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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96호(2013.12.11) 2014. 4. 23. 23:51 Posted by mednews

또 다른 자격을 향하여

 

‘누구든 최고의 발레리나가 될 자격이 충분해서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자격 이전에 먼저 자리를 맡는 것이 보통이다. 감사함과 겸손함으로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발레리나는 자신이 맡은 역에 빠져들어 혼신을 다해 자신을 불태우고 손끝하나부터 발끝 연기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무대를 내려올 때 비로소 자격을 얻는 것이다.
...누군가 ‘나는 자격이 충분하니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많은 사람에게 무한한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으로 무대에 오른 적이 없다. 무슨 작품이든지 심지어 백 번 이상 이미 공연했던 작품도 다시 무대에 오르기 전 150%이상의 노력을 쏟아붓는다...그렇게 노력을 해도 관객에게 100% 만족을 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그 자격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하루를 보낸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자격’이론. 올해 첫 신문 91호 ‘편집자가 독자에게(이하 편독)’란에 인용했던 글귀입니다. 올해 나에게 주어진 두 가지의 자격 - 편집장과 PK - 을 얻으리라 다짐했던 때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춰보는 이 구절은 새롭습니다. 편집장과 PK가 ‘되고자’ 노력했던 2013, 이제 끝이 다가왔습니다. 편집장의 소회로 Adios, 2013을 마무리해봅니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이 전부다.

사람에 대해 참 많이 배웠습니다. 신문 만드는 일의 8할은 사람입니다. 신문사 기자들 외에도 각종 거래처, 후원처, 취재원 등등과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갈등을 조정하고, 가지각색 능력들을 조화시켜 공통의 아웃풋을 내는 것이 일의 핵심입니다.  
마음으로 배운 원칙을 하나 소개하자면, ‘어떠한 경우에도 웃어야 한다’입니다. 정말입니다. 분노로 해결되는 일은 없더라구요. 특히 사람에 관해선요. 누가 인간이 이성적이랍니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고, 일단 감정이 상하면 모든 일이 지체됩니다. 반대로 마음과 신뢰를 얻으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이 진리임을 절실히 느꼈죠.
보다 나은 결과물을 위한 피드백과  ‘기사를 이따위로 쓰나?!’는 분명 별개입니다. 예를 들어 미흡한 점을 짚어주고 싶다면, 직설적인 비판보다 ‘나는 늘 당신의 노고에 감사했고, 당신의 능력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이보다 나은 방법을 추천하고 싶은데 당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재고해 볼 만 하다’라고 어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실제로 많은 기자 분들이 이런 즉각 피드백을 수용해서 뿌듯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상하관계와 자존심이 중시 되는 우리나라 정서에 익숙한 분들은 이런 태도를 ‘을’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세련된 여유를 가지는 것이 진짜 ‘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빠와 25년 넘게 유쾌한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있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잘 지내는 비결이 무어냐는 질문에, 답변은 명쾌했습니다. ‘술, 여자, 도박만 아니면 다 맞추고 사는 거다.’
그 말인즉슨,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함께 못 지낼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 사람을 포용해야 하는 직위의 사람에겐 필수 요소겠죠? 각박한 Ego의 단단한 자존심은 피해의식과 열등감, 분노를 일으켜 마음의 눈을 흐립니다. 여러 사람을 헤아려야 하는 장(長)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죠. Ego의 벽을 허물고 먼저 손 내미는 마음을 가져봄이 어떨는지요. 

드러나지 않는 진짜 일, ‘잡일’을 존중하자. 

한 신문의 발행은 사실 상당한 잡일을 요합니다. 편집장이 멋있을 때는? 글쎄요... 회의나 뒤풀이에서 카드 긁는 모습(?) 정도입니다. 편집장이 ‘아이템 내주세요, 회의에 오실 분. 지면에 실을 광고 보내주세요, 마감 지켜주시고, 편집비랑 배송비 입금해야되는데, 선배님께 부치는 글은 또 언제 쓰지’ 등등 부산하게 뛰어야 한 호가 발행됩니다.
우아하게 호수를 거니는 백조는 물 밑 발갈퀴가 쉼없이 탐방거리기에 가능한 장면이죠. 백조가 아웃풋을 내는 조직 구성원들이라면, 발갈퀴는 한 단체의 장(長)을 의미합니다.
신문사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사를 쓰는 기자들입니다. 편집장은 글 쓰는 공간을 책임지는 무대 뒤편의 사람이죠. 꼭 필요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아 다수가 회피하는 일을 묵묵히 도맡는 것, 백조 대신 물갈퀴가 되길 각오하는 것이 장(長)의 자세입니다.
덧붙여 드는 생각. 비슷한 맥락에서 인턴생활도 꽤 의미 있는 시간이란 생각이 듭니다. 인턴은 학생에서 의사가 되는 과도기이죠. 의사가 존경받고 멋있는 이유는 병에 대해 Decision making 때문입니다. 그러나 6년간의 백면서생이 졸업하자마자 이런 ‘멋있음’을 추구하기엔 실무경력이 참 부족합니다. 우선 병원의 잡일을 도맡으면서 어깨너머로 레지던트와 스텝들의 생활을 배우고, 환자에게 다가가는 법을 ‘연습’해서 멋있는 모습을 준비하는 건 어떨까요. ‘우리는 고급인력인데 왜 이런 일을 하지?!’불평보단 이왕 주어진 시스템에서 나를 도약하는 발판으로 삼아보자, 다짐해봅니다.

편집장의 자격은 2013년과 함께 추억으로 남겨두겠습니다. 이제 또 다른 자격을 향해 달려갑니다. 아마 긴긴 여정이 되겠지요. 어쩌면 평생의 노력이 될지도 모르는, 의사의 자격을 위하여. 


김정화 편집장/한림
<editor@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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