길렘의 저서인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에서 착안하였습니다.
고통은 의학에서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도 하면서 정상적인 신체의 반응으로 보기도 합니다. 종교나 철학에서도 고통을이중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실존에서 고통은어떤 의미인지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의 체험을 통해 이를 표현해보고 싶었으며 의학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작품 내용 중에 니체나 사르트르가 언급된 것도 그런 뜻이었죠.
투고를 할 때에는 몰랐는데 황현산 선생님께서 심사를 해주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이 글을 선생님께 보일 수 있어서 기쁘고영광스럽기도 한 한편, 졸문을 보여 제 미흡한 수준을 들킨 것 같아 한없이 부끄럽기도 합니다.어머니께서 제가 아픈 걸 아시고 많이 슬퍼하셨습니다. 제가 아픈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면서 항상 제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이 어머니께 죄송했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드리게 되어 걱정이 됩니다. 아들을 걱정하시는 어머니의 고통을 이해할 날이 오게 될까 아득하기만 합니다.앞으로도 끊임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수필부문
대   상

 

분만실, 탄생 그리고 재회

 

이지선 (가톨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4학년)

 

나는 탄생부터 쉬운 딸이 아니었다. 1987년 8월 19일. 엄마는 찌는 더위 속에 12시간이 넘는 진통을 겪고서야 나를 품에 안았다.
어린 시절에는 수없이 잔병치레를 하여, 병원도 없던 시골마을에서 자가용도 없이 어렵게 옆 도시의 병원을 오가야 했다. 성격은또 내로라 하는 황소고집이어서 한여름에 겨울 외투를 입고 유치원에 가겠다고 떼를 쓰는 등의 에피소드는 나를 낳은 엄마가 감내해야 했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사춘기 때는 급기야 가출까지 감행하기도. 사람들이 엄마에게 ‘공부잘 하는 딸 두어 좋겠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엄마는 침묵의 미소로 대답하거나,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럼 한 번 데려다 키워 보세요.’라고 말했다. 엄마에게난 결코 ‘간단한’ 딸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자 내 일탈은 그 차원이 한층 과감해졌다. 나는 멀쩡히 잘 다니던 학교를 돌연 휴학하고 홀로 1년간 중동과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반대하던 아빠를 설득하도록 도와준 건 엄마였지만, 그런 엄마도 공항에서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네 결정이니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말은 울먹이는 소리에 묻혀희미하게 들렸다. 내가 본 엄마의 첫 눈물이었다. 내가 세계를 누비며 새로운 것들을 흡수하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만끽하던 시간 동안, 엄마는 딸에 대한 걱정을 꾹꾹 가슴에 눌러 담고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던 인고의 시간을 견뎠을 터였다. 하지만 엄마의 그런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내겐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신나고 즐겁기만 했다. 그리고 이런 내 삶의 방식은 그 후로도 변함없이 이어져갔다.
2016년 1월에는 IS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중동을 향한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남들 눈에는 어쩌면 정의롭고 대단하게 보일,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들을 도우러 떠난다는 의대생 딸은 그렇게 또 불시에 엄마의 마음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도 엄마는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파리테러, 그에 가려 언론에 조명되지 않았던 레바논 테러, 전 지구적충격과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인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극단적으로는 목숨이 위태로울 가능성마저 떠안아야 했던 그 곳, 그렇지만 나는 꼭 가고 싶었고 가야만 했다. 나에 대한 걱정으로 엄마가 느꼈을 두려움 따위는 역시 안중에 없었다. 그저 내 자아의 완성과 내신념에만 골몰했을 뿐이었다.레바논에서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데에 대한 안도도 잠시, 나는 선택실습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방글라데시행 짐을 꾸렸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시골 마을 구석에 있는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만 무려 다섯 대, 그렇게 꼬박 3일. 오가는 길조차 험난한 여정이었다.
먼 길을 떠나온 만큼이나 내 마음도 집으로부터 멀어졌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빠르게 적응하며 다른 의료진들, 환자들과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새롭게 마련된 내 복잡한 삶 속에, 타국에서 실습하는 딸 때문에 매순간을 노심초사하며 지낼 엄마에 대한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내가 참 많은 시간을 보냈던 분만실, 커튼으로 가려진 8개의 침대가 놓인 그 곳은 매우 분주했다. 산모 수에 비해 의사 수가 턱없이 모자라 특별한 문제가 없는 자연분만은 모두 조산사들의 몫이었고, 간호대 학생들이 이를 도왔다. 그러다보니 의대생인 내게도 한국에서 익숙해져 있던 ‘멀찌감치 참관하는’ 역할이 아닌, 보다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었다.첫 인사를 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조산사들이 나를 찾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는 질끈 묶고, 여러 개의 장갑을 갈아 끼우며 바쁘게 움직였다. 오랜 진통의 기다림, 생명 탄생의 순간, 갓 태어난아기를 품에 안은 산모… 새로운 인격체가 세상의 빛을 보기를 준비하는 시간부터 생의 첫 시작을 마주한 순간까지 모든 과정이 정신없이 분주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내게도 새 생명을 내 손으로 맞이할 첫 기회가 주어졌다. 산모의 가장 가까이에서, 온힘을 짜내어 세상을 향해 머리를 밀고 나오는 작은 생명체를 기다리는 시간. 산모와 아기,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분만실을 시끄럽게 채우던 산모들의 고통어린 신음과 비명, 갓 태어난 아기들의 울음소리, 의료진들끼리 다급히 지시사항을 주고받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새 생명을 기다리는 산모의 거친 숨소리, 산도 내에서 아기가 벌이고 있을 치열한 사투,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내 긴장가득한 의지. 그게 전부였다.
서툰 방글라로 “조금 더!”, “힘을 주세요!”라는 말을 수없이 외치고 나서야 뱃속 아이는 열 달을 머물던 엄마의 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경험 많은 조산사의 지시에 따라 아기의 머리를 잡고 그 탄생의 완성을 도와 엄마에게 안겨주었다. 생명의 탄생은 고귀했고,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생의 출발을목도했다는 것, 그 과정에 두 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동원해도 표현해낼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 뜨거운 감격 앞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려 했다. 애써 평정심을 되찾아 아기의 탯줄을 자르고, 태반을 꺼내고,산도의 열상을 조심스럽게 봉합해주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다 마치고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야 비로소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탄생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흥분하느라 그 생명을 몸속에서 길러내고 빛을 보게 해준, 앞으로 긴시간 이 아이를 키우며 울고 웃을 엄마에게는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다. 치열한 고통의 과정을 이겨낸 후의 기진맥진한 표정, 그러나 한없이 평화로운 미소.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양극의 표정이 어우러져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모습은 어떤 화려한 배우들보다 아름다웠다. 그때 문득 그 얼굴에서 나는 내 엄마를 떠올리고 말았다. 방글라데시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
약 28년 전 한국의 어느 병원에서 나는 저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열 달간 한 몸으로 지낸, 그 순간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분리되어 이후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엄마에게서 멀어져 갈 나와 마주했을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달게 견뎌냈던 고통으로 낳은 딸이 당신의 품을 떠나 수없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던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되었다. 28년의 세월 동안 쉼없이 엄마의 마음을 괴롭혀온, 그러면서도 ‘나’의 삶을 엄마가 존중하고 받아들여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오로지 내 주장만을 내세워 온 그동안의 삶을, 나는, 낯선 나라에서 직접 아기를 내 손으로 받으며 민낯으로 마주했다. 부끄러움의 따가운 볕이 그 민낯 위로 쏟아졌다. 분만실 한켠에서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몹시 미안했고 많이 감사했다.
그 후로 약 열 건의 분만을 더 내 손으로 진행했다. 이제는 아기와 산모뿐 아니라, 진통의 시작부터 출산을 마칠 때까지의 모든 과정 동안 산모들의 옆에서 물을 떠다 목을 축여주고, 손을 꼭 잡아주며 그들을 돌보는 산모들의 어머니들이 함께 보였다. 이제 막 엄마가 된 딸을 그 엄마는 대견하고 안쓰럽게 바라보며 보살펴주고있었다. ‘사랑’이라는 글자에 실체가 있다면 바로 ‘엄마’의 저런 모습이리라 싶었다. “나도 우리 엄마 보고 싶다.” 그때 나도 모르게불쑥 흘러나온 한 마디.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내 사랑의 실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그냥 많이 보고 싶어.’


