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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꿈과 가능성에 대하여'

전직 동아일보 기자, 이영이 선생님 인터뷰

다양한 꿈을 꾸던 어린시절,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관성인지 타성인지 하는 무서운 성질에 젖어 우리는 새로이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꿈을 꿔도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사물의 이치에 의문남이 없으며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 현재 세브란스 인턴으로 수련 받고 계신 이영이 선생님은 바로 그 때 18년간의 동아일보 기자, 위크엔드지 팀장의 생활을 접고 새로운 꿈인 ‘봉사하는 의사’의 길을 과감하게 선택했다. 그렇게 의사의 가운을 입고 만난 이영이 선생님(47)의 모습에는 인생의 제 2 장을 시작하는 활발함과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했다.  “대단할게 없는 저이지만 늦은 나이에 의사의 길을 걷는 저를 보며 ‘나도 힘을 내서 병을 이겨내겠다’고 환자분들이 굳은 의지를 다져주실 때면 정말 감사하고, 저도 더 힘을내게 되요.” 라고 말하는 그녀. 전직 기자라는 타이틀에서 냉철하고 차가울 것만 같았던 선생님의 이미지는 그녀가 한 마디 한마디 할 때 마다 느껴지는 소녀 같은 발랄함과 환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무너져내렸다. 

Q. 처음에 기자를 하게 되셨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에 기자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은 열정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대학시절 서울 YMCA 대학생 서클인 산호회에서 정신박약아를 매주 일요일 찾아가 보살펴 주는 봉사활동도 했었고, 집근처에서 공장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야학도 운영했었는데요. 사회 전체가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지엽적인 노력만으로 약자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개선되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죠. 조금은 거창한 생각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 신문사에 들어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기사를 써보자 생각한 거죠.

Q. 기자 시절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고, 어떤 기사를 다루셨나요?

1988년 초에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에서 6개월간 수습기간을 마치고 주로 생활경제부, 편집부, 경제부 등을 거쳤어요.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도쿄 특파원을 했고, 그 후 귀국한 뒤 약 2년 동안 동아일보 주말 판 위크엔드 팀장을 지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분야는 역시 경제부로, IMF 전후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했던 시기 국세청이나 산업자원부 등 정부 부처와 삼성, 현대 LG 등 재벌 그룹을 담당했습니다.

Q.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실감했던 순간도 많으셨나요?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네, 물론 종종 있죠. 옛날에 삼성이 기아 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몰래 주식을 매집하고 삼성 생명을 통해서 돈을 빌려 주는 등 물밑작업을 했던 일이 있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삼성의 이미지도 매우 안 좋았고, 그 방법이 옳지 않았기에 저는 특종으로 이 사실을 다뤘었어요. 젊은 혈기에 똘똘 뭉쳐 그 사건을 매일 1면 톱으로 쓰고 맹공격을 했었죠. 결국 삼성은 기아 자동차 인수를 포기하고 자동차 사업을 포기했어요. 이건희 회장이 꿈에 그리던 자동차 사업을 언론으로서 중단시킨 거죠. 그 때는 제가 이겼다고 생각했었어요. 정말 기자로서 굉장히 큰 영향력을 행세했다고 생각했고요. 물론 당시 삼성이 몰래 주식을 매집하고 잘못된 것도 있었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그것이 100% 잘못 됐다 할 수 있을까요? 결국 기아는 현대가 가져갔거든요. 삼성은 안 되고 현대는 되는 걸까요?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가치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기자는 어려운 직업이고 막중한 책임을 갖습니다.

Q. 18년 동안의 기자 생활을 그만 두고 갑자기 의사로 전향하게 되었던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기자는 마크로한(Macro)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직업입니다. 마크로한 시각으로 세상을 마주대하는 기자 일을 하다 보니 좀 피곤해진 것이 사실이고, 다양한 가치관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정말 어떤 사회가 가장 정의로운 사회인가, 그 정의로운 사회를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어요. 내가 쓰는 기사가 정말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생각이 될 때도 있었어요. 기자 같은 인문학적인 세상에서는 인풋과 아웃풋이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도 많고요.

그러던 중 2005년 초 이화여대병원 정신과 과장님을 역임한 이근후 박사님과 몇몇 의사선생님을 따라 네팔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분들은 20여 년간 매년 네팔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펼치시는 분들인데, 봉사활동 현장을 지켜보면서 “아, 나도 이렇게 남들에게 베풀면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어요. 그 때가 제 나이 마흔 한 살 이었어요. 함께 여행하던 남편이 그 말을 듣고는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해보라”며 적극 지지해주었어요. 그 자리에 있던 의사선생님들도 모두 박수를 쳐줬고요. 결국 여행에서 귀국한 뒤 바로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의학전문대학원 준비를 했죠.

