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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괴담, 기우인가 실제인가 - ‘안아키스트’에 부쳐

 

 

최근 일부 부모들 사이에서 인터넷을 통해 ‘백신 괴담’ 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영국의 한 의사가 논문을 조작해 MMR(홍역·유행성이하선염·풍진)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의 대장외과 전문의 앤드루 웨이크필드는 자폐증 어린이 12명의 연구를 통해 ‘MMR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논문을 1998년 의학저널 랜싯(Lancet)에 기재했다.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논문의 내용은 각종 언론을 통해 전파되어 많은 부모가 아이들의 백신 접종을 거부했다. 결국 12년 뒤에 허위로 판명되어 그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백신 괴담’은 하나의 이론처럼 정착하게 되었다.

 

백신 괴담, 인터넷 까페 및 SNS를 통해 확산
과학적 근거와 거리 멀어
 
한국에서는 얼마 전 태어난 지 한달 만에 맞은 결핵(BCG)접종으로 두 살배기 아이가 걷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잇따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과 C형 간염 집단 발병 사태 등으로 병원에 대한 불신이 커지게 되면서 백신 거부 움직임은 더 가열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무접종’, 혹은 ‘자연접종’을 주장하면서 ‘자연주의 육아’를 표방하는 움직임은 인터넷 까페 및 SNS를 통해 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의 중심에 있는 까페 중 하나의 회원 수는 이미 4만 명을 돌파했다.

지지자들은 “백신접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백신접종에 대한 고지의무를 준수하는 안전한 백신접종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백신을 맞는 것 또한 개인의 선택이니 제대로 알고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물건 살 때 따져보고 사듯이 백신도 이것저것 알아보고 백신 설명서도 공부해보고 접종해보라고 권한다. 이들은 자신을 종교, 정치, 이념 등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안아키스트’라 지칭하면서 누구의 경험과 공부가 아닌 나의 경험과 공부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아키스트란, 해당 까페의 회원을 일컫는 말로 ‘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까페명의 준말이자 무정부주의자를 일컫는 아나키스트와도 동음으로 의미가 통하는 말이다.

듣기에는 그럴듯한 이러한 내용에는 심각한 맹점이 존재한다. 의약품 설명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환자용이고, 한 가지는 의료인용이다. 설명서를 두 가지로 만드는 이유는 무언가 감추기 위함이 아닌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의료인이 아니면 약 설명서를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고 오히려 필요 없는 정보로 인한 공포를 조성하여 정작 치료에 실패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법이나 주의 사항 등을 기본적인 사항을 포함하고 있는 일반인용 설명서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료인용 설명서가 따로 있다. 그런데 백신은 일반인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반인용 설명서가 없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의료인용 설명서를 보고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다. 오히려 심정지, 쇼크와 같은 백신의 부작용들만 보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복용하는 약물이나 심지어 건강보조제나 비타민 등에도 작용이 있는 만큼 부작용이 존재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상황에 맞게 적정 용량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부작용들이 약 설명서에는 모두 표기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를 전부 꼼꼼히 읽어보고 복용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백신에는 백설탕, 조미료뿐만 아니라 방부제인 유기 수은, 중금속인 알루미늄, 심지어 포르말린 까지 포함되어 있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래 전에 소아마비 백신에 설탕을 넣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백설탕은 근거가 없다고 한다. 조미료 성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백신에서 안정화제로 사용하는 MSG를 일컫는 말이다. MSG가 조미료의 성분인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MSG의 안전성은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조미료의 성분인 MSG가 백신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백신을 조미료만큼 몸에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수은 방부제로 사용되는 치메로살은 지금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유해성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알루미늄은 항체 생성률을 향상시키기 위한 성분으로 공기, 식품, 물 뿐만 아니라 산모의 젖과 조제분유에도 포함되어 있다. 포르말린은 살아 있는 미생물 또한 독소가 병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죽이거나 비활성화하기 위해 쓰인 후 제거된다. 극미량의 포르말린은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성분 자체가 어떠한 용도로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지 성분명만으로 위험성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도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백신 접종 필요성 느끼지 않아”…
인터넷을 통한 무분별한 정보 확산
국가도 의료 기관도 믿을 수 없어… 
 
