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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경의 역사

77호(2010.10.11)/문화생활 2010. 10. 10. 21:39 Posted by mednews

응급의학에는 ‘ABC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응급환자의 생명 유지를 위해 기본적으로 행해야 하는 응급조치를 뜻하는 말로 각각 Airway(기도확보), Breathing(호흡유지), Circulation(혈액순환)을 일컫는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A, 바로 기도폐쇄 여부를 확인하고 교정하는 과정이다.
일단 환자의 목을 뒤로 젖히고 입안에 분비물이 있으면 제거한 후 자발호흡 여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호흡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면 기도를 확실히 유지하기 위해 ‘기관내삽관’을 시행한다. 후두경으로 혀를 옆으로 밀어내고 성대 사이로 튜브를 집어넣는 이 간단한 행위를 통해 환자는 충분한 양의 산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모두 후두경이 상용화되기 시작한 1940년대 이후의 이야기다.
그럼 그 전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몇 세기 동안은 기관절개술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기관절개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3600년경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길다. 하지만 소독하지 않은 수술기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이 매우 심각했다. 가로로 절개하다가 목동맥이 파열돼 죽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의 기관절개술과 비슷한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해 낸 사람은 16세기 말 해부학자이자 외과의사인 파브리우스였다. 그는 세로로 절개한 후 튜브를 꽂아 기도를 유지하는 방법을 제안했고, 이후 기관절개술은 발전을 거듭해 두부외상이나 종양으로 인한 심각한 기도폐쇄와 장기간 기계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중환자에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기도유지가 필요한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너무도 침습적이고 위험성이 컸다.
19세기 프랑스 소아과 의사 부샤는 디프테리아성 위막염으로 후두폐쇄가 온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작은 금속튜브에 실을 매달아 성문에 집어 넣는 방법을 썼다. 몇몇 외과의사들은 클로로포름으로 전신마취를 할 때 기도유지를 위해 구강을 통해 삽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대를 보기 위해 거울 두 개로 빛을 이리저리 반사시키는 원시적인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기관내삽관이 보편적으로 이용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모든 불편과 수고를 덜어준 사람은 독일의사 키르스타인이였다. 키르스타인 이전의 의사들은 바깥쪽에서 성대를 본다는 것은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키르스타인은 어느날 동료 의사 하나가 환자에게 식도경을 삽입하는 도중에 우연히 식도경이 후두를 통해 기관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후두경 검사법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윽고 그는 식도경을 변형시킨 기구를 만들어 한번에 성대를 보는 데 성공했다.
사실 그가 만든 최초의 기구는 현대적 관점에선 매우 조악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기구의 사용이 빈번해지고 또 그 모양이 실용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부상당한 병사를 수술할 때에 기도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두경’이라 이름 붙여진 이 기구는 이후 날 끝에 전구를 달고 자루에 건전지가 들어가고 부드럽게 휜 날 모양을 택하면서 점차 현재의 형태를 획득했고, 유용성은 나날이 높아지게 되었다.
현재 가장 널리 이용되는 후두경은 곡선형 날의 매킨토시 타입이다. 이보다 전에 개발된 직선형 날의 밀러 타입은 주로 소아에 사용되고 있다.
오늘 날에는 Fibrelight mccoy laryngoscope 등 여러 종류의 후두경들이 많이 개발되어 마취 및 호흡관리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정다솔 기자/중앙
<astronova@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