Q. 그래도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다가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셨을 것 같은데, 현실적인 어려움은 없었나요?

물론 네팔에서 있는 동안 내내 여러 생각을 했어요.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좀 더 지켜본 뒤에 생각을 해볼까. 하지만 기왕에 마음먹은 김에 바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다시 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아 신문사에 사표를 냈어요. 이왕 준비하는 거라면 어느 한 가지를 확실히 하고 싶었거든요. 처음 사표 낼 때 신문사 후배들이 매우 의아해하면서 설마 진짜 의전원에 가겠냐고 했지만, 제가 왜 의사가 되려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더니 오히려 모두들 격려해주면서 저를 부러워했어요. 그 때는 내 나이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딱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적령기였던 것 같아요. 학원에 다니고 의대에 다닐 때에도 가끔 힘든 순간들은 있었지만, 그 보다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데 대한 설렘, 열정, 기대 이런 것들이 더 컸어요.

Q. 늦은 학교생활은 다시 하시면서 예전 대학을 다닐 때와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재미있던 일들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여학교다 보니 젊고 예쁜 친구들이랑 같이 생활을 하면서 정말 즐거웠어요. 한창 예쁠 때의 동기들을 따라가는 게 어렵기도 했지만요(웃음). 가끔 밥을 먹으러 나가면 식당에서 딸이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고요. 또 아무래도 또래가 젊다보니 툭툭 등장하는 신조어들을 이해 못했던 적도 있어요. ‘안습’이라던가 ‘지못미’ 같은 말을 처음에는 몰라서 “그게 무슨 뜻이야?” 라고 물으면 애들이 “언니....” 하고 차마 말을 못해주더라고요. 그럼 또 저는 다른 동기들한테 물어보고요. 제가 늦은 나이에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Q. 인문학적인 학문을 하시다가 갑자기 암기도 많고 양도 많은 의학 공부를 하시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다른 젊은 친구들은 정말 스캐너처럼 공부한 내용에 대해서 줄 줄 줄 외우던데 저에게 그건 좀 어렵더라고요. 대신에 행간의 의미를 파악한다거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연륜 덕택인지 수월했어요. 맞는 논리든 틀린 논리든 제 나름의 이해를 하기도 했고, 동기들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니, 이` 거 이해가 잘 안되는데 설명해주세요~’ 하고 제게 묻곤 했어요. 물론, 결국에 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설명해준 제가 기억을 하지 못해서 도리어 묻곤 했지만 말이에요. 그럴 때면 “언니, 이거 언니가 가르쳐 주신 거잖아요~” “아, 맞다, 맞다! 이거였지?!” 하면서 서로 배웠어요.

Q. 기자에서 의사로 새로운 길을 걷고 계신 지금, 비 의료인의 시선에서 보았던 의사와 현재 자신이 직접 의사 생활을 경험하면서 시각 차이가 생긴 것이 있다면요?

신문사에서는 경제부에서 주로 일했고, 저나 가족들 모두 건강한 편이어서 의료 사회나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다른 이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같은 ‘훌륭한 의사 선생님’상이랄까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직업이라는 데에서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의사 선생님들의 생활을 알고 보게 되니, 정말 모두가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최소 10년에서 13년이라는 긴 시간 막대한 양의 공부를 하고, 수련을 받는 다는 것은 자기 사명감과 희생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되요. 의사가 되어서도 이태석 신부님이나, 방학 때면 꼭 해외 봉사를 나가시는 많은 세브란스의 의사 선생님들을 보더라도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훨씬 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집단이 의사라고 생각해요. 때로 일부 의사의 옳지 않은 행동들 때문에 사회적으로 의사 집단 전체가 욕을 먹을 때에는 참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사회에서 전체 의사 집단이 좀 더 존경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Q. 기자를 하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쌓아왔던 ‘사람을 대하는 방법’들이 환자분들을 대하는 데에 플러스 요인이 되시기도 하겠네요?

기자는 거지에서부터 대통령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입니다. 그럼에도 환자들에게 침습적인 시술을 해야 할 때에는 저도 약간은 겁이 난답니다. 요즘은 소아과 병동을 돌고 있는데요, 어린이 환자들에게 꿈도 묻고 좋아하는 아이돌 이야기도 하고 나면 어린 환자들의 얼굴이 얼마나 밝아지는데요. 환자들을 대하는 법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사회생활을 많이 해볼 기회가 없었던 젊은 학생들 보다는 제가 조금은 더 자연스럽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저의 20대 때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제가 더 잘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에요. 제 말은 전직 기자였다는 사실 보다는 세월이 흐를수록 쌓이는 연륜이라는 것이 환자분들이나 보호자분들을 대하는 것을 좀 더 자연스럽게 한다는 말이죠.

