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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미시적인 삶


용산참사 현장을 다녀왔다. 황량한 풍경들 사이로 왠지 그날의 사람들이 보이는 듯하다. 그래, 모두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을 것이다.

시행사 직원은 회사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용역 직원에게 독촉 전화를 걸었겠지. 용역 직원은 철거민들에게 연민이 생겼을지도 몰라. 하지만 일단 일을 어서 끝마치고 싶었을 거다. 철거민들은 보상받지 못한 권리금이 아까워서, 혹은 정말 이 엄동설한에 길바닥에 나 안게 생겨서 옥상에 올라갔다. 하지만 망루 안에서 무서웠을거야, 아마. 물대포를 쏘고 특공대가 투입된 상황에서 생존이외의 다른 명제가 떠오를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화염병이든, 새총이든, 골프공이든 던졌을 거다. 특공대원도 상명하달의 위계질서에 복종하는 구조 안의 무력한 개인이었을 뿐. 진압작전을 하면서 반정부 세력 소탕과 불법집회에 맡서 법을 수호한다는 자부심을 과연 느꼈을까. 아니다, 아니다. 검찰 수사관들은 어떨까. 상부의 압력이 없었어도 스스로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사결과는 나와야 하는 대로 나왔고, 이들은 조직의 기대에 충실했다.

그렇게 이들은 미시적 삶을 살았다. 적어도 자신은 편했고 주변 동료들에게는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작은 사회가 던지는 기대에 충실했다. 하지만 이들의 미시적 삶이 부딪혀 만들어낸 하모니는 어떤가. 6명의 안타까운 사망은 둘째치더라도, 언젠간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서 치부로 평가받을 사건이 탄생했다. 한 명이라도 거시적 시각을 가졌더라면. 역사라는 담론까지 가진 못하더라도 내가 속한 더 넓은 사회를 한번쯤 생각했더라면, 과연 결과는 달라졌을까.

미시적 삶을 떠나긴 쉽지 않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이 때론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침묵한다. 정으로 묶인 관계의 고리를 끊기엔 미시적 삶의 유혹은 거시적 대의보다 강하다. 사람들은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둥글둥글하다'는 미사여구로 미시적 삶을 축복한다. 다른 생각을 하려하면 '모났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렇게 우리는 피곤한 철학자 보다는 행복한 바보가 되기로 선택한다.

가끔은 고민에 시름시름 앓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수록 그 고민들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금 알고 있던 걸 그때에도 알았었더라면’ 이제는 식상해진 시 구절.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그 구절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 알고 있던 걸, 그때에는 몰랐어야만 한다.


이예나 / 순천향
med-news@hanmail.net

편집장이 되고 난 후 축하한다는 말과, 걱정하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왜 편집장이 되고 싶었냐고 물어보진 않더군요.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과 답을 혼자 해볼게요. 제가 왜 편집장을 하게 되었을까요. 전 '편집자가 독자에게'를 참 써보고 싶었습니다. 내 이야기가 자리잡을 손바닥만한 공간이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제게 펼쳐질 일 년간의 성장통은 모두 이 손바닥만한 공간을 갖기 위함이라 생각하고 끌어안을게요. 홀로 던져진 세상에 내 이야기를 풀어낼 공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인가요. 그 위안도 기쁨도 고민도 모두 감내하겠습니다.


 

... 첫 느낌

첫 느낌이란 건 아직 순수하단 것.
두 번째 느낌이란 건 여유로워 지는 것.
세 번째 느낌이란 건 다시 처음의 관심, 그 작은 사랑이 그리운 것.
『첫 느낌』 - 풍류


 


기자 생활을 처음 할 때가 생각이 난다. 의과대학 입학도 하기 전, 합격 통지만을 받고 나서 인터넷 홍보 글을 보고 가입 신청서를 작성해서 보낼 때의 그 떨림. 컴퓨터로 작성해서 보내면서도 자필로 작성해야 되는 건 아닐지 걱정했을 때의 마음과 당시 편집장에게 처음 연락이 왔을 때의 느낌. 기자교육을 처음 받던 그 시절의 그 생동감과 ‘순수’가 새삼 떠오르게 되는 오늘이다. 처음 기자 회의에 참석하고, 내 손으로 배포를 시작했을 때의 즐거움이 아직도 떠오른다. 배포되고 있지 않던 신문이 내가 기자 활동을 함으로써 내가 다니는 학교에 배포된다고 생각했을 때의 설레임. 뭔가 학교 내에서 한 가지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비단 기자 생활만 이랬을까? 의과대학에 처음 발을 들일 때의 당신에게도 첫 느낌은 있지 않았을까? 간단하게는 “멋진 의사가 되겠다”부터 복잡하게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매일 환자를 살려내는 외과 교수가 되겠다.”까지. 나에게도 이런 시절은 존재했다. 무식하지 않은 의사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신문사에도 지원한 것이었다. 취미 생활을 만들기 위해서 악기도 시작했고, 영어 회화 수업도 들었으며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교양 과목도 졸지 않고 열심히 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본과 1학년의 3월도 첫 느낌으로 가득찬 시기이다. 사실 배운 것이 없어서 시험을 볼 수 없는데도 항상 본과 1학년의 도서관에는 공부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차 있다. 해부학의 간단한 것을 배우면서도 초롱초롱한 눈빛이 살아 숨쉰다. 아는 것은 별로 없는데도 굳이 해부학 용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하려고 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물론, 나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었다.

