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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아야 할 기아의 진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VS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제3세계 국가의 기아라는 테마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세계 경제 석학들과 사회학자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으나 여전히 미결인 문제에 대해 답을 찾으려 한다면 이 글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세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몇 가지 사실을 공유하고 싶다. 소개할 책은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와 마이클 킨슬리의 "빌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이다. 두 책은 제3세계의 비극이라는 동일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지만 서로 상반된 결론에 도달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는 올해 초 방영된 ‘시크릿 가든’ 이라는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월세 30만원을 내고 세들어 사는 길라임의 처절한 가난을 이해할 수 없었던 부유한 청년 김주원은 서재에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꺼내든다. 그는 아마도 이 책의 결론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 지글러,
자본의 무한 경쟁의
규제가 기아의 해결법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한 저명한 기아문제 연구자인 장 지글러는 부패한 권력들, 환경 재앙과 함께 금융 자본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를 기아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데 하루에 10만명이, 5초에 한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현실, 시장 논리에 의한 가격 정책 때문에 잉여 농산물이 구호 식량으로 제공되는 대신 버려지는 모순을 폭로하며 기아는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게 내버려 두지 않는 비정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비정한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기아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신자유주의 논리를 완전히 버리고 국제적 구조, 규범, 협약을 마련해 시장을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빌 게이츠,
자본이 기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자

한편 신자유주의 시장체제의 근본인 ‘자유경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여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된 빌 게이츠는 2000년 그의 아내와 함께 자선재단인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하였다. 2008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에서 그는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방식의 기업경영이 제3세계 국가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발표한다. “창조적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업이 이익과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제3세계를 위해 일하게 하라.”이다. 기업이 가난한 나라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 돈을 쓰거나 기술을 활용하는 것, 수익의 일정 비율을 가난한 나라에서 가치 있는 목적에 사용하는 제품을 파는 것이 그 예이다. 다른 예로 FDA가 선진국에는 없고 제3세계에만 만연한 질병의 치료약을 개발한 제약회사의 다른 약품에 대해 우선 심사를 해주는 것은 제약회사로 하여금 제3세계의 질병에 대한 약을 개발할 동기를 부여한다. 그는 만일 기업이 이익을 창출하고 사회적 이익을 받는 방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는데 21세기의 처음 몇 십 년을 보낼 수 있다면, 빈곤을 줄일 지속가능한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사회적 기업, 개념적 논의 대신
실험적 개선을

미국의 많은 보수적 경제학자들은 “창조적 자본주의”가 진정한 자본주의를 후퇴시키고 인류를 더 가난하게 만들 것이라고 비난하고 진보주의자들은 기업의 근본적 목적이 이윤 추구이기 때문에 “사회적 기업”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려운 허구일 뿐이라고 냉소한다. 과연 기업의 사회 참여에 대한 논의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시대에 소비는 그 사람을 대변한다. 친구들과 “스타벅스에서 봐.”라고 약속을 정하고 맥북을 사용하면서 “상식을 깨라”는 애플의 창조정신을 소비한다. 생활 전반에 깊숙이 위치한 기업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대신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다국적 기업의 눈부신 성공을 제3세계 국가의 기아극복으로 연결시킬 방법이 있다면 실험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진실에 대한 인식과
책임의식이 중요

장 지글러와 빌 게이츠의 주장에 대해 소개했지만, 이외에도 신자유주의를 윤리적으로 변화시킬 수많은 대안이 연구되고 있다. 어쩌면 그 대안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 또는 신자유주의를 유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아를 비롯한 사회적 아픔에 관심을 가지느냐가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건 진통은 필연적인 것이기에 그 진통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책임의식의 크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심유진 기자/단국
<jinshim@e-mednews.com>

신자유주의란 무엇일까. 18세기 중엽 산업혁명 이후, 정부의 통제를 최대한 줄이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게 하자는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본주의는 처음에는 호응을 얻었으나, 자본의 횡포, 독점, 빈부격차 심화, 경기 침체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 결과 방임적 자유보다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요구되어 미국 윌슨 대통령의 ‘새로운 자유’ 정책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이어 케인스의 수정주의 이론이 등장한다. 수정주의에서는 자본가의 자유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도 국가가 나서서 관리한다. 이러한 케인스의 수정 주의가 경제적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이는 물가조절, 자원 배분을 비롯한 대개의 경제 운영은 시장 기능을 통해 수행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규제 완화’, ‘세금 축소’,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복지 정책 축소’ 등을 포함하는 신자유주의 조치들은 세계화와 합세하여 유례없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엄청난 부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친 경쟁주의로 치달아 다수의 약자를 소외시키고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33년, 고전적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고 수정주의를 고안한 케인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전쟁 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퇴폐적이고 국제적인, 하지만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는 성공작이 아니다. 이는 지적이지 않다. 아름답지 않다. 정당하지 않다. 도덕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또한 케인스가 비난했던 고전적 자본주의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비난에 부딪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