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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유익한, ‘유익한 공간’

 스터디, 동아리 모임을 할 장소를 찾고 있는 A씨, 편안한 분위기의 북카페를 찾고 있는 B씨, 번잡한 강남역에서 조용히 공부할 공간을 찾고 있는 C씨, 기부를 해보고 싶은데 아직 시도해보지 못한 D씨, 제3세계 어딘가에서 배고픔에 눈물짓는 어린이 E. 남자친구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만 장소가 없어 고민하던 F씨. 이 모두에게 유익한, ‘유익한 공간’이 있다. 
 유익한 공간은 ‘유익(有益)한’ 이란 의미 외에도 ‘UHIC(유익한 공간을 운영하는 아동구호사업 NGO 국제아동돕기연합의 영문약자)+an(~한 사람을 의미)’을 담고 있다. 이곳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고, 모든 수익은 ‘국제아동돕기연합’의 기아 및 질병퇴치활동, 아동 지원 활동, 아동 교육 지원 활동,성병 및 약물남용 방지 사업등의 복지사업에 쓰이고 있다.
 마당과 2층으로 이뤄진 이곳은 세미나와 스터디를 할 수 있는 세미나룸과 2~3명이 가볍게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친구와 조용한 공간을 찾기에도, 여러 명이 모이기에도 적당하다. 스터디 모임은 별도의 공간 이용료 없이 예약만 하면 음료나 식사에 대한 금액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이용된다.
1층 한쪽 벽면은 사람들의 기부를 통해 구입한 책들이 가득 차있어 이용 도중 자유롭게 읽어볼 수 있다. 또 키친 스튜디오를 예약하면 친구들과 따뜻한 느낌의 작은 부엌에서 직접 요리도 할 수 있다. 유익한 공간에 방문한다면 ‘국제아동돕기연합’이 발행하는 월간 잡지 <Ue>도 만나볼 수 있다.

·찾아가는 길 : 강남역 7번 출구 CGV 옆 까페골목을 따라 직진 후 ‘유나이티드 문화재단’ 옆 분홍색 마당 이 있는 2층 건물(02-3453-0744, 02-3446-8442)
·요금안내 : 커피와 차(리필가능) 3000원, 아이스티, 탄산음료, 카푸치노, 까페라떼 등 3000원부터 5000원. / 카레류 : 5000원부터 8000원. / 파스타와 피자 : 10000원부터 13000원. / 키친 스튜디오 : 3시간 이용 시 7만원(조리도구, 식사도구, 기본양념 제공)

박소현 수습기자/이화
<lamia31@e-mednews.com>




 

수(秀)상한 의대생 2회

 시간이 흐를수록 homogeneous(균질, 동일)해져 가는 우리들. 하지만 남다른 생각으로 자신의 끼와 재능을 펼치는 heterogeneous한 의대생들도 강의실에 존재합니다. 2010년, 의대생 신문이 6회에 걸쳐 빼어난(秀) 재능과 남다른 생각을 가진 그들을 지면에 소개합니다. 이름하여 수(秀)상한 의대생! 그들의 생각의 좌표를 함께 따라가 봅시다.

의대생, 음악으로 소통하다

2집 뮤지션 미즐리, 의대생 이준형의 이야기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아시아드 경기장에 조금은 특이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양방언이 작곡한 크로스오버 피아노 협주곡 <프론티어frontier>였다. 재일교포 출신인 음악인 양방언은 니혼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한 의사로,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활약하는 크로스오버 작곡가이다. 음악과 의학, 두 가지를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양방언씨처럼 큰 간극이 존재하는 두 분야에 도전하는 의대생이 있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 미즐리(Misely)이다. 중앙의대 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준형씨는 미즐리라는 예명으로 2장의 정규 앨범과 1장의 싱글 앨범을 낸 실력파 뮤지션이다. 봄의 문턱에서 뮤지션 이준형씨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Misely, 음악을 시작하다

 미즐리는 이준형씨가 사용하는 예명으로 Misty를 어감이 좋게 변형한 것이다. 중학교 시절, 인터넷 음악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지은 닉네임이 미즐리라고 한다. 미즐리라는 이름을 그의 처음 곡에 새기면서 그의 음악적 인생도 시작되었다.
이준형씨가 음악을 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이다. 컴퓨터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프로그램을 만지다가 우연히 접한 음악프로그램이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프로그램 상에서 나타나는 것이 신기했어요. 한 음, 두 음 컴퓨터 화면의 오선을 채우면서 음악을 통해 나를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때부터 저의 이야기를 음악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나 봐요.”
 음악에 빠져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실용음악을 전공하던 이준형씨는 갑자기 진로를 선회하게 된다. 전문 음악가의 길을 버리고 의대에 진학한 것이다. 자신도 진리라고 믿었던 음악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의대에 진학한 이유는 무엇일까? “점점 음악을 하면 할수록 음악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비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많은 프로듀서들에게 현재 음악 시장에는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프로듀서들의 현실적 조언 때문에 다시 수능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하던 만큼만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운 좋게 의대까지 오게 되었네요.”