이러한 비과학적인 괴담이 확산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백신에 대한 태도 변화때문이다. 백신이 없던 시절에는 전염병으로 인한 집단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 앞에 대책 없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 창궐했던 흑사병은 약 2500만명, ‘호환 마마’, ‘시두’라고도 불렸던 천연두는 유례없는 약 6000만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백신의 발명으로 대부분의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고 천연두의 경우 1980년을 기점으로 소멸되었다. 일부 제 3세계 국가를 제외하고는 전염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전염병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게 되었다. 백신 접종은 모두 필수이다 보니 전염병의 심각성보다는 오히려 백신을 맞고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위험을 더 크게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건강-믿음 모형(health-belief model)’을 들 수 있다. 건강 개입(health intervention)은 관련 질병의 심각성과 개입에 대한 안전성 및 효율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백신 거부에 적용시켜 보았을 대, 전염병 발생의 감소는 전염병과 수반되는 합병증의 심각성에 대한 지각을 감소시키므로 백신을 맞아야 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백신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고 굳이 맞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들은 백신 접종을 통해서 얻는 이익보다 백신 부작용을 통해 얻는 손해를 훨씬 크게 느낀다.
 
둘째,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와 인터넷을 통한 무분별한 정보의 확산 때문이다. 미국 국가 면역 조사에 의하면 남자이며 백인이고 수입이 높고 아이 엄마의 대학 진학률이 높을수록 백신을 거부하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즉, 사회경제적 수준이 높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백신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병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병원이나 보건소에 직접 가야만 했지만 스마트폰의 확산을 비롯한 인터넷의 발달은 건강 정보에 대해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접근성의 증대로 절대적인 정보의 양은 많아졌으나 오히려 신뢰성이 떨어지는 정보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인터넷 까페, SNS 등을 통해 유통되고 있는 정보 중에는 의학적 근거가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지난 6월 SNS를 통해 확산되었던 자궁경부암 백신 괴담은 부작용 사례를 지나치게 일반화하여 불안감을 조성한 사례 중 하나였다.       
      
셋째,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불안과 정부와 의료계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접종을 거부하고 자연주의 육아를 주장하는 이들은 백신 또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백신 접종을 포함하여 국가에서 시행하는 건강 정책과 지침을 따르기 보다는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직접 알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신만큼 효과적인 방법 없어…
전염병 확산과 위험성에 대해 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백신 예방 접종을 시행하는 이유는 예방 접종이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예방접종의 효과에는 직접 효과와 간접 효과가 존재한다. 직접 효과는 예방 접종을 직접 맞은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예방 접종은 개인이 감염되는 것을 막아주어 현증 감염을 막아준다. 임상 증세의 강도를 약화시키거나, 합병증을 줄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상포진 백신을 맞으면, 대상 포진을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포진 후 신경통의 빈도도 감소한다. 예방 접종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병원체가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을 줄이고, 확산을 줄이는 효과도 있는데, 이는 간접 효과이다. 이런 간접 효과를 ‘집단 면역(herd immunity)’ 라고 하는데 예방 접종을 받지 않은 사람이 간접적으로 보호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인구 집단의 예방접종수준은 백신마다 다르다.
실제로 소아 백신이 널리 사용된 이후로 백신으로 예방 가능한 질병은 소아와 성인 모두에서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예방 접종은 감염으로 인한 조기 사망과 질병을 방지할 수 있으며, 사망으로 드는 사회적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백신 거부 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영국에서는 홍역이 크게 유행하였다. 지난해 말 미국 디즈니랜드에서 발생한 홍역 집단 감염 또한 미국의 낮은 백신 접종률 때문이었다. 홍역 집단 감염은 14개 주로 확산되었고 대통령이 나서서 “홍역 백신 주사를 맞지 않으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건강도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세계 보건기구(WHO)에서도 ‘백신 기피에 대한 WHO의 권고’를 통해 백신을 거부하는 풍조로 인해 매년 150만 명의 어린이가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했다.

