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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을 접는 마지막 날까지의 한결같은 외침이었다.
‘의료진 출입을 허용해 달라…….’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명의 부랑자가 등장한다. 한 여름, 끊어진 전기와 흐르지 않는 물, 닿지 않는 의료진의 손길.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 속에 놓인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을 보며, 끝없이 고도를 기다리던 디디와 고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두 사람이 그렇게 기다리던 고도는 희곡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채 극은 막을 내리지만 책을 덮은 우리들의 현실, 쌍용자동차의 평택공장. 그곳에는 외침의 소리가 미약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함께 연대하고 손잡을 수 있는 사람과 의료 그리고 희망이라는 고도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길고 뜨거웠던 쌍용차 사태는 점거농성 77일 만인 지난 8월 6일에 여러 가지 아쉬움을 뒤로한 채 타결되었다. 이제 쌍용차 사태는 기억의 뒤란으로 사라져가겠지만 우리가 기억해야만할 것들을 곱씹으며 쌍용차 파업 현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두발도 뛰셨던, 우리들의 고도가 되었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국장이신 백남순 선생님을 만났다.

기자_ 저희가 알고 있는 선생님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업국장'으로서 인권운동과 의료개혁 및 정책 사업에 관심을 가지시는 의사'라는 조금 딱딱한 타이틀의 주인공이신데요, 이 신문을 읽게 될 의대생들에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 에 대한 소개와 다정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백남순_ 인의협은 1987년 민주화투쟁 와중에 인도주의적 의료를 표방하는 몇몇 원로(홍창의 등)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어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22년 째 운영되는 동안 많은 선생님들이 거쳐 가셨고, 그에 따라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어왔습니다. 의료보험 통합일원화 개혁, 의약분업, IMF 이후 노숙인들에 대한 의료지원 사업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최근에는 한미 FTA, 의료법개정과 의료민영화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선진화 반대투쟁 등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작년 촛불집회 때는 인의협 진료단을 꾸려 시위대 가장 앞에서 부상자 치료를 위해 새벽까지 뛰어다니기도 했었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의협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장점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인권활동, 의료정책 및 의료개혁 운동 등 인도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단체라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제 소개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저는 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을 95년도에 졸업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봉사와 문학동아리, 풍물패 등에서 선후배들과 토론하고, 선배들에게 대들던 학생이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숨 막히는 병원생활이 싫어 인턴을 포기하고 공중보건의를 선택했고 우여곡절 끝에 마취통증의학과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인의협은 레지던트 3년차 때 처음 가입하게 되었답니다.

기자_ 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최근 이슈가 되었던 '쌍용차 사태'에 대한 부분이 될 수밖에 없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쌍용차 사태'의 본질에 대해 들어 보고 싶습니다.

백남순_ 쌍용차 사태는 정부가 잉태하고 상하이차와 회사경영진들이 키워낸 재앙입니다. 애초 쌍용자동차를 중국자본(상하이차)에 헐값 매각한 책임은 정부에 있었습니다. 상하이차는 처음부터 회사경영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쌍용차 핵심 기술을 빼내는 데 급급한 먹고튀자식 자본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회사는 부도위기에 몰렸고 2500명이 정리해고 명단에 올랐습니다. 해고 대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기본적인 책임은 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정부에 있다. 더불어 먹튀자본 상하이차, 회사 경영진이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일한 죄밖에 없다.”라고 말입니다. 즉, 정부와 상하이차, 그리고 회사경영진들이 문제를 방기하고 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데서 시작된 것이 쌍용차 사태입니다.

기자_ 의료적인 부분에서, 당시 파업에서 가장 문제 되었던 것은 어떤 일들이었나요?

백남순_ 무엇보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야만적인 음식, 식수, 의료진 및 의약품 봉쇄 조치입니다. 음식물 반입이 봉쇄되어 점거 노동자들은 하루 2개 정도의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파업 말미에 비타민결핍증, 전해질 불균형이 심각해져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전신무력감 및 의식저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한 식수 봉쇄조치로 인해 대부분이 경도 탈수증상을 보였습니다. 부상자가 있어도 씻어낼 물이 없어 보일러 물을 빼서 상처세척에 사용하는 지옥이었습니다. 의료진 및 의약품 봉쇄조치는 더욱 참혹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최후까지 공장에 남아있던 600~700명중 100~200여명의 노동자들은 얼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등의 외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붕대와 반창고로 지혈만 한 상태로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또 당뇨 및 고혈압 등 만성질환들이 의약품 반입금지로 악화되어가고 있는 환자들도 있었는데 한 노동자는 2주째 당뇨약을 먹지 못해 발목을 절단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기자_ 여러 차례 진료지원을 위해 평택공장을 방문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의료진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의료진과 의료물품의 반입을 막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남순_ 인의협은 5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총 29차례 공장을 방문해 의료지원을 시도했으나 정상적인 의료지원은 단 7차례밖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사측구사대와 경찰당국에 가로막혀 실랑이를 벌이다 인원에 제한을 받거나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부상자 및 환자에 대한 의료지원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어야 합니다. 이는 세계인권협약과 제네바 협정에서도 명시된 사항이며 국제적인 상식입니다. 의료법상 의사는 환자가 진료를 요청할 때 이에 응할 의무가 있고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서도 응급진료를 가로막는 자를 처벌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쌍용차 공장은 국제적 상식, 인권협약, 현행법률 등이 깡그리 무시되는 야만의 현장이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쌍용차 노조가 파업을 접는 마지막 날까지도 첫 번째 요구안이 “의료진 출입을 허용하라”였겠습니까.

