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수필부문
대 상
분만실, 탄생 그리고 재회
이지선 (가톨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4학년)
나는 탄생부터 쉬운 딸이 아니었다. 1987년 8월 19일. 엄마는 찌는 더위 속에 12시간이 넘는 진통을 겪고서야 나를 품에 안았다.
어린 시절에는 수없이 잔병치레를 하여, 병원도 없던 시골마을에서 자가용도 없이 어렵게 옆 도시의 병원을 오가야 했다. 성격은또 내로라 하는 황소고집이어서 한여름에 겨울 외투를 입고 유치원에 가겠다고 떼를 쓰는 등의 에피소드는 나를 낳은 엄마가 감내해야 했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사춘기 때는 급기야 가출까지 감행하기도. 사람들이 엄마에게 ‘공부잘 하는 딸 두어 좋겠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엄마는 침묵의 미소로 대답하거나,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럼 한 번 데려다 키워 보세요.’라고 말했다. 엄마에게난 결코 ‘간단한’ 딸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자 내 일탈은 그 차원이 한층 과감해졌다. 나는 멀쩡히 잘 다니던 학교를 돌연 휴학하고 홀로 1년간 중동과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반대하던 아빠를 설득하도록 도와준 건 엄마였지만, 그런 엄마도 공항에서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네 결정이니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말은 울먹이는 소리에 묻혀희미하게 들렸다. 내가 본 엄마의 첫 눈물이었다. 내가 세계를 누비며 새로운 것들을 흡수하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만끽하던 시간 동안, 엄마는 딸에 대한 걱정을 꾹꾹 가슴에 눌러 담고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던 인고의 시간을 견뎠을 터였다. 하지만 엄마의 그런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내겐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신나고 즐겁기만 했다. 그리고 이런 내 삶의 방식은 그 후로도 변함없이 이어져갔다.
2016년 1월에는 IS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중동을 향한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남들 눈에는 어쩌면 정의롭고 대단하게 보일,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들을 도우러 떠난다는 의대생 딸은 그렇게 또 불시에 엄마의 마음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도 엄마는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파리테러, 그에 가려 언론에 조명되지 않았던 레바논 테러, 전 지구적충격과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인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극단적으로는 목숨이 위태로울 가능성마저 떠안아야 했던 그 곳, 그렇지만 나는 꼭 가고 싶었고 가야만 했다. 나에 대한 걱정으로 엄마가 느꼈을 두려움 따위는 역시 안중에 없었다. 그저 내 자아의 완성과 내신념에만 골몰했을 뿐이었다.레바논에서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데에 대한 안도도 잠시, 나는 선택실습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방글라데시행 짐을 꾸렸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시골 마을 구석에 있는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만 무려 다섯 대, 그렇게 꼬박 3일. 오가는 길조차 험난한 여정이었다.
먼 길을 떠나온 만큼이나 내 마음도 집으로부터 멀어졌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빠르게 적응하며 다른 의료진들, 환자들과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새롭게 마련된 내 복잡한 삶 속에, 타국에서 실습하는 딸 때문에 매순간을 노심초사하며 지낼 엄마에 대한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내가 참 많은 시간을 보냈던 분만실, 커튼으로 가려진 8개의 침대가 놓인 그 곳은 매우 분주했다. 산모 수에 비해 의사 수가 턱없이 모자라 특별한 문제가 없는 자연분만은 모두 조산사들의 몫이었고, 간호대 학생들이 이를 도왔다. 그러다보니 의대생인 내게도 한국에서 익숙해져 있던 ‘멀찌감치 참관하는’ 역할이 아닌, 보다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었다.첫 인사를 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조산사들이 나를 찾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는 질끈 묶고, 여러 개의 장갑을 갈아 끼우며 바쁘게 움직였다. 오랜 진통의 기다림, 생명 탄생의 순간, 갓 태어난아기를 품에 안은 산모… 새로운 인격체가 세상의 빛을 보기를 준비하는 시간부터 생의 첫 시작을 마주한 순간까지 모든 과정이 정신없이 분주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내게도 새 생명을 내 손으로 맞이할 첫 기회가 주어졌다. 산모의 가장 가까이에서, 온힘을 짜내어 세상을 향해 머리를 밀고 나오는 작은 생명체를 기다리는 시간. 산모와 아기,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분만실을 시끄럽게 채우던 산모들의 고통어린 신음과 비명, 갓 태어난 아기들의 울음소리, 의료진들끼리 다급히 지시사항을 주고받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새 생명을 기다리는 산모의 거친 숨소리, 산도 내에서 아기가 벌이고 있을 치열한 사투,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내 긴장가득한 의지. 그게 전부였다.
