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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입에 담아본 그대에게

96호(2013.12.11) 2014. 4. 24. 00:03 Posted by mednews

자살을 입에 담아본 그대에게:

죽음의 양극단 자살과 사형, 그 사이의 의학

 

 

비록 진담이 전혀 아니더라도, 장난스럽게라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입에 한 번이라도 담아본 사람은 꽤나 많을 것이다. 특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온갖 스트레스의 총집판인 본과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빈도는 더욱 높아지리라 예상된다. 본 필자도 시험을 망치고 나올 때면 동기들과 ‘한강 가장 빨리 가는 버스가 무어냐’ 같은 농을 주고받고는 한다. 못 갚은 학자금이 생각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 하지만.
그러나 의료계에 종사하게 될 사람들은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유명인의 자살이 대중들의 자살률 증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베르테르 효과’는 이미 상식이지만, 가까운 주변인이 별 생각 없이 던진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힘들어하고 우울해하는 동료들에게는 진지한 선택의 일부로 다가올 수도 있는 법이다. 게다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 그런 힘든 상황에 처한 상태일수도 있다. 그런 분들에게, 자살을 가볍게 이야기하는 서두로 기사를 시작한 점에 먼저 사과를 드린다.

 

자살과 사형… 죽음의 양 극단
인간은 자살을 택하는 유일한 동물

 

인간은 자살을 하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거의 유일한’ 이라는 표현은 생물학적 다양성에 대한 열린 자세에서 선택한 표현이다. 나그네쥐, 흔히 ‘레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설치류가 자살을 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새로운 거처를 찾아 직선으로 이동하는 습성과 나쁜 시력이 섞여 실수로 강에 뛰어들기 때문에 생긴 웃지 못 할 오해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살하는 유일한 동물이 맞다. 동시에, 법적 방식으로 동족을 살해하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바로 ‘사형’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살과 사형은 개인의 종말이라는 같은 결과를 야기하지만, 반대로 서로 양 극단에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자살하는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 하지만, 사형을 당하는 이는 대부분 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살아있고 싶어 한다. 비록 사형을 선고받는 이들이 대부분 살인 이상의 강력범죄를 저지른 자들이지만, 그들 또한 한 명의 사람이었고, 살고 싶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목숨을 잃고 만다. 자살이 심각한 이슈인 지금, 사형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지배를 위한 수단이던 사형,
현대에도 지속되는 유일한 신체형

 

사형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형벌이다. 농경이 시작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생긴 이래 공포를 주입하기 위해 사형은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자주 시행되어왔다. 아이러니한 점은 현대 법학에서 신체형(Corporal punishment)은 대부분 폐지되었는데, 그 중 가장 형벌의 정도가 심각한 사형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신체형이란, 사람의 신체에 가하는 형벌을 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함무라비 법전이나, 고대 중국 역사가 사마천이 당한 궁형(宮刑, 남녀의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을 말한다)이 좋은 예가 되겠다.
근대까지의 사형은 적, 혹은 피지배계층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수단이었고, 따라서 잔인할 수밖에 없었다. 지배계층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아주 창의적인 방식으로 사형수의 목숨을 빼앗았다. 불에 태워 죽이기도 하고, 끓는 기름에 담아 죽이기도 했다. <삼국지>에 흔히 나오는, 적장 가족의 목을 베어 성문 밖에 내걸었다거나, 시체에 심지를 꽂아 불을 붙이니 며칠이나 갔다는 동탁의 이야기가 이런 근대 이전까지의 사형의 목적을 잘 보여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흔한 사형방식은 참수형이었다. 숙련된 망나니가 사형수의 목을 베어 형을 집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부학을 배운 의대생이라면 목이 만화나 영화처럼 그렇게 깔끔하게 잘려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경추는 그리 무르지 않다. 정말 운이 좋게도 척추뼈와 척추뼈 사이 추간판으로 날이 절묘하게 들어가지 않는 한, 목은 힘없는 인대에 의지해 반쯤 붙어 덜렁거리기 일쑤였고, 망나니는 두 번, 세 번 더 날을 내려쳐야 했다. 영화 속의 그들이 항상 술에 취해 있는 이유다. 사형수의 가족들이 ‘제발 한 번에 끝내 달라’며 참수형 집행인에게 돈을 쥐어주는 풍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고, 실력 있는 집행인은 어디서나 좋은 대우를 받았다.


