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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수필부문
금   상

 

고통의 병태생리학(Pathophysiology of the Pain)

 

김양우 (한양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4학년)

 

며칠 전, 누군가 힘없는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고. 신을믿지 않는 나에게는, 그다지 깊은 울림은 아니었다. 독방으로 돌아와 책을 펴니 니체가 말했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 고통은 우리를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이렇게 전해들으면, 고통은 인간에게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주는 좋은 것이다.
MRI 촬영을 위해 온몸을 포박당한 채 시끄러운 기계음이 울리는 속에서, 나는 그렇게 지난 시간을 하나씩 복기해 보았다. 아무래도 성경보다는 니체 쪽이 이해하기 쉬웠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고통’이라니 내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말이다. 나의 고통은 두 군데에서 출발해 퍼져나갔다. 한쪽으로는 엉덩이에서 허리를 타고 올라가고, 다른 쪽으로는 이성에서 마음으로 내려왔다. 흉추가 가장아픈 걸 보니 두 줄기가 아마 여기서 만나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지…’라는 원망에서 ‘내가 왜 강해져야만 하는지’라는 한탄으로 머릿속 질문이 바뀌어 갔다. 이 고통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 나는 결국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강해질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강해져야 하는 걸까? 제발 나에게서 이 고통을 거둬 가시고 나를 나약한 그대로 내버려 두소서. 직접 겪는 고통은 전해들은 것과는 달리 하나도 좋지 않았다.
감정이 점차 격해지고 있던 찰나에 촬영기 밖으로 끌려갔다. 끝난 줄 알았는데 조영제 주사를 맞고 다시 촬영기로 들어갔다. MRI도 조영제를 맞는구나, 그때 알게 됐다. 일주일 뒤 나온 판독 소견은 역시 예상대로 강직성 척추염이었다. 양쪽 천장 관절(sacroiliacjoint)에 염증이 심하게 생겼고 뼈와 힘줄, 인대 군데군데에 손상과염증이 보였다. 제법 진행한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포도막염이 생겼고 안과에서 진료를 받은 뒤에HLA-B27 유전자 검사와 골반 X선 촬영을 했다. 의대 생활을 시작한 후 만성적으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 후 나온 영상의학적 소견까지 더하면, 나는 강직성 척추염의 교과서적 증례에 해당했다. 강의로만 듣던 희귀병인 줄 알았는데 바로 나한테 있던 병이었다. 현대 의학은 아직도이 병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바꿔 말하면 의대생인 나는 이병에 대해 알만큼은 알고 있었다.
병원 실습중에 외래 진료를 참관하면 수많은 환자를 보게 되는데 간혹 의사를 힘들게 하는 환자가 있다. 의사가 더 해줄 수 있는게 없는 상황에서 떼를 쓰듯이 말하는 사람들이다. 가만 들어보면 무엇을 해달라는 구체적 요구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달라는 하소연을 하고 있다. 대기자는 수없이 밀려 있고 응급 상황도 아닌데 자기 생각만 하는 이런 사람들은 종종 교양이 없다는비난을 듣는다. 누구나 고통스럽고 어렵다. 병원이라면 특히. 의사가 이미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문제다. 아무래도 의학지식과 사회경제적 수준이 배려심의 양을 정하는 게 아니겠냐는생각이 들곤 했다.
포도막염을 진단받던 날, 눈의 통증이 극에 달해 있었고 자가면역이 원인일 수도 있기에 걱정이 많았다. 병원 실습도 계속되어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환자로서는 최고의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교수님께 공손히 내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차분하게 검사를 받았다. 실습과 진료를 같은 병원에서 해결하니 동선도 간단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일정을 위해 응급실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 카톡이 왔다. 오랫동안 아프시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모든 상황은 우연히 이어졌다. 그런데 아버지의 카톡을 본 순간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 그 어떤 드라마도 소설도 흉내낼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가 있다는 사실을. 사르트르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사이에 선택만이 있다고 했지만, 틀린 말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는삶이라는 무의미하고 가는 실로 이어져 있고, 삶은 고통이라는 주파수로 가끔 흔들리며 의미를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일부러 고통을 선택하는 인간은 없다. 스스로 고통을 선택했다며 자기 위안에빠질 뿐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친할머니의 장례는 미사로 치러졌다. 신부님은 죽음 앞에 삶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예수님이 나약한 우리를 어떻게 품어주시는지 나긋나긋 시를 읊듯 말씀하셨다. 친할아버지는 지난 삶을 회고하고 남은 삶을 두려워하며 관을 부여잡고 슬프게 우셨다. 따라 울음을 터뜨린 아버지는 입을 벌리고 목을 놓았다. 마치 갓난아기 같았다. 아버지의 아들인 나도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포도막염이 낫지를 않아 눈물이 차오르면서 안구에 통증이 왔고, 피로가 겹쳐서 허리가 너무 아팠다. 참기 어려운 고통속에서 내 몸과 내 영혼은 파르르 떨며 “끼이익 끼이익” 서툰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이 비명 같은 연주는, 인생에서 서곡조차도 될수 없는,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를 확인하는 조율 정도였을 것이다.이 고통을 이겨내면 나는 더 나은 인간으로 더 좋은 소리를 낼 텐데,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차라리 아무 일 없는 채로 그냥 못난인간이 되고 싶었다.
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분명 종교나철학보다는 훨씬 고통의 실체에 근접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을넘어 고통을 낫게 하거나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의학이 참 대단하다고 믿었는데, 나에게 찾아온 만성적 허리통증과 희귀병이라는 절망감, 가족이 함께 겪는 상실감 앞에서 이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말기암이나 중증 폐질환도 아니고 내가 열심히 살면 극복할 수 있는 ‘나를 죽이지 않는 고통’임을 잘 알고 있는데도 나는 한없이 나약해졌다. 고통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고통 그 자체다. 의학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의사는 인간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가치중립적이고 차가운 의학과는 달리 의사는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고통에 대해 잘 알려줄 수 있다.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고 치료법은 무엇이고 그다음 치료법은 무엇인지까지 알고있다. 나도 내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을 잘모르겠다. 내 삶은 왜 이렇게까지 고통에 떨면서 가냘픈 울음을 울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서 사실 나는 내 고통에 대해 잘모르고 의사 역시 인간의 고통에 대해 조금도 아는 바가 없다.
이제 내가 의사가 된다면, 인간의 고통을 실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나는 의사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도 그 고통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고통이 흔들고 있는 삶의떨림을 보고, 그 떨림이 내는 서툰 연주를 들으면서, 내 고통의 악보로 내 삶을 함께 연주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유일하게 이해할수 있는 고통의 의미다.


