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프로젝트
견갑골의 형태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종속이론’이라고 하면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느끼는 우리들. 호염기성구보다 호중성구가 훨씬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실물 무역량보다 금융자본 이동양이 천 배 가까이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한 우리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낯설어 하고, 모르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그래서 올해 의대생신문에서는‘의학과 인문사회학 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6권의 책을선정해 연구모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 째 시간으로 동양과 서양의 시선으로 바라본 몸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로 올려 보겠습니다.
『몸의 역사 몸의 문화』- 강신익
醫 이 한자는 우리가 배우는 학문인‘ 의학’에 쓰이는‘ 의’자 입니다. 이 글자에는 화살, 창,술을 뜻하는 부수가 모두 들어가 있지요. 화살에 의해 난 상처를 창과 술로 치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뜻으로 따지면 신음소리와 술을 결합한 글자죠. 그러니까 이 고대의 문자에는 외과(창)와 내과(술)가 포함되어 있으며, 고통(신음소리)과 치유(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 한자에는 술 주 자 대신 무당 무(巫)자가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의’자는 화살,창, 술, 무당으로 형상화되는 고통과 치유의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동양의학의 전통은 이런‘의’를 알아가는 과정을 중요시 했습니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기 보다는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수행의결과였습니다.
medical doctor 이전‘의사’를 뜻하는 영어단어는 physician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physic은 자연(nature)를 뜻하는 말이었죠.서양의학의 전통은 자연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전통에서 시작됩니다. 이를 반영하는 신화적 존재는 치유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와 건강과 보건의 신인 히기에이아(Hygeia)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관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서양의학도 현상을 바라보고,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치유하거나 자연 치유력을 보강하는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한 말, 전통과 서양의충돌이 일어나다
한반도에 살아온 이들은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醫의 전통 안에서 자연과 몸을 형상화하여 그 속에서 생활하다가 불과 백 년 남짓한시간 동안 physic을 의학의 주류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자연과 몸을 대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그 백 년전의 상황입니다. 구한 말, 그 백 년 전의 상황을 생각해볼까요?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은 조선인의 몸을 둘러싸고 우위를 다투는 투쟁이전개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서양의학의 보편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서양의학을 배우는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한 역사이지만 이러한 시선을 주도한 이들이 일제의 조선총독부인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 전통의학을 교육하는 공식 교육기관이나 면허제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동안 한의학은 공식적인학문기관을 가지지 못했고 의학으로 대접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 전통의학의 지지자들은 서양의학에 대해서 절대 부정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모든 것을 서구적 합리주의의 폭력적 시선으로 대상화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특히 당시 선교의사들은 지역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었으며 단지 서구의 시선으로 조선인들의 몸을 재단하기에 급급한 오리엔탈리스트였고, 일본의사들은 조선인의 몸을 노동력과군사력으로 보아 국가적 관리의 대상으로만바라보는제국주의의앞잡이였을뿐입니다.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든 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든 전통의학은 쇠퇴하고 서양의학이주도권을 잡은 것이 사실입니다. 양측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각각 의학을 철저히과학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한의학의 전통을지켜 서양의학의 폭력적 도전에 저항할 것인가 하는 양극단의 선지에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두 극단의 이분법 중어떤 선지를 택하든 간에 이런 구도가 한의학과 서양의학 공히 의학이란 것이 몸을 철저히객체화시킨 결과라고 봅니다.
‘몸’- 세계관이 어우러지는 역동적인 공간
우리의 몸을 객체화시킨다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라는 것은 단순히 몸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몸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가치체계와 세계관에 크게 의존합니다. 가령, 지금 의학의 새로운 조류를 생성하고 있는 건강 모델인 건강생성 패러다임(salutogenic paradigm)을 생각해 봅시다. 이 모델은 종전의 생물의학모델이나 생물-심리-사회모델의 정적인 객체화에서 벗어나, 완벽한 건강상태를 부정하고 삶의‘과정’자체를 건강으로 보는 시도지요. 이때건강은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쟁취할수 있는 전리품이 아니라 질병을 포함한 삶에대한 적응 과정입니다. 현대의 의학자들은 이러한 과정적인 접근을 통해 새로운 치유법을찾고 있습니다.
서구의 과학자들이 주창한 것처럼 여기지는이런 관점은 사실 우리문학에서도 이미 예전부터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조지훈이 작고하기 직전에 완성한 시 <병(病)에게>를 생각해봅시다. 수능 공부를 했던 여러분들께는 이미 익숙한 시입니다‘. ...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 그러나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병을 단순히 침투자로 보지 않고 생과 함께 하는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 이 시의 핵심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조지훈 시인의 독자적인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병을 앓다’는 뜻의 고어는‘병하다’였습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병은‘걸린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었던 셈이죠. 이러한 시선은 현대의 건강생성 패러다임과 일맥상통합니다.
인문학적 시선의 한계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의학적 전통을 건강생성 패러다임과 같은 대안에 포섭시켜 사람의 건강뿐만 아니라 의학의 건강도 도모하자는 요지로 결론을 내립니다. 굉장히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결론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식상하고 진부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교과서스러운 결론은 강단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몸에 대한여러 가지 시선이 투쟁하는 양상은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서 오는 투쟁이라기보다는 이권다툼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흔히 한의학이 몸을 자연과유기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실제 한의원에서 자연과 몸을 유기적으로 바라보는 철학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는 한의사는 드뭅니다. 고소득의 창출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데 있어서 자연에 의존하는치유법이 유효하다면 과정적인 시선을 잠시빌려오는 식이죠. 서양의학의 경우, 몸을 단지몸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강도가 말도 못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때문에 서양의학과 전통의학의 분쟁이 전통과 근대화 간의 상호소통 문제라고 보는 것은‘눈 가리고 아웅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이 저명한데 고고한 언어로‘소통’이나‘상생’을 이야기하기때문에 엉킨 실타래가 풀리지 않는 것이죠.
상반기 연구소모임을 마치며
물론 이 책이 순수하게 인문학적 시선으로여러 의학 간의 관계를 파악했기 때문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당연한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계때문에 이 책의 미덕까지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사회-경제적인 관계를 파악하기 이전에인문학적으로 우리가 당면한 상황을 바라보는것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살아야할 삶을 성찰한다는 측면에서 분명 강조되어야할 부분입니다. 그런 필요성에 의해 포럼 참여자들의 의견을 모아 이 책을 선정한 것이지요.
이전에 다룬 두 책 (비센트 나바로 - [현대보건의료와 자본주의], 미셸 푸코 - [임상의학의 탄생])에 비해서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포럼참여도도 높았고 수월하게 토론을 진행할 수있었습니다. 2009년 상반기 인문사회학 연구모임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하반기에도 다양한 주제와 열띤 토론으로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함께 하십시다.
■ 포럼참가자 : 김민재(순천향), 정다솔(중앙), 이현석(영남),유재호(성균관), 안지훈(영남), 한혜영(이화),이예나(순천향)
■ 포 럼 장 소 : 2009년 5월 2일 까페 작업실(홍대입구)
■ 정 리 : 이현석 기자/영남 <vandalit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