윤리의식 발전으로 단두대 등장
전기의자로 수준이 후퇴하기도

 

프랑스 혁명은 사람들의 인식체계뿐만 아니라 사형의 방식에도 일약 혁명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숙청할 사람은 트럭을 이루는데, 형을 집행할 망나니는 모자랐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요탱(Guillotin) 박사는 망나니가 없어도 되는 단두대(기요틴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망나니와 사형수 모두 아주 눈곱만큼의 인권 신장을 이루게 되었다.
누구든 처음에는 훌륭한 위인으로 접하게 되는 토머스 에디슨 덕분에 사형수의 인권이 잠시 뒤로 후퇴한 일도 있다. 토머스 에디슨은 직류, 라이벌인 니콜라 테슬라는 교류 전기의 우수함을 주장했는데, 교류 전기가 위험하다는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에디슨이 교류 전류로 사형 도구를 만든 것이다. 이 전기의자로 집행된 첫 사형에서 사형수는 약 10분간이나 고압 전기에 전신이 구워지며 고통 받았다고 한다. 사실상 화형이나 마찬가지인 형벌이다.
사형의 현황을 살펴보자면, 현재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58개국, 사형을 완전히 폐지한 국가는 96개국, 지난 10년 이상 사형이 시행되지 않은 국가는 34개국으로, 우리나라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오히려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가 더 적다. 실제 사형을 시행하고 있는 58개국에서도 참수형은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로 인해 시행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교수형을 시행한다.
교수형 하면 보통은 질식으로 사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설프게 매듭을 묶어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보면 목 주변이 손톱자국으로 가득하다는 괴담도 있다. 실제 교수(絞首)에 의해 사람이 죽는 방식은 Acute cerebral ischemia이다. 줄에서 추락하는 충격으로 인해 Cervical spine의 골절(주로 C2)이 일어나고, 부러진 뼈가 Vertebral artery를 막는다. 이로 인해 수 초 내로 뇌는 급성 허혈상태에 빠지게 되고, 사형수는 의식을 잃고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방식의 죽음에도 고통은 숙명
자살은 탈출의 수단이 되지 못해

 

이 기작에는 초기 추락의 중력이 중요해서, 어설픈 자살 시도자가 고통스러워하다가 후유증만 남기고 천문학적인 진료비를 지불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자살시도로 응급실에 실려 오면, 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 (※2013년 11월 현재, 민주당 김용익 의원이 보건복지부에 자살시도자에게도 보험을 적용하라고 요청한 것이 승인, 내년 상반기부터 보험이 적용될 상황에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연간 자살 시도자는 4만 명이나 된다.)
사형수의 인권뿐만 아니라 사형 집행인의 인권 또한 문제가 되고 있다. 어떤 사형 방식도 하다못해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필요하며, 그가 곧 사형 집행인이 된다. 운이 없어 사람을 치게 된 지하철 기관사도 평생을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데, 사형수에게 실질적인 죽음을 내린 사람이 어떤 고통에 시달릴지는 뻔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명의 집행인이 들어와 진짜 버튼과 가짜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고, 아무리 고통이 적은 방식이라고 해도 사형을 당하기보다는 마지막까지 살아남고 싶어 한다. 그들이 어떤 흉악범이라도 그런 욕구를 탓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끝까지 죽음을 종용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그럴 근거가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혹시라도 자살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살고 싶다는 본능적 욕구를 묵살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이들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자살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세상에 있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해질 길을 제공하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이준형 수습기자/가천
<bestofzon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