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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보다 강한 리본들

질병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캠페인의 힘

12월 1일, 프랑스 퐁피두 예술센터에 아일랜드 예술가 브라이언 맥코르마크가 수만 개의 콘돔을 사용하여 만든 작품 ‘소리는 나의 삶’이 전시되었다.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시티에서는 시민들이 거대한 리본 모양의 무수히 많은 붉은색 초에 불을 붙였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르코바도 산 정상에 세워진 예수상은 평소의 하얀 조명을 벗어버리고 피처럼 붉은 색의 조명으로 인해 붉게 빛났다. 미국 백악관에는 대형 ‘빨간 리본’이 걸렸고 우리나라 곳곳의 보건소에서는 콘돔 분장을 한 사람들이 시민들에게 홍보물을 전달했다. 이 모든 일은 왜 일어난 것일까? 12월 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대해 이야기하고 빨간색 리본을 옷에 붙이고 다니고 정치가들은 에이즈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퇴치를 위한 정책을 이야기하였다. 올해 세계 에이즈의 날 공식 슬로건인 ‘제로화(Getting to Zero)’ 즉, ‘새로운 HIV 감염 제로’, ‘차별 제로’ , ‘에이즈관련 사망 제로’의 메시지가 세계 각국의 행사와 상징물을 통해 많은 일반인에게 전달되었다.
병은 의사가 혼자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환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질병에 있어 환자는 유병기간 중 절대적으로 긴 시간을 병원이 아닌 집과 직장 등 개인적인 공간에서 보내게 된다. 약을 제시간에 맞춰서 챙겨먹지 않고, 정한 날짜에 검사를 받지 않아 진단이 늦어지고, 수술 전후 관리를 소홀히 하는 등 환자 스스로 질병의 치료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이유로 일반인에게 질병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예방법, 검사 시기, 치료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환자의 예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의학 지식의 발달보다 질병에 대한 환자 자신의 인식의 개선이다. 일반인에게 질병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여러 가지 정보들을 전달하여 사람들의 인식을 광범위하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재의 세계적인 추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이즈 퇴치를 상징하는 레드 리본과 세계 에이즈의 날, 세계 당뇨병의 날, 유방암 계몽과 암 연구를 상징하는 핑크 리본, 전립선암에 대한 조기검진 의식을 높이기 위한 블루 리본, 폐암 퇴치의 희망을 담고 있는 노란 리본, 대장암 인식 증진을 상징하는 골드 리본 등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만 한다’ 는 명문을 빌리자면, 이러한 캠페인들은 수백 권의 책보다 더 효율적으로 병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있고 책보다 강하다면 도끼보다 강한 것은 물론이다.
세계 에이즈의 날은 1987년 8월 제임스 W. 번과 토마스 네터가 처음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두 사람은 이를 “AIDS를 위한 범세계 계획”의 집행의장인 조너선 만 박사에게 제안했고, 여기에 만 박사는 날짜를 12월 1일로 하자고 했다. 1995년부터 미국 대통령은 12월 1일을 세계 에이즈의 날로 공식 선언했고 이후 전 세계의 정부 기관과 국제기구, 민간단체가 각종 기념행사를 열며 유지하고 있다.
레드 리본은 1991년 폴 자바라를 중심으로 한 ‘비주얼 에이즈’에 의해 뉴욕 에이즈 영상예술제에서 처음 출품된 것이며, UNAIDS에서 에이즈운동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채택되었다. 에이즈 리본의 빨간색은 에이즈가 피의 교환에 의한 전염병임을 알리는 동시에 사랑과 정열을 뜻한다. 에이즈 감염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지지하며, 이해하고 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표식이며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교육을 강조하고 에이즈 환자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에이즈의 확산과 함께 에이즈 리본도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이제 에이즈 예방과 퇴치를 위한 행사에서 상징물이 되었다.
당뇨병의 날은 11월 14일이다. 1991년 세계 당뇨병 연맹에서 인슐린을 발견한 프레드릭 밴팅의 생일을 기려 제정한 날로, 2006년 UN에 의해 기념일로 인정되었다. 세계당뇨병 연맹을 필두로 학계, 의료계, 환자단체 등 당뇨병 관련 커뮤니티들은 당뇨병 퇴치를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으며 비만, 스트레스, 운동 부족 등 생활 습관이 당뇨병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일반인에게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핑크 리본 캠페인은 1991년 ‘에스티 로더’의 에블린 로더 여사가 유방암에 걸린 후 시작된 캠페인으로 유명하다. 여성운동가 및 사회지도층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유방암환자의 재활을 위해 시작된 유방암운동은 유방암 계몽과 암 연구에 대한 기금 조성으로 그 활동범위를 넓혀갔으며 이제는 정책 결정에 있어 강력한 압력단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론과 기업의 후원 속에 다양한 캠페인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유방암 무료검진 및 공개강좌, 유방암 환우회 조직, 핑크리본 마라톤대회, 국회에서의 공청회 등을 비롯하여 유방암 수술을 하는 의사들이 핑크타이를 매고 환자들에게 치유의 노래를 불러주는 음악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블루리본 캠페인은 전립선암에 대한 조기검진 의식을 높임으로써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1999년 영국의 비영리 단체인 캡큐어가 처음 사용했다. 국내의 경우 전국 규모 공익 캠페인으로 9월 한 달을 ‘전립선암 인식의 달’로 정하고 있으며 전립선암이 50대 이후 남성에게 주로 발병한다는 점에 착안, 전립선암을 ‘아버지 암’으로 규정하고 환자 당사자 뿐 아니라 가족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나가고 있다.
대한폐암학회에서는 매년 11월 17일 폐암의 날을 맞아 진행되는 ‘폐암 퇴치의 날’ 캠페인의 상징물로 노란리본을 사용하고 있다. 노란색은 폐를 의미하며, 기다림과 만남, 염원 등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리본 안의 ‘0’자 모양은 폐암으로 인한 두려움을 넘어 희망을 키우기를 바라는 의료진의 약속을 의미한다. 대한폐암학회는 매년 캠페인마다 폐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높이고 조기검진과 예방 의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심유진 기자/단국
<jinshim@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