 첫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유’로 무장된 나는 ‘게으름’을 ‘여유’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예과 공부 필요 없어’부터 시작된 ‘여유’는 모든 일들을 허무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기자 생활도 가장 재미없었고, 편했다. 그 ‘여유’는 결국엔 내가 나의 의무를 다하게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당신에게 두 번째 느낌은 어떠했는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다 두 번째 느낌에 의한 허무를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았던 삶의 목표는 점점 바닥으로, 나락으로, 말초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낮아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개인적 취향 차이’와 ‘삶의 요령’이라는 그럴 듯한 표현으로 당신의 추락을 포장한다.

 공부에서도 두 번째 느낌에 의한 추락은 거듭된다. 3월의 반짝이던 눈빛, 열기에 가득찬 도서관은 온데간데 없다. 교과서를 쳐다보기 시작하던 일부 무리들도 노트와 야마로 무장하고 ‘현실’을 인정한다. 골학과 스컬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아이들 중 일부는 생화학과 생리학 시간엔 잠을 청한다.

 아무도 모르지만 어느 덧 의대생활, 기자생활도 햇수로 4년차가 되었다. 실패가 있었기에 더더욱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시 처음의 순수와 작은 관심이 그리워진다. 어쩌면 철없게 볼 수 있을 신입생들의 가벼움은 나에게 당시의 첫 느낌을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기자 생활의 허무를 뒤엎고 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새로운 느낌을 만끽하고 있다. 내 생활을 변화시켜주는 ‘철없는’ 열정이 다시금 깨어난 듯하여 뿌듯하다.

 당신에게 첫 느낌은 어떠했는가? 이제 다시금 그것을 깨우고, ‘열정’이란 무기를 가져와서 더 큰 힘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닐까.

유영재 기자/ 전남
<yjyoo1@naver.com>

[67호] 태연도 알기 힘든 의료법

67호/오피니언 2009. 7. 18. 23:19 Posted by mednews

태연도 알기 힘든 의료법

대중들의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 의료법 상의 책임 범위


인기가수 소녀시대의 멤버 태연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간호사 관련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 1월 16일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주사를 맞으려고 병원에 갔다. 감기에 걸려 찾아간 병원에서 간호사가 점심시간이라 주사를 놓아주지 않았다”며“한바탕 하고 싶었는데 소심하게 그냥 나왔다”라고 불만을 토로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의사의 오더 없이 독단적으로 주사를 놓아줄 수 없었던 간호사의 역할 범위를 제대로 알지 못했었기에 빚어진 일이다.

원칙적으로 민사적 책임에 관해서는 간호사가 실수를 하더라도 책임은 의사가 지도록 되어있다. 간호사란 ‘상병자(傷病者)나 해산부의 요양을 위한 간호 또는 진료 보조 및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보건활동을 임무’로 삼는 자(의료법 제 2조 2항)라고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판례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의 경우 간호사의 의료행위는 전적으로 의사의 보조에 그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연의 사례에서 문제가 되었던 주사의 예를 들어보자면, 주사란 주사기라는 의료 기계를 사용하여 주사액이라는 의약품을 체내에 주입하는 치료행위이다. 따라서 주사 역시 의사가 행해야하지만 의사의 지시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간호사 역시 주사를 행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피하주사, 피내주사, 근육주사는 의사의 지시에 의해 간호사가 행할 수 있지만 정맥주사의 경우, 이것이 간호사의 업무에 해당하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엄연한 비 진료시간인 점심시간에 진료 행위를 요구했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비 진료시간에도 급환을 위하여 운영하고 있는 응급실이라는 의료 체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의원에서 비 진료시간에 진료를 해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은 우리나라 환자들의 의료체계에 대한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는 것. 더군다나 방송 진행 중 주사를 임의로 놓는 것은 간호사의 권한 밖이라는 사실을 청취자가 알려주었을 때 ‘아픈 제가 잘못이네요’ 라는 식으로 코멘트를 마무리 지은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 상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하고 나서야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태연의 간호사 관련발언 파문에 관해 비단 태연의 잘못이라고 비난하기에는 적잖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의료인이 아닌 일반인이 의료법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있기를 기대하기가 어렵고, 더군다나 의료법 자체도 모호한 용어의 정의로 인하여 끊임없이 개정논란이 일고 있을 정도로 정확한 해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법조인과 의료인들도 정확한 해석이 어려운 의료법을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정확하게 개정해나가는 일은 결국 의료계와 법조계의 공동책임일 것이다.



권의종 기자/가톨릭
<isnell@cyworl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