Misely, 앨범을 내다

 남들처럼 예과를 보내던 준형씨에게 새로운 목표가 주어졌다. 아마추어 음악 사이트에 한, 두 곡씩 올리던 자작곡을 모아 앨범을 발매할 결심을 준형씨 스스로 한 것 이다. “예과 때, 놀면서 취미 삼아서 다른 음악 동호회나 아마추어 음악인을 위해 작곡해주면서 적당히 알바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음악적으로 도태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순간 무서웠죠. 음악에게 잊혀진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그때부터 제 자신을 재정비하기 위해 1집 앨범 발매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2007년 1집, 2009년 싱글 앨범을 냈다. 그의 완벽주의 성격 때문일까? 두 장의 음반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준형씨 스스로 모든 작업을 다 수행했다고 한다. “보통 작곡가들은 앨범을 제작할 때, 일을 분담해서 합니다. 하지만 저는 첫 앨범이어서 완벽하게 저의 색깔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저 스스로 작곡, 믹싱, 마스터링 등 많은 과정을 수행했습니다. 많이 힘들었지만 제 음악을 담았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미즐리 1집은 우리가 듣기엔 조금은 낯선 일렉트로니카로 구성되었다. 거의 모든 곡이 보컬이 없는 미디음악이었다. “1집 앨범이 가장 미즐리스럽다고 해야겠죠. 그래서 사실 대중이 듣기에는 많이 낯설었을 겁니다.”

Misely, 다시 공부하다

 본과에 올라가면서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도 조금 줄었다. 여유 시간이 없는 빠듯한 본과 1학년 생활을 하면서, 그는 음악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는 악상을 밀어내고 의학 공부를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힘들었던 해부학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음악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장 기다렸던 순간이었어요. 음악을 한동안 못해서 많이 힘든 시기였어요. 공부도 잘 안되고, 그렇다고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방학 동안 원 없이 음악만 했죠.”
 이런 음악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을까? 그는 2009년 성공적으로 디지털 싱글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번 앨범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미즐리스러운 앨범이었지만, 조금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음악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던 그의 음악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제 음악이 알려지게 된 건, 전 씨야의 멤버, 남규리씨 덕분이에요. 제 곡 <Grazie Il Mattino>를 남규리씨가 싸이월드 미니홈피 배경 음악으로 등록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어요. 남규리씨와 아무런 친분도 없는데, 제 곡을 자신의 미니홈피에 등록한 것이 무척 신기했어요.”

Misely, 사람과 이야기하다

 의대 생활 5년 째, 대학 생활을 하면서 준형씨는 사람과의 소통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의대 밴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여럿이서 하는 음악을 보았다. 미즐리의 음악에서는 주연이었던 준형씨가 밴드 내에서는 주변 세션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여럿이 만들어가는 음악을 배웠다고 한다. 이런 느낌을 살려서 준형씨는 2집 앨범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번 앨범은 제 음악 세계에서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앨범입니다. 그 동안 제 음악적 욕심 때문에 대중에게 낯선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이번 2집 앨범은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라나는 앨범이었으면 해요”
 2010년 3월 발매된 미즐리 2집 <fast& slow>에는 유독 보컬 곡이 많다. 사람들과 음악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준형씨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되도록 많은 분들이 들어주시고, 저에게 다양한 피드백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타이틀곡인 <DADA Dance>가 보컬곡인 이유도, 가사를 통해 미즐리의 음악에 조금 더 쉽게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냈는데, 이젠 세상에서 사람들과 음악으로 소통하고 싶어요.”
 끝으로 이준형씨에게 의대생으로서 음악인의 삶을 물어보았다. “의대생에게 음악은 하나의 탈출구에요. 각박한 의대 사회에서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음악은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입구이기도 합니다. 저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음악을 통한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 ‘의대생 이준형’이 아닌 뮤지션 ‘Misely’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뮤지션 ‘Misely’, 힘든 시기에도 음악의 끈을 놓치 않은 그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그의 음악적 지평이 이번 2집 앨범을 통해 더욱 넓어지길 기대해본다.