│금상소감│
고통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이해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에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 두 번째 응모했습니다. 일찌감치 글을 준비하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이 많은 제 작품에 큰 상을주신 것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수필의 제목을 다소 특이하게 짓고 싶었습니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대학교 학보사에서 학생 기자 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제목을 짓는 데 세심하게 공을 들였습니다. 병태생리학이라는 말은 의학 교과서에서 질병의 생물학적 기전을 다루는 기초적인 단원의 제목입니다. 고통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이해를 말하고 싶은 의도도 있었고 프랑스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깡길렘의 저서인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에서 착안하였습니다.
고통은 의학에서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도 하면서 정상적인 신체의 반응으로 보기도 합니다. 종교나 철학에서도 고통을이중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실존에서 고통은어떤 의미인지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의 체험을 통해 이를 표현해보고 싶었으며 의학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작품 내용 중에 니체나 사르트르가 언급된 것도 그런 뜻이었죠.
투고를 할 때에는 몰랐는데 황현산 선생님께서 심사를 해주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이 글을 선생님께 보일 수 있어서 기쁘고영광스럽기도 한 한편, 졸문을 보여 제 미흡한 수준을 들킨 것 같아 한없이 부끄럽기도 합니다.어머니께서 제가 아픈 걸 아시고 많이 슬퍼하셨습니다. 제가 아픈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면서 항상 제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이 어머니께 죄송했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드리게 되어 걱정이 됩니다. 아들을 걱정하시는 어머니의 고통을 이해할 날이 오게 될까 아득하기만 합니다.앞으로도 끊임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