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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와 녹색 악마 앱상트

96호(2013.12.11) 2014. 4. 24. 00:02 Posted by mednews

고흐와 녹색 악마 앱상트

 

가끔 예술가가 어느 수준을 초월하면 세인들이 경이와 존경을 표하며 말하는 것이 있다. 바로 악마와 계약해서 재능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악마와 결탁한자”라고 불리며 교회 묘지에 매장조차 거부당한 희대의 바이올린리스트 파가니니. 사거리의 악마에게 블루스를 배웠다는 델타블루스의 거장 로버트 리로이 존슨 등의 이야기가 특히 유명하다. 미술계에도 악마와 계약한 듯한 재능을 보였던 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네덜란드의 인상파화가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의 예술은 실로 악마와 계약하여 불행과 불멸의 재능을 맞바꾸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의 그림에서는 터치가 불타오르고, 선명한 노란색이 찬란하게 빛나며 세상을 휘어감는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낳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녹색의 악마라고 불리운 술 앱상트라는 주장이 있어 흥미롭다.

앱상트(Absinthe)는 일반적인 술처럼 밀이나 수수, 감자, 포도 등으로 만든 곡주가 아니다. 18세기에 앙리 루이 페르노에 의해 첫 선을 보인 앱상트는 쑥을 비롯한 여러 가지 허브(Herb)로 만들어진다. 도수가 40~70도 정도나 되는 독한 술인 앱상트는 19세기 파리의 암울한 뒷골목의 예술가들에 의해 향유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앱상트는 마주(魔酒;마법의 술), ‘녹색의 마귀’ ‘녹색의 요정(fee vert, green fairy)’, ‘에메랄드 지옥(emerald hell), ’녹색 유혹‘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앱상트가 주는 취기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예찬하기도 했다.

문제는 앱상트에 들어가는 향쑥이라는 성분이 정신착란이나 환청 환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19세기에는 지금과 앱상트를 만드는 방법이 달랐다. 쑥의 줄기와 잎을 잘게 썬 이후에 고농도의 알코올에서 추출하고, 이 추출액을 증류하여 앱상트를 만들었다. 이때 향쑥에서 추출되는 튜존(Thujone)이라는 성분이 GABA antagonist로 작용하여, 중추신경 장애와 정신과학적인 여러 이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향쑥을 사용한 전통적인 앱상트는 유럽에서부터 금지되었으며 현대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앱상트가 허가된 것도 불과 1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고흐가 앱상트를 즐겨 마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고흐의 강렬한 노란색은 바로 이 녹색 악마, 앱상트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고흐는 튜존의 중독증상 중의 하나인 황색시증(xanthopia) 세상을 ‘노랗게만’ 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real yellow”라는 표현은 고흐의 눈에 들어온 세상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아를르의 포룸광장>, <해바라기 연작>, <까마귀가 있는 밀밭>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물론 그의 작품을 앱상트의 작품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앱상트가 고흐의 노란색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에게 세상엔 다신 없을 노란색을 주고 열정의 예술혼을 주었지만 정신병과 불행도 함께 준 앱상트. 고흐와 수백년을 넘어선 교감을 위해 앱상트 한 잔을 곁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 고흐처럼 세상이 황색으로 보일 리는 없겠지만 그의 강렬한 황색 열정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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