 

관련 전문가 및 정부, 국민의 소통이 우선 
필요성에 대해 납득시켜야

 

백신 접종을 거부 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얼핏 듣기에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백신 거부 또한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며 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맡기기에는 백신을 거부함으로써 생기는 다른 구성원들의 사회적 피해가 크다. 이들의 불안감을 단순히 무식함으로 치부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원인을 이해하고 국민 건강의 차원에서 충분히 설득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의료진을 포함하여 보건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부모가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주의 운동의 중심에 있는 인터넷 까페 또한 명문대를 나온 한의사의 저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 연구 결과에서도 접종 시 백신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답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사람에 비해 두 배 가량 많았다.

결국 백신 거부 운동은 일부 부모들의 지나친 걱정이라기보다는 정부와 의료계, 그리고 국민 사이에서의 불충분한 소통과 신뢰 관계 형성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 크다. 의료인이나 관련 전문가가 백신의 이익과 부작용에 대해 충분히 교육하고 이해시킬 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백신 거부로 인해 다른 구성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접종을 강제하고 부작용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창희 기자/이화
<patty90327@gmail.com>

 

내 인생의 영화, 패치아담스

113호/의료사회 2016. 11. 30. 22:07 Posted by mednews

내 인생의 영화, 패치아담스

 

 

 

초등학생 때 보았던 ‘연금술사’ 라는 책을 중학교에 졸업할 때 즈음에 다시 보며,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커다란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한바탕 받았던 기억이 난다. 같은 작품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는지에 따라 와 닿고 느껴지는 것이 정말 다른 것 같다. 그것이 아마도 문학작품을 한 번 읽고, 한 번 보고 그치면 안되는 이유일 것이다.
‘패치아담스’ 라는 이 영화도 그랬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봤던 이 영화를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의학개론’ 이라는 수업시간에 다시 만났다. 한정된 수업 시간 때문에 30분 정도에 다 볼만큼 교수님께서 5초 건너 뛰기를 많이 하셨는데도 어찌나 감동스럽고 눈물이 나는지. 보는 내내 정말 패치와 같은 의사가 되리라 다짐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헌터 아담스는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자살 미수로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그는 정신 병원의 동료환자로부터 영감을 받고 ‘상처를 치유하다’라는 의미의 ‘패치(PATCH)’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패치 아담스’로서 새 인생을 시작한다. 그의 꿈은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까지 치료하는 진정한 의사의 길. 2년 후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한 괴짜 의대생 패치는 3학년이 되어서야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빛나는 아이디어와 장난기로 환자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치유하려고 환자들을 몰래 만난다. 이 사실을 안 학교측이 몇 번의 경고 조치를 내리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 위의 허름한 집을 개조하여 의대생 친구들과 함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운다. 그러나 의사면허증 없이 진료행위를 한 것이 학교측에 발각되고 패치와 진실한 사랑을 나누던 동급생 캐린(Carin: 모니카 포터 분)이 정신이상 환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생긴다. 인간에게 환멸을 느낀 패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포자기 심정에 빠지지만,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다시 의사의 길에 의욕을 불태운다. 그러나, 고지식하고 권의적인 윌컷 학과장은 패치에게 퇴학처분을 내리자, 주립의학협회에 제소한다. 위원회는 학칙을 어겼지만, 그의 열정과 학업 성적을 인정, 마침내, 졸업을 하게 된다.
 
