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부문
우수상
우리 강아지 왔다냐, 잉
이승헌 (충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본과 2학년)
낡은 휠체어엔 오랜만에 곱게 단장을 한 할머니를 앉히고 저는 그 휠체어를 밀고 길을 걸어갑니다. 시험이 끝난 주의 일요일, 지방의 대학에서 홀로 지내다 모처럼 서울 집에 돌아온 날엔 할머니를 모시고 성당에 갑니다. 거동이 불편한 당신께서는 책상조차 없는 맨 앞자리에 앉으십니다. 미사 중에 봉헌금을 내고 성체를 받아 모시려면 맨 앞자리가 가장 편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옆자리에 앉으려는 저를 구태여 물리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할머니의 조그만 등을 바라봤습니다. 할머니의 머리 위로는 할머니를 닮은 성모 마리아가 인자한 얼굴을 하고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글자글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유리 조각들이 할머니 얼굴에 아로새겨진 세월을 보는 듯합니다. 저는 가로로 기다란 나무의자에 앉아 할머니의 작고 굽은 등과 하얗게 센 머리,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구순을 2년여 앞둔 할머닌 근래 들어 누워만 계시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또, 여간해서는 웃는 일도 많이 볼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몇 주 만에 서울에 온 제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땐 앉기조차 힘든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얼굴 가득 환한 함박웃음을 보여주시고는 “오메, 우리 강아지 왔다냐, 잉!” 하시며 계란 한 판의 나이를 불과 몇 개월 앞둔 건장한 외손주를 머쓱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할머니의 주름진 함박웃음과 마주하고 따뜻한 인사말을 듣고 나서야 저는 ‘아, 내가 집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비로소 들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께서는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저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손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할머니 등에 업힌 채로 비단처럼 고운 포대기에 싸여 저만의 세상을 처음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 등에 업혀 잠이 들었던 건 저 뿐만이 아니라 제가 그때 보았던 집 밖의 파아란 하늘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세상의 온갖 소리와 냄새였습니다. 그땐 할머니의 등이 이 세상보다 더 커보였습니다. 엄숙한 성당 안에서 어느새 작아져버린 할머니의 등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눈물이 나왔습니다. 아아, 할머니의 옆에 앉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미사를 보는 내내 눈물, 콧물을 삼키다 보니 벌써 집에 갈 시간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할머니께 바보 같은 웃음을 보인 저는 다시 낡은 휠체어에 얼굴의 주름마저 고운 우리 할머니를 태우고 저녁노을을 뒤로 한 채 집으로 가는 길을 조심조심 걸어갑니다.
조그만 할머니 앞에 선 커다란 외손주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나 봅니다. 제가 좋아하지 않는 각종 나물과 채소들을 먹는 일은 집에 오면 꼭 거쳐야 할 통과의례입니다. 참견하는 사람이 없는 기숙사에서는 제가 싫어하는 반찬은 아예 받지 않거나 남기면 그만이지만, 할머니와 함께하는 밥상에서는 예외란 게 없습니다. 정말로 먹기 싫어서 “할머니, 나 이거 안 먹을래!” 하면 할머니께서는 “아가, 할머니 말 듣고 한번만 먹어 봐라, 잉.” 이라고 맞받아치시는데 스물아홉의 외손주는 도저히 이 말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올해로 딱 스물아홉 먹은 아가는 할머니 앞에서 그만 순한 양이 되어 버렸습니다. 할머니 앞에서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부리며 생각해 봅니다. 이런 어리광을 언제까지 마음껏 부릴 수 있을까요? 할머니의 뼈마디가 쑤실 때마다, 할머니의 총총했던 귀가 더 안 들리게 될 때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시던 할머니가 낡은 휠체어에 힘겹게 오를 때마다 아가는 마음이 조각나 버리는 듯합니다.