기자_ 경찰이 테이저 건을 쏘았으며, 선생님께서 테이저 건에 맞은 환자를 직접 치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테이저 건은 어떤 무기인가요? 또, 테이저 건에 맞아 치료를 받은 노동자분의 예후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백남순_ 메스로 뺨을 2cm 정도 째고 갈고리 모양의 테이저 전자 침을 제거하였습니다. 테이저 건의 안정성에 대한 논란은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닙니다. 국제엠네스티는 2006년에 테이저 건을 맞고 사망한 258명의 사례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5만볼트의 전기 총을 맞고 멀쩡할 거라는 경찰당국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분통이 터지는 부분이지요. 테이저 건은 강한 전류로 대뇌에서 내려가는 모든 신경전달을 차단하고 신체에 불수의적인 근육경련을 일으키는 살상무기입니다. 테이저 건에 의한 사망은 호흡곤란, 심장마비, ‘테이저 건 섬망상태’라고 부르는 정신착란 후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테이저 건 사용지침에도 하반신을 겨냥하고 특히 심장부위 및 얼굴부위는 피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진료한 피해 노동자는 얼굴과 몸통 부분에 테이저 건을 각각 한번 씩 맞았습니다. 이건 마치 “이걸 맞고도 사나보자”라는 식이었습니다.

기자_ 인의협에서 최루액 성분을 조사·분석하여 지난 8월 3일에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진압과정에서 사용된 최루액이 인체에 어떤 유해한 성분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백남순_ 최루액의 용매로 사용되는 디클로로메탄이란 물질은 유기용매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상 허용치가 5ppm으로 규정돼 있는 유해물질입니다. 디클로로메탄은 몇 주 동안 지속되는 호흡기 증상(심한 경우 폐수종) 및 화상을 일으키고 나아가 암을 발생시키기도 하는 발암물질입니다. 경찰당국은 이런 위험한 최루액을 1시간 간격으로 쏟아 부었습니다. 해산용으로 간혹 뿌리는 수준이 아닌 죽으라는 것처럼 뿌렸습니다.

기자_ 진압과정의 마지막에는 식수공급마저 제한되고, 파업노동자의 가족이 자살하는 등 육체적 고통 외에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는 없었나요?

백남순_ 공장점거 중에도 그렇지만 현재까지 쌍용차 점거 노동자들의 심리적 스트레스 상황은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헬기소리나 사이렌소리 같은 환청에 시달리며, 중증 불안증세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만성두통, 소화불량, 수면장애가 계속되고 있으며, 대인기피 및 사측에 대한 배신감 등이 팽배한 상황입니다. 특히 며칠 전 경찰의 강압수사 및 조작수사에 시달리다 한 노동자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심리적 안정과 치료를 받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누가 폭력을 주도했다고 불면 너는 살려 주겠다” 등의 충격적인 조작수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또한 새벽 2시에도 경찰서에 불려가 수사를 받고 있으며,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경찰당국의 전화소리에 없던 우울증도 생겨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마디로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밖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며, 사측과 경찰은 지속적으로 병든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_ '인의협'의 주요 사업 중 하나인 '인권사업'의 의미를 생각하면, 쌍용차 사태에 개입하신 것은 일견 당연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비해고 노동자들과 하청업체 사업자 및 근로자와 보수적인 매체들은, 그런 활동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는데요. 힘든 부분은 없으셨나요?

백남순_ 솔직히 사측구사대 및 보수적인 매체들의 비난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사는 의사의 본분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아픈 사람이 의사에게 치료와 진료를 요청하면 이에 응하는 것이 의사의 도리입니다. 진료를 가로막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그들의 행동이 비정상적이며 반인권적인 태도임을 지적하고 사회적 약자에게도 치료받을 권리는 존중돼야 함을 주장할 것입니다.

기자_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신문을 읽게 될 예비 의료인들에게 '의사로서의 삶'에 있어 필요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백남순_ 의사는 많은 지식을 배우고 도덕적 인정을 받는 직업입니다. 때문에 그에 맞는 책임도 뒤따른다고 봅니다. 세상에는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파업노동자, 이주노동자 및 그 자녀, 도시 노숙인, 외국 분쟁지역의 주민들, 한국이 참전한 이라크 현지 주민들 등등, 이들 모두 의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응하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개인적인 선택이겠지요. 다만 혼자서 결정하기 힘들다면 인의협 선생님들과 상의하고 같이 결정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박준하 기자 / 순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