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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문) 최우수
응급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2학년 홍정표

 

기숙사 앞 응급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통장 안 잔액을 확인하러 온 학생 하나가 수수료도 못되는 전 재산의 일의 자리부터 백의 자리까지 몇 번이고 되뇌어보다 텅 빈 담뱃갑을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한다 오늘 에이티엠을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을 뽑지 못하는 사람들뿐이다 그의 어미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이곳의 누구도 알지 못했으므로 오늘 그는 이곳 응급실 대기의자의 붉은 야경이 될 운명이다 그런 그의 옆으로 한사코 이곳 응급실 대기의자가 편하다는 노인이 불안히 그 공간으로 제 몸을 구겨넣는다 학생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기로 한다 이곳의 어디도 자막은 없었으므로 오늘 이곳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기로 한다 티브이도 나오지 않는 새벽, 째깍째깍 익숙한 소리가 방을 메운다 하루에 꼭 일이초쯤은 함께하자던 바늘 가족들이 가까스로 새벽 4시, 각자의 자리에 홀로된 몸들을 누인다 때마침 또다시, 로비의 전등 하나가 위태로이 점멸하기 시작한다 빨간 응급실 간판 아래로 한 구의 붉은 이와 두 명의 흰 이들이 몸을 내린다 너는 피가 왜 붉은지 알아? 라고 묻는 한 흰 이에게 헤모글로빈? 이라고 다른 한 흰 이가 무심히 대답한다 그럼 헤모글로빈은 왜 붉을까? 라고 묻는 한 흰 이에게 다른 한 흰 이는 말없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안으로 몸을 들인다 그 길로 오늘 하루 그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던 간이침상의 늙은 바큇살이 붉은 이의 숨결을 거칠게 흩뜨린다 그리고 조용히 그 길을 좇던 청소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늙은 대걸레의 치맛자락 속으로 바닥에 스러진 혈흔과 통증들을 한 방울 한 방울 남김없이 주워 담는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많았다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학생은, 그리고 당신을 너무도 오래토록 홀로 두었기 때문에 노인은 나의 피는 붉다, 고 믿는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그 글귀가 오늘따라 붉다 문이 여닫히고 낭자한 방울방울들의 채도를 하나하나 머금은 그 글귀는 누구보다 진실하고 침착하게 당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 이름이 종종 질병, 그 자체보다 무서울 때가 많았다 일방통행만이 유일한 교통법인 이곳에는 네 발로 들어간 붉은 이들은 많았지만 두 발로 걸어 나온 붉은 이는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 그 글귀의 색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이들의 무지개 색을 감추기 위함임을 어렴풋이 눈치 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병동에서 진정 피가 붉은 이유는 붉지 못하고, 동시에 아름답지도 못한 당신의 모든 마지막들을 감추기 위함임을 이곳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암전 그렇게 이 문이 영원히 닫히기를 누군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추적추적 눈 밑이 새까만 여자가 자신의 하얀 가운보다 곱절은 창백한 미소들을 걷으며 오늘의 죽음을 선고하러오고 있었다 계속 고집부리시다가 육 인실이 만원되면 당신은 배는 비싼 일 인실에 입원해야해요, 라고 말하는 여자의 손이 스멀스멀 자신의 배를 감싸고 있다 생리와 당직의 불온한 주기들과 불순한 교집합이 돼버린 여자의 아래로 치열한 감동이 되지 못한 체온들이 뚝뚝뚝, 뜨거운 하혈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런 여자의 눈앞으로 차마 돈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 노인이 끝내, 죽지 못하여 자는 척을 하고 있다 로비에 누운 그의 실눈 새로 보이는 하얀 천장이 떨어지는 별들의 잎새들을 감추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학생은 기어코 그 표정을 기억해야한다는 것을 안다 그 표정이 그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창백한 예감만이 침묵처럼 이곳, 응급실의 로비를 무겁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구도 환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오늘 죽을 수 있다 그런 웃지 못 할 농담을 들은 기분이 든 학생이 도망치듯 서둘러 제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소매에서 나던 쾨쾨하고 썩은 질병의 냄새들 새를 비집고 외로운 살들의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쓰레기통 속으로 때 묻은 지포라이터를 쑤셔넣으며 그는 내일부터 담배라도 끊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은 듯 의자에 누워있던 노인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내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별밤에 기도한다 현재시각, 새벽 4시, 아직도 그들의 생명은 접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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