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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83호(2011.10.10)/오피니언 2011. 10. 18. 19:41 Posted by mednews

낙엽의 존재론

전쟁같은 한 주를 보내고 맞이한 어느 주말의 아침. 어쩐 일인지 이른 시간부터 눈꺼풀이 열린다. 그대로 다시 누워 잠을 더 청할 법도 했지만, 이날따라 몸이 가벼운 건 간만에 찾아온 여유를 더 깊이 들이마시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기숙사 문을 나선다. 제법 선선해진 공기 속에는 십여 년 전 만국기 펄럭이던 운동장의 흙냄새가 섞여 있다. 인근 공원을 향하는 한산한 길. 촉촉이 젖은 땅 위에 옅게 깔린 물안개가 밤사이 다녀간 비의 감촉을 넌지시 건넨다. 고3 시절 두 눈은 반쯤 감은 채 등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입으로 털어 넣던 샌드위치 맛이 문득 떠올라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직 문을 연 가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살짝 배가 고픈 이 느낌도 특별히 싫지는 않다. 아직 조금 덜 갠 하늘, 저 멀리 구름 뒤편으로는 반짝이는 노란 빛깔의 띠도 보인다.

공원의 초입에 심어진 크고작은 나무들의 밑둥치에는 아직 생기를 잃지 않은 노란 낙엽들이 지난밤 내린 빗물을 머금은 채 뒹굴고 있다. 매년 이맘때면 늘 보던 풍경에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치려는 찰나, 몇 개의 잎들이 가지를 붙잡고 있던 손을 살며시 놓더니 쌓여 있는 낙엽들 위로 사뿐히 몸을 누이고 이내 곧 낙엽더미와 하나가 된다. 그들은 그렇게 몸을 던져 나에게 알려주었다. 지금 쌓여있는 낙엽들은 바로 며칠 전, 몇 시간 전만 해도 싱싱한 푸르름을 뽐내던 잎새들이었음을. 낙엽이 된 잎새들은 빗물과 함께 그 자리에서 썩어 다시 나무를 키우는 흙이 될 것이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흙은 또다시 나무로 되돌아가 새로운 잎과 꽃과 열매를 맺을 것임을.

“Apoptosis”는 세포가 각종 분자신호에 따라 주위로 흡수되며 스스로 소멸하는 과정을 뜻하는 생물학-의학 용어지만, 그 어원을 살펴보면 잎사귀를 뜻하는 Apo와 떨어짐을 의미하는 Ptosis가 합쳐져 ‘낙엽이 떨어지다’라는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의 세포 안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생명현상과 가을이면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일상적인 풍경 사이에 영속성이라는 공통 키워드가 숨어 있다는 것은 수천 년 전에 이미 조명되어 있었던 셈이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또다른 자신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이들 낙엽의 눈으로 보면 부활을 선포한 예수님이나 윤회를 설파한 부처님이나 같은 인물이 된다.

따지고 보면 1초 전의 우리와 1초 후의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시간의 경과, 그리고 그 사이에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에 의해 새로운 자아가 덧씌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가치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지나온 시간을 받아넘기며 다가오는 시간을 새로운 의미로 채워나가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회의와 절망에 맞서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존재가 영속되리라는 굳건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근거해 스스로를 자유롭게 내던질 수 있는 담담한 용기이다. 혼신을 다한 내려놓음의 몸짓, 낙엽이 떨어짐은 과거를 끌어안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역동의 순간이다.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날씨가 맑게 개었다. 아직 싱싱한 잎사귀들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낙엽더미를 후광처럼 감싸며 살포시 내려앉는다.

편집장 최성욱
<editor@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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