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와 챔피언이 된다’
지난 9월 15일 이승복 박사 전남의대 강연 스케치
사지마비 척수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승복 박사는 현재 존스홉킨스병원 재활의학과 의사로 재직하고 있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으며, 여러 강연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고 있다. 지금부터 ‘한계와 챔피언이 된다’라는 주제로 펼쳐진 다사다난 했던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자.
1부 한계
그에게는 두 개의 꿈이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것과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첫번째 꿈 :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1978년, 8살이었던 이승복 박사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약사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청소일을 하게 되셨고 어머니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게 되셨다. 기회의 땅의 표상이었던 미국은 그가 보기에 빈껍질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화목했던 가정이 그리웠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접한 이질문화는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도시락을 보며 냄새 나는 중국요리라고 기겁하는 미국인들. 그들에게 김치는 붉은색 샐러드, 멸치는 눈알 박힌 물고기로 비춰졌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던 그가 우리말을 하면 돌아오는 것은 무시뿐이었다. 그래서 이승복 박사는 빵과 우유를 먹으면 미국인들처럼 될 것 같아 먹기를 꺼려했다.
미국생활에서 소외감, 외로움을 느끼던 중, 한인교회는 소속감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마음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무엇으로 공허함을 채울 수 있을까?’
어느 날, YMCA에 숨어들어가 보게 된 체조경기가 공허함의 답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기절할 정도로 황홀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더하여, 루마니아의 나니아 코마네치 선수가 체조경기에서 10점 만점을 받으며 그녀의 조국을 빛내는 영웅이 된 장면은 그를 더욱 불태웠다. 사랑하는 조국에 금메달을 선사하면 모든 한국인의 자랑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집을 떠나 체조선수가 되기 위한 긴 여정에 발을 내디뎠다.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잃는 것 뒤에 얻는 것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확신에 훈련에 매진하였다.
마루운동을 하던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한다. 평소처럼 도움닫기를 했고 공중동작을 마쳤고 마무리동작만 하면 되는 찰나, 발대신 얼굴로 착지해 버리고 만다. 몇 초간 정신을 잃고 깨어났다. 다시 일어나 연습을 하려는데 일어날 수 없었고 눈 앞에는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지나갔다. 한국에서의 추억, 미국 생활, 웃는 친구들 모습, 한인 교회의 추억, 올림픽 꿈을 좇기 위해 집을 나선 순간…
어머니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고 아버지는 ‘부모님 말을 거역해서 그렇게 된거다’라며 질책하셨다. 부모님, 가족을 위해 택한 꿈이었는데, 아버지께 이런 말을 들으니 자신의 인생이 실패작이 된 느낌이었다. 다신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고 쓰레기가 된 느낌이었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사라졌다. 다시 걸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공허함은 커져갔고 희망과 의지는 사라져갔다. 휠체어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끔찍한 악몽이길 바랐다. 회복하여 다시 올림픽 꿈에 매진할 생각뿐이었는데 사지마비를 통보 받은 것은 그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 그는 가장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옷입기, 물마시기, 숟가락질 연습 등 재활치료를 열심히 하였다.
두번째 꿈 :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의사가 되리라.
-‘Even my parents, “this is impossible to you, go to the medical school”’
SAT를 준비하여 뉴욕대학교에 입학하고, 남들보다 2~3배의 시간을 들여 의욕적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체조에서 공부위주로 삶을 재편성한 것이다. 하지만 의사를 꿈꾸는 그에게 ‘가능하다’라고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건 힘들 것 같다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공부하여, 컬럼비아대학교 공중보건학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UN에서 경력도 쌓았다. 그 결과 졸업 때 학교장 추천으로 다트머스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최우수 졸업생이 된다. 그리고 하버드 인턴프로그램을 통해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
하버드대학병원에서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눈물 속에서 24~36시간이상 자신과의 싸움을 견뎌내야 했다. 밤에 잠을 못 자도 계속 전진해 나가야 하는 생활은 제 2의 올림픽 레이스와도 같았다.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도 그는 교수, 동료들의 추천을 받아 올해의 인턴으로 뽑히게 된다. 레지던트와 펠로우 과정도 무사히 마쳐 결국, 미국 최고 병원인 존스홉킨스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의사로 일하게 된다.
이승복 박사는 사지마비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꿈을 이뤄냈다. 같은 처지의 환자들에게 좌절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는 환자와 의사관계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먼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이점으로 꼽았으며, 이는 자신의 한계와의 싸움으로 얻어낸, 심장 내 태극마크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새로 시작한 제2의 올림픽에서 그는 한국인으로서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는 자신이 만듭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답은 본인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한계를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뛰어 넘어 왔습니다.’
2부 챔피언이 된다.
- ‘All of you, future of KOREA’
챔피언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한계와 불가능을 이겨내어 자신의 성취를 이루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이승복 박사의 챔피언에 대한 정의이다.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가 한국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그를 통해 좌절이 결코 절망이 아니라는 것,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열정과 꿈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주길 바란다. 덧붙여, 뼈를 깎는 노력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 30년 전에는 미국생활이 하기 싫었으나, 이제는 저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미국생활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을, 의사로서 환자들을,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주변인들을 사랑하세요.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받을 대한민국을 위해서 열정이 넘치는 목표가 희미해지기 전에 그 꿈을 다잡고 이룰 수 있도록 해요. 진정한 챔피언을 위해…’
마지막으로 이승복 박사는 질의응답을 통해 다음을 전하였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언젠가 한국에 와서 의료계 리더를 가르치는 것이 또 다른 목표라 한다. 더불어 장애인으로서 모든 분야가 도전이었던 그는 한국인들이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그들을 정상인으로 대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또한, 의사를 향한 꿈에 유혹의 손길이 있다면 왜 의사가 되려 하는지 매일 자문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 더욱 꿈은 강해질 것이기 때문에...
강수진 기자/전남
<pi1125@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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