친구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골목길에 늘어선 빌라들 사이의 작은 밭뙈기에 꽤 이국적으로 생긴, 기다란 줄기 끝에 쟁반같이 커다란 잎을 가진 풀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창 식물분류학을 공부하던 친구는 신이 나서 널따란 잎만 보고 관상용 식물인 ‘알로카시아 오도라’라고 했지만 저는 한눈에 토란인 걸 알았지요. 할머니께서 어렸을 때 비가 오면 우산 대신에 커다란 토란잎을 꺾어서 우산 대용으로 쓰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동해 인터넷으로 찾아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예전 기억이 점점 더 생생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요즘 부쩍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할머니의 형제자매들과 놀았던 이야기, 일제강점기 때의 힘들었던 이야기, 친하게 지냈던 여종 이야기, 할머니가 손수 길렀던 어머니와 외삼촌, 이모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머니의 삶 속에 제가 없었던 그 시절을 상상해보았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무려 당신 인생의 3분의 2를 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는 단 1초라도 할머니와 함께하지 않은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제 옆에 없는 삶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파도를 넘을 때면 할머니의 따뜻한 품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조그만 할머니의 가슴일 지라도 저의 커다래진 몸뚱이를 오롯이 다 품어 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스물아홉의 아가는 아직 할머니의 넓은 품에서 나가 홀로 모진 세상에 맞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할머니께서 몇 년 전부터 새해만 되면 입버릇처럼 하는 “올해는 꼭 가야 할 것인디…….”라는 말은 다 커버린 저에게는 어릴 적 들었던 귀신이야기만큼이나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짐짓 “할머니, 그런 말 좀 하지 마!” 하며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 말을 듣는 손주는 정말로 할머니가 내 곁에서 떠나 버릴까봐 얼마나 가슴이 철렁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신이 납니다.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승헌이가 의사 되는 것은 보고 가야 할 것인디.” 작년 들어 할머니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러면 “할머니, 그것만 볼 거야? 내가 결혼해서 자식 낳는 것도 다 봐야지!” 라고 합니다. 퉁명스런 말투로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제 자신이 정말 자랑스러워 나이도 잊고 겅중겅중 뛰고 싶을 정도입니다. 의사는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라는 할머니의 그 한마디가 저에게는 다시 힘을 내서 어려운 공부를 하게 만드는 빛이요, 소금입니다.
다시, 기도하는 할머니의 조그마한 등을 바라봅니다.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날아와 살며시 앉아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작고 연약한 등이지만 제게는 거기에 우주가 다 들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할머니의 등에서 포대기에 싸여 처음으로 세상과 만나던 그 때처럼 지금도 당신의 작은 등에는 아직도 파란 하늘이, 넘실거리는 바다가, 매미가 울어대던 뒷동산이, 친구들과 뛰어놀던 집 근처 공원이, 지금의 저를 둘러싼 온 세상까지 모두 다 들어 있습니다.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그 순간 우리 강아지 왔느냐는 당신의 반가운 말에 저는 정말로 순진무구한 한 마리의 강아지가 되어 할머니의 조막만한 등 위에 펼쳐진 커다란 세상과 만나 언제까지고 뛰어 놀고 싶습니다.
<수상소감>
전국의 의대 학우님들과 의대생신문 관계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충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인 이승헌입니다. 유난히도 가물었던 여름이 지나고, 촉촉한 가을비가 가을을 재촉했던 때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제법 매서운 바람이 코끝을 때리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치열한 공부와 바쁜 의대일정에 치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채 지나치기 쉬운 저희 의대생들에게 의대생신문은 조금이나마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창이 되어왔습니다. 그런 고마운 의대생신문에서 주최한 <제 10회 의대생 문예공모전>에서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제 글이 수필 부문 우수작이라는 상을 받게 되어 이 영광스러운 감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제 글이지만, 독자 여러분들께서 힘든 의대 생활 중에 항상 여러분들의 뒤에서 아낌없는 응원과 사랑을 주시는 가족들을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모쪼록 남은 2015년 행복하게 마무리하시고 다가오는 2016년도 희망차게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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