│대상소감│
그래도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올 8월은 참 뜨거웠습니다. 엄마가 고통과 기쁨으로 저를 낳았을 8월, 저는 그런 엄마를 생각하며 이 글을 낳았습니다. 짧은 글 안에 긴 시간을 담아내면서 이제까지 살아오며 겪고 느꼈던 참 많은 경험생각들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기억 속의 저는 어렸고, 서툴렀고 그래서 아팠습니다. 아직도 깨닫고 다듬어져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더디게나마 성장을 하고, 조금이나마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려 준 엄마의 존재가, 기억을 꺼내어 글로 옮기는 시간 내내 머리와 가슴을 가득채워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혼자만의 기억 속에 넣어두었다가 점점 희미해질 뻔했던 기억과 생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시고, 이 부족한 기록에 과분한 상으로 격려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 글은 ‘제 6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한목적 외에도, 이번 제 생일날 엄마를 위한 선물로 준비한 것이기도합니다. 부모님 앞에만 서면 유난히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해지는저인지라 끝내 이 글을 엄마께 드리지는 못했는데, 덕분에 수상 소식을 전하며 다시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글을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글만이 아니라 표정과 말투에도 감사한 마음을 담아 그리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할 수 있는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감성을 애써 억누르고 그 자리를 딱딱한 지식으로 채워야 했던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지내다가 핀 줄도 모르게 져버린 벚꽃을 보며 놀랐던 적도, 매일 지나다니던 길에 있는 나무가 단풍나무였다는 사실을 낙엽이 다 지고 나서야 알았던 적도 있습니다. 병원이라는 현장에서치열하게 일을 해야 할 내년부터는 감성의 자리를 철저한 이성으로 대체해야 하는 순간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햇살을 노래하고, 그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환자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아주며 때때로 함께 눈물도 흘릴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있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