이것은 헌터아담스라는 본명을 가진 패치의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그후 12년간 패치는 의료 행위를 계속했고, 1만 5천 이상의 환자에게 무료 치료는 물론, 어떤 의료 사고도 일으킨 적 없다고 한다. 패치는 버지니아 서부에 105 평방미터의 땅을 구입했고, 현재 게준트하이트 병원을 건설 중에 있다. 또한 현재까지 1천여 명에 이르는 의사들이 그와 합류하기 위해 대기 중에 있다고 한다.
“질병을 치료하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 하지만 사람을 치료하면 언제든지 이기게 될 거야.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말이지.”
“삶의 기적에 무감각해지지 마. 항상 인간 육체의 놀라운 작동에 감탄하며 살아! 좋은 성적보다 그게 초점이 되게 해. 성적은 네가 어떤 의사가 될지 못 가르쳐줘.”
패치가 위원회에 회부되었을 때 했던, 나를 감동속에 빠뜨렸던 대사들이다. 패치는 보이는 질병 너머의 사람을 보고, 그 사람과 함께 웃고 울며 치료한다. 질병에 초점을 맞추느냐, 사람에 초점을 맞추냐의 기로에서 보이는 것 너머를 항상 봤던 패치였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되찾고, 승리할 수 있었다.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경지를 넘어, 사람을 치유하는 패치였다.
인간을 향한 애정으로부터 흘러나온 그의 용기와, 또 그 용기를 통해 더욱 흘러 넘치게 되었던 환자에게 향하는 그의 사랑. 그 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그가 가진 용기와 사랑을 배우고 싶다. 어느 순간 순간마다 마음에 와 닿는 사랑의 반응, 또 그로 인해 용기를 내고자 했던 마음. 그 마음에 ‘반응’할 때 비로소 그런 색깔의 또 다른 마음이 생기기를 반복하여, 더 큰 용기와 사랑을 갖게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마음을 무시하지 말고, 묻어두지 말고, 그래서 더는 무디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으로 귀한 마음이기에.

 

 

 

김시연 기자/한양
<silora_sy@naver.com>

[독자투고] 의학 불가능의 시대

113호/의료사회 2016. 11. 30. 22:00 Posted by mednews

독자투고

의학 불가능의 시대

 

 

교문을 막아선 건 경찰이었다. 지난 일요일,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의학도서관으로 들어가려는 내게 경찰은 교문 통과를 위한 합당한 근거의 증명을 요구했다. 백남기씨의 사망소식이 들려온 직후였다. 나보다 앞서, 서울대 병원 환자의 가족들과 문병객들 여럿이 이미 경찰의 벽에 가로막혀 쩔쩔매고 있었다. 몇 분은 자신이 환자 가족임을 ‘증명’해줄 담당 간호사와 황망히 전화연결을 시도하고 있었고, 또 어떤 분은 중환자실에 혼수상태로 누워계신 아버지의 사진을 경찰에게 ‘증거자료’로 제시해야만 했다. 학생증으로 재빨리 벽 사이를 비집고 나온 내 뒤로 수많은 가족들이 남겨졌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환자와 고인, 그 가족 분들이 드나드는 서울대 병원과 장례식장 곁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그 거대한 아픔과 죽음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곤 했다. 한명 한명이 품고 있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사연과 고통 앞에서 공감과 추모는 자유이기에 앞서 의무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의무 속에서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개인의 신체적 아픔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세계에 공감과 추모를 건네는 것이었다.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내는 마지막 장소. 그것이 내가 발견한 병원과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의 의미였다. 그리고 인간다움의 마지막 장소를 지키는 미래의 의료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중환자실에서 투병을 이어오던 백남기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병원과 장례식장 그리고 의과대학은 인간 존엄성의 공간이 아닌 국가권력의 체스판으로 전락했다. 경찰이 병원과 캠퍼스 전체를 빙 둘러싸고, 인간의 아픔과 죽음에 대한 공감과 추모가 있어야 할 자리엔 통제와 은폐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문병 온 가족들과 장례식장의 조문객들, 심지어 앰뷸런스까지 막아선 국가권력의 장벽 앞에서,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의료적 선언이어야 할 고인이 사망한 이유조차 국가권력의 압력 속에서 내려져야야했고, 유족들은 고인을 장례식장으로 모시는 길조차 시신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어야 했다.
비록 나는 국가의 유능한 기능인이 될 것임을 증명하는 ‘학생증’을 통해 무사히 의학도서관에 도착해 교과서를 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모의 권리, 치료의 권리조차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박탈당한 고인과 그 가족 분들의 모습 앞에서, 바로 그 공감과 추모의 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는 ‘의학’이란 학문은 성립될 수도, 공부될 수도 없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국가 속에서 오히려 국가폭력의 정당화에 가담하게 된 홀로코스트와 일제의 생체실험 속 의료인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진정한 의학은 아픔에의 공감과 죽은 자에 대한 추모를 보장하는 ‘인권적 국가’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으로 책 대신 국화꽃을 들고 나선다. 진정한 의학은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국가 속에서만이 가능하다고 믿기에.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의학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유기훈(서울의대 본과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