Q. 인터뷰 내내 밝고 활기차신 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병동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으실 것 같아요. 보호자분들이나 환자분들도 편안하게 해주실 것 같고요. 인턴 생활이라는 것이 육체적으로 많이 고된 데 그렇게 일일이 환자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힘들지는 않으세요?

제 입으로 인기가 많다고 하면 너무 부끄럽잖아요?! 환자분들이나 보호자분들이 일차적으로 바라는 것은 치료를 잘 해주는 것이지만 의사-환자 간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도 굉장히 바라세요. 저 역시 환자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지면 일을 하는 데에도 훨씬 더 편하고 진정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고요. 물론 인턴 생활이 많이 힘들고, 육체적으로도 고되긴 하지만 정말이에요. 입 다물고 일을 하는 것보다는 이야기 나누고 편안한 관계에서 일을 하는 것이 훨씬 힘이 덜 든다니까요? 환자분들한테 배운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자세를 잃지 않는 거죠.
특히 쉬고 싶은 한 밤 중에 아프다는 콜을 받더라도 바로 달려가서 따뜻하게 환자분의 손잡고, ‘많이 힘드시죠?’ 하는 말 한마디만 있다면 호통을 치시던 환자분들도 ‘참을 만합니다.’고 대답을 하시지요. 필요한 절차는 아니라 하더라도 청진기 한번 배에 대는 행동만으로도 환자분들은 정말 마음에 안정을 찾으세요. 결국 의술이라는 것은 사람을 다루는 학문이니까요 그만큼 정과 소통이 필요한 것 같아요.

Q. 다시 기자로 돌아가 의학 전문기자로 활동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인문적이고 마크로한 세계에서 벗어나서 환자 한 분 한분을 케어하고 치료해 드리고, 그분들이 나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을 위해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기자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의학기사에 조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휴머니즘이 느껴지는 기사가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환절기 감기 예방을 위한 방법” 과 같은 기사도 좋지만, 의사는 사람을 만나는 직업이잖아요? 병상에서 만난 환자에 관한 이야기나, 감동적인 일화 같이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Q. 올 해면 인턴 생활도 끝이 나시는데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사실 저는 의전 4년 후에 바로 의료 행위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주위 선생님들이 ‘텍스트 위주의 공부와 실제 환자를 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환자를 많이 봐야 혼자서도 의술을 능히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에 따라 올 해 인턴 수련을 받고 있고, 지금은 ‘가정의학과’ 레지던트를 지원해 놓은 상태입니다. 모든 수련과정이 끝나면 저는 의사 수가 부족한 지방 병원으로 가려고 해요. 원래 네팔에서 영감을 얻었으니, 바로 당장은 힘들겠지만 후에라도 해외에 의료가 낙후 된 지역으로 가서 많은 봉사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코이카(KOICA) 같은 해외 봉사활동 단체에 들어가 다양한 활동도 해보고 싶습니다.

Q. 많은 의대생들이 좁은 사회에서 살고 그만큼 사고나 활동의 폭도 타 대학생들에 비해서는 좁은 면이 있습니다. 과감히 새로운 도전을 했던 분으로서 그런 의대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릴게요.

의사의 최대의 장점은 ‘변신’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의사로서 신문기자도 될 수 있고, 공무원도 될 수 있고, 정치인도 될 수 있고, 학자도 될 수 있고…. ‘의대에 왔으니 내 꿈은 의사.’ 라고 단정 짓기에 의사라는 직업 안에는 너무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하여 꾸준히 생각하고 고민해 보지 않는다면, 눈앞에 금은보화 같은 기회가 지나간다 하더라도 알아채질 못할 겁니다. 항상 주위에 눈과 귀를 열어 두고 가능성을 보세요.

그리고 중장기 목표를 세워보는거에요. 자기가 일생을 의사로서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어느 정도 인지 생각해보고 초기, 중기, 후기 이렇게 3등분해서 각 시기의 목표를 따로 정하는거에요. 결혼, 육아와 같은 필수적인 것들서부터 경제적인 안정, 명예, 학문적 성취, 그 외 의 꿈들까지 다양하게 있을거에요. 참, 공부는 정말 젊어서 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목표들을 한 순간에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신, 그 목표들을 3등분 된 시기별로 중장기 목표로 삼아 보는거에요. 이렇게 중장기 목표를 세우면 누구나 변신이 가능하답니다.

고유라 기자/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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