※ 미즐리 미니홈피: cyworld.com/misely

취재: 정환보 기자, 문지현 수습기자
정리: 정환보 기자/중앙
<chungwhp@e-mednews.com>




 

제중원, 한국의료의 역사

한국 최초의 근대의료기관이자 의학교육의 장

 제중원의 1대 원장 알렌이 의학도 황정에게 묻는다. “만약 앞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먼저 치료할 건가요?” 황정이 대답한다. “더 아픈사람을 먼저 치료하겠습니다.” “좋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다면요?” “그 또한 더 아픈사람을 먼저 치료하겠습니다.” 최근 TV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제중원’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구한말 이루어진 한국의료의 시초인 제중원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제중원의 시작과 발전

 한국에서 서양식 의료기술의 본격적 도입은 국립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에서 이루어졌다. 광혜원은 미국 선교사인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 고종의 윤허를 받아 1885년 2월 29일 서울 재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광혜원의 설립에는 당시 구한말의 역사적 배경이 관련되어 있다.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알렌은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주었다. 서양의학의 효과를 입증한 이 일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서양 의술이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곧이어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된 그는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고, 고종이 이를 윤허하여 설립된 것이 광혜원이다. ‘광혜’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서 일반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3월 12일 광혜원은 더 많은 백성들에게 널리 혜택을 주자는 취지 아래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이름을 바꾼 후, 왕실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초기의 제중원은 정부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동시에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전자는 재정지원과 행정을, 후자는 의사와 간호사의 파견 및 진료, 병원 운영 등을 담당하였다. 개원 첫해에만 10,000여명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당시 서양의학에 몰리는 백성들의 관심은 엄청났고, 보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제중원은 1887년 구리개(현재 을지로 부근)로 이전, 병원의 규모를 확대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여성 의료를 개선하기 위해 1886년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미국에서 파견된 여의사인 애니 엘러스(Annie J. Ellers)가 치료를 담당하였다.
 초대 원장이었던 알렌 이후 제중원의 운영이 헤론(J. W. Heron), 빈튼(C. C. Vinton)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체계가 해이해지면서 병원의 운영은 난관을 겪게 된다. 1893년 7월, 새로 부임한 에비슨(Oliver R. Avison)은 정부에 제중원의 정상화를 위한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마침 운영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었던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제중원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완전한 사립기관이 된다. 1900년 에비슨은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L. H. Severance)에게서 병원설립기금 45,000달러를 기부받아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편)에 병원을 세우고 제중원 대신 기증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 세브란스병원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소속으로 남아 그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다.

의료기관으로서의 제중원

 제중원은 서양의 근대의학을 기초로 한 의술을 최초로 펼쳐 조선인의 건강을 위해 큰 공헌을 하였다.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진료함으로써 온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켰고, 1895년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제중원은 방역의 총책임자로서 직원들과 함께 방역과 환자 치료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치과 진료를 진행하고,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료로 진료해주어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의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제중원에서 진료를 받는 환자들의 절반 이상이 무료로 치료받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제중원

 제중원은 조선에서 단순히 진료뿐만 아니라 근대의학교육의 시초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제중원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알렌은 예전부터 계획한 대로 조선 내 의료진 양성을 위해 의학교육을 추진하였고, 1886년 3월 29일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교육 기관인 제중원의학교가 문을 열었다. 첫 해에 학생 16명을 선발하였고 이 중 12명이 본과에 진급하였는데, 이를 한국 근대 의학 교육의 시초로 본다. 제중원의학교는 후에 세브란스의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1908년 7명의 1기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의 실존인물인 박서양도 그 중 한명이다. 제중원의 의학 교육은 4대 원장인 에비슨의 재임 시절 전성기를 맞이하여 이때 의학 교육의 체계를 다시 세우고, 해부학을 비롯한 다양한 의학 교과서를 한글로 번역해 출판하였다.
 이처럼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의료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서양의학의 불모지였던 조선에 처음으로 근대의학을 도입하여 왕족뿐만 아니라 의료의 변방지역에 있던 백성들에게도 진료를 베품으로써 국민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였다. 또 체계적인 근대의학교육을 시작함으로써 한국에 서양의학이 전파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드라마의 장면은 당시 제중원이 지위나 조건에 영향받지 않는 평등한 진료를 최우선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알렌 원장은 곧이어 황정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한가지에요. 의원은 환자를 거부해서는 안돼요. 그게 바로 의원의 처음이고 끝입니다.” 이 대사에서 제중원이 당시 어떠한 곳이었는지, 이곳의 의사들이 어떤 마음으로 환자들을 대하였는지 알 수 있다.


문서영 수습기자/을지
<celeste@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