서툰 방글라로 “조금 더!”, “힘을 주세요!”라는 말을 수없이 외치고 나서야 뱃속 아이는 열 달을 머물던 엄마의 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경험 많은 조산사의 지시에 따라 아기의 머리를 잡고 그 탄생의 완성을 도와 엄마에게 안겨주었다. 생명의 탄생은 고귀했고,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생의 출발을목도했다는 것, 그 과정에 두 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동원해도 표현해낼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 뜨거운 감격 앞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려 했다. 애써 평정심을 되찾아 아기의 탯줄을 자르고, 태반을 꺼내고,산도의 열상을 조심스럽게 봉합해주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다 마치고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야 비로소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탄생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흥분하느라 그 생명을 몸속에서 길러내고 빛을 보게 해준, 앞으로 긴시간 이 아이를 키우며 울고 웃을 엄마에게는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다. 치열한 고통의 과정을 이겨낸 후의 기진맥진한 표정, 그러나 한없이 평화로운 미소.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양극의 표정이 어우러져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모습은 어떤 화려한 배우들보다 아름다웠다. 그때 문득 그 얼굴에서 나는 내 엄마를 떠올리고 말았다. 방글라데시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
약 28년 전 한국의 어느 병원에서 나는 저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열 달간 한 몸으로 지낸, 그 순간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분리되어 이후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엄마에게서 멀어져 갈 나와 마주했을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달게 견뎌냈던 고통으로 낳은 딸이 당신의 품을 떠나 수없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던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되었다. 28년의 세월 동안 쉼없이 엄마의 마음을 괴롭혀온, 그러면서도 ‘나’의 삶을 엄마가 존중하고 받아들여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오로지 내 주장만을 내세워 온 그동안의 삶을, 나는, 낯선 나라에서 직접 아기를 내 손으로 받으며 민낯으로 마주했다. 부끄러움의 따가운 볕이 그 민낯 위로 쏟아졌다. 분만실 한켠에서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몹시 미안했고 많이 감사했다.
그 후로 약 열 건의 분만을 더 내 손으로 진행했다. 이제는 아기와 산모뿐 아니라, 진통의 시작부터 출산을 마칠 때까지의 모든 과정 동안 산모들의 옆에서 물을 떠다 목을 축여주고, 손을 꼭 잡아주며 그들을 돌보는 산모들의 어머니들이 함께 보였다. 이제 막 엄마가 된 딸을 그 엄마는 대견하고 안쓰럽게 바라보며 보살펴주고있었다. ‘사랑’이라는 글자에 실체가 있다면 바로 ‘엄마’의 저런 모습이리라 싶었다. “나도 우리 엄마 보고 싶다.” 그때 나도 모르게불쑥 흘러나온 한 마디.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내 사랑의 실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그냥 많이 보고 싶어.’
│대상소감│
그래도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올 8월은 참 뜨거웠습니다. 엄마가 고통과 기쁨으로 저를 낳았을 8월, 저는 그런 엄마를 생각하며 이 글을 낳았습니다. 짧은 글 안에 긴 시간을 담아내면서 이제까지 살아오며 겪고 느꼈던 참 많은 경험생각들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기억 속의 저는 어렸고, 서툴렀고 그래서 아팠습니다. 아직도 깨닫고 다듬어져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더디게나마 성장을 하고, 조금이나마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려 준 엄마의 존재가, 기억을 꺼내어 글로 옮기는 시간 내내 머리와 가슴을 가득채워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혼자만의 기억 속에 넣어두었다가 점점 희미해질 뻔했던 기억과 생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시고, 이 부족한 기록에 과분한 상으로 격려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 글은 ‘제 6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한목적 외에도, 이번 제 생일날 엄마를 위한 선물로 준비한 것이기도합니다. 부모님 앞에만 서면 유난히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해지는저인지라 끝내 이 글을 엄마께 드리지는 못했는데, 덕분에 수상 소식을 전하며 다시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글을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글만이 아니라 표정과 말투에도 감사한 마음을 담아 그리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할 수 있는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감성을 애써 억누르고 그 자리를 딱딱한 지식으로 채워야 했던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지내다가 핀 줄도 모르게 져버린 벚꽃을 보며 놀랐던 적도, 매일 지나다니던 길에 있는 나무가 단풍나무였다는 사실을 낙엽이 다 지고 나서야 알았던 적도 있습니다. 병원이라는 현장에서치열하게 일을 해야 할 내년부터는 감성의 자리를 철저한 이성으로 대체해야 하는 순간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햇살을 노래하고, 그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환자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아주며 때때로 함께 눈물도 흘릴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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