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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대상

이타성의 고리

홍현 (전남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본과 2학년)

 

 물에 젖은 수세미 같이 방바닥에 붙어 있다가 잠에서 깨어보니 어느새 가을에 접어들어 눈을 뜰 때 즈음에 맞추어 날도 천천히 밝아 온다. 찌뿌둥한 허리를 세우고 앉자 어제의 그 묵직한 찰흙과도 같던 피로는 어느새 어딘가로 풀려 흩어져 있다. 그렇지, 이런 가벼운 기분은 담배를 끊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10여 년 넘게 놓지 못했던 담배를 끊은 것은 한 달 남짓 되었다. 삼십대 중반, 몸의 이곳저곳에서 넌 더 이상 젊지만은 않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올 해로 서른다섯 살, 아내와 두 살 된 딸이 있고, 그리고 학생이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학생 가장, 덕분에 내 주변 가족들이 많은 짐을 나누어서 지고 있다. 학부 과정을 비롯해서 박사과정, 그리고 의학 전문 대학원 과정까지 참 오랜 시간 공부하고 있다. 무엇을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짐을 지우면서까지 오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시련도 견딜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다. 긴 시련의 시간을 견디어 내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시련의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곳에서 무엇을 하며, 왜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의학을 공부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삶의 과정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도 이와 같은 질문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1교시 시작 전 교실의 모습은 한산하면서도 동시에 부산스럽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업 시작 오 분 사이에 몰려 들어온다. 교실 안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것, 예전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다시 돌아온 삼십대 중반의 늦깎이 학생에겐 낯선 그 어떤 것이다. 1교시가 시작되면 그 때부터는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덜걱거리며 하루가 쉬지 않고 지나가게 된다.
 오늘은 소록도에서 한센인들과 함께 이십년을 넘게 살고 있는 오동찬 치과 의사의 특강이 있는 날이다. 특강이 열리는 강당은 다른 학년 학생들과 섞여 부산스럽다. 나 역시 틈새에 앉아서 강연을 기다리고, 곧 강연자가 무대에 오른다.
 강연자가 강연을 시작하고 그 뒤로는 소록도에 살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역사와 현재의 삶이 펼쳐진다. 강연에 몰입하게 되자 강연자의 마이크 소리도 주변 동기들의 움직임도 점차 희미해지며 그 공간 속으로 내 의식이 끼어들게 된다.
 내가 오랜 시간 꿈꾸던 삶이 개념이 아닌 현실로서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 삶을 실제로 살고 있는 한 인간의 눈빛과 몸짓과 목소리가 바로 내 눈 앞에 존재한다. 무엇인가에 취한 듯한 눈빛, 열에 들뜬 듯한 목소리,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기괴한 모습을 한 한센인들, 이러한 것들이 과연 내가 꿈꿔왔던 봉사하는 삶이었던가? 몸이 아파서 가족들에게 마저 버려져 마음까지 상처받고 병든 사람들, 그래서 외부인들을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 평생을 사는 것이야말로 이타적 삶의 본질인 것이다. 내가 그려왔던 이상적인 삶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오히려 내 마음은 무거워진다.
 ‘그는 왜 굳이 고생스러운 삶을 선택했을까?’ 치과의사로서 충분히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의 강연을 듣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이었다. 너무도 궁금했다.  
 어느새 무대 뒤 스크린에 가톨릭 교단의 수녀 두 명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은 20대 나이에 유럽 어딘가의 수도원에서 한국의 소록도로 파견되었다는데 지금은 이미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일평생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약자를 위해 바치는 사람들. 내 마음은 경이로움과 불편함으로 뒤섞인다. ‘불편함? 왜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일까? 나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던가?’
 <리바이어던>의 저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이 인간끼리의 무차별적 투쟁을 막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국가가 세워졌다고 말했을 정도로 인간의 본성에는 폭력성이 존재한다. 폭력적 힘을 전제로 하는 적자생존의 세계관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설 자리는 없었고 도태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이타적 삶의 모습을 존경하면서 동시에 불편하게 느꼈다.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에 반하는, 어느 정도는 위선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학생은 딸이 아플 때 어떤가요? 어떻게 하죠?” 강연자의 질문에 순간, 내 의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 예, 속상합니다. 바로 병원에 데리고 가겠죠.” 내가 대답했다.
  “제가 소록도에서 입술이 뒤집혀 흐르는 침을 연실 닦으면서 들어오는 저 할머니를 처음 보자마자 마음이 아팠어요. 마치 내 자식이 아플 때 제 마음이 아팠던 것처럼, 그렇게 아프더라구요. 고쳐주고 싶었어요. 그것이 소록도에서의 삶의 시작이었죠.” 강연자의 말이다.
 슬라이드에는 그 아래 입술이 뒤집혀진 할머니의 사진이 있다. 나는, 징그럽다고 느꼈고, 그리고 부끄러웠다.
인간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는가? 단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원초적 폭력성만 있을까? 하지만 적자생존의 세계관 이면에 드문드문 이타적 삶의 흔적이 보인다. 폭력과 범죄, 집단 이기주의에 의한 배척과 소외, 그리고 전쟁의 역사 사이사이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타성의 고리. 강한 정신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화려하고 성공적인 삶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마치 내 자식이 아픈 것처럼 마음이 아팠어요.”
 공감에서 파생하는 측은지심. 인간의 마음속엔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안테나가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는 사람들, 그들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성공과 안위만을 생각하며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새 강연이 끝나고 나는 짐을 챙겨 천천히 사람들 틈 사이로 나와 독서실로 향했다. 내 머릿속엔 곧 다가올 시험 준비와 그리고 기나긴 학생 생활에 대한 불평이 있었고 그 외의 나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타적 삶에 대한 생각으로 오히려 머릿속이 마치 엉킨 실타래 같이 되어버렸다. 내가 바로 사회적 약자였고 소외당한 가난한 이웃이었는데!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삶이 고통으로 점철될 때 그곳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단지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주어지는지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만 하고 있다면 그 고통의 희생자에 다름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승화시켰던 인류의 위대한 정신들처럼 우리의 고통을 높이 승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 속의 안테나는 어느 주파수에 공명하는 걸까? 그곳이 어디건, 나는 나의 고통을 무엇인가로 승화시켜야 하고 그리고 나 또한 이타성의 고리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수상소감>
저의 작품을 선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살아가는 것은 저에겐 그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관계 안의 갈등에서부터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까지, 어느새 저는 인생의 절망의 바닥 언저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심연 속에 갇혀있던 저에게 책은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서 도스토예프스키와 디킨스를 알게 되었으며 저의 은사님을 통해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의사, 빅터 프랭클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책 속의 상처받은 사람들과 함께 가슴 아파했으며, 같이 분노했고, 그리고 같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책에서 위로를 받았으며 저를 믿고 지지해주는 가족들을 보며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수필 <이타성의 고리>는 이처럼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지, 아니면 대체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번 10회 의대생 문예공모전 당선이 저의 글쓰기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글에서 위로를 받았듯이 언젠간 다른 누군가도 저의 글을 통해서 위로받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의학도로서 학업에 매진하며 꾸준히 글을 써나갈 것입니다. 제 작품을 뽑아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