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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이 아닌 발전을 위하여


의대생 분들께 묻습니다. ‘한의학’이라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나요? ‘비과학적’, ‘스테로이드’, ‘민간요법’... 대다수 의과대학생들은 한의학을 ‘검증 안 된 철부지 학문’으로 여기며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역으로 한의대생 역시 양의학을 ‘부분적이고 기계적인 의학’이라며 반기지 않지요. 굳이 학생들 간 의견대립이 아니더라도, 양-한방 갈등은 우리사회 전반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이런 갈등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 의학의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작게나마 이뤄지고 있는데요. ‘한의학 탐사 여행’은 그러한 노력이 드러나 있는 책입니다. 200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실시된 ‘한의학과 보완대체의학’ 강의 기간 도중 강의홈페이지에 올라왔던 의과대학생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교수의 답변을 모아놓았고, 이들을 크게 네가지 범주 - ‘한의학의 과학화’ ‘한방의료의 실제’ ‘한국 의료제도 속의 한의학’ ‘한의학을 이해함으로써 의사들이 얻을 수 있는 것’ - 로 나누어 수록해놓았습니다.

이 네 가지 중, 이번 기사에서는 ‘한의학의 과학화’에 초점을 맞춰볼까 합니다. 먼저 한의학의 과학화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본 후, 그 지향점이 정말 ‘괜찮은지’, 만약 아니라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의학의 생존수단, ‘과학화’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도입된 이래, 한의학이 계속해서 받아온 질문이 있습니다. ‘한의학이 과연 믿을만한 학문인가’ - 즉 한의학의 과학성에 관한 논쟁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질타를 받아온 한의학계는 한의학이 정말 믿을만한 의학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더 나아가선 ‘살아남기’ 위해 한의학의 과학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그러니 한의학 과학화는 한의학이라는 학문자체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한의학의 생존방편으로써 외부적인 요구에 반응하기 위해 시작된 셈입니다.

 

현재까지 이뤄진 과학화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한의학에서 쓰이는 약재의 효능을 증명하기 위해 약재성분을 분석해보기도 하고, CT나 초음파 등 각종 진단 장비를 동원하여 치료경과를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양방병원과의 협동연구를 통해 한의학과 의학을 접목시켜 보려는 노력도 하고 있지요. 오늘날 한의학의 과학화는 현대적 의미의 과학과 관련된 요소나 방법론 - 각종 진단 장비나 기계, 연구 방법론 등 - 을 차용한 것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전체적인 방향은 한의학의 과학성을 ‘검증’하는데 맞춰져 있는 듯합니다.

 

의학 & 실험과학의 ‘좁은 문’

 

한의학의 과학성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봅시다. ‘과학화’는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다’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그런데 과학은 여러 층위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정확한 의미가 달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사와 한의사 분들은 이 ‘과학’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책에 나온 질문의 몇 가지 예를 살펴봅시다. 우선 많은 학생들이 한의학의 여러 가지 시술이나 각종 약제가 제대로 ‘증명’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서 증명은 현대의학에서 쓰이는 연구방법론 - 무작위배정 대조군 연구(RCT), 단면연구(CSS), 코호트 연구 등 -에 의한 검증을 가리킵니다. 음양오행이론이나 장상론 등 한의학의 근본 이론이 정말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묻는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즉 한의학이 ‘서양 의학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연구, 검증방법론을 갖추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대다수였다고 볼 수 있지요. 만약 그러한 방법론으로 증명되지 못한다면, 한의학이 온전한 학문으로 인정받기는 힘들다는 뉘앙스도 들어있는 듯 했습니다.

 

질문 내용으로 짐작컨대, 학생들에게 있어 과학이란 ‘관찰-이론-실험-재현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된 지식, 이론체계’인 듯합니다. 이러한 의미의 과학은 ‘실험과학(experimental science)'이라고도 불리는데, 가장 좁은 의미의 정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의학의 과학성을 논하기에 적합한 수준의 정의일까요? 사실 의학은 과학 그 자체라기보다도 임상경험을 중시하는 영역입니다. 같은 약품이라도 그것이 투여되는 (실험상 통제되기 어려운)상황조건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 있고, 아직 작용기전은 불분명하지만 임상적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시술이나 약품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학 자체도 비과학적인 측면을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학이 ‘비과학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일까요? 위에 언급 했듯이, 과학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존재합니다. 가장 넓은 의미의 과학은 ’믿을 만한 결과나 정확한 예측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모든 체계적인 지식‘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의미의 과학에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나 기법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의학 역시 과학의 한 갈래로 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한의학은 어떨까요. 한의학은 정精기氣신神혈血을 바탕으로 인체를 해석하고, 장부와 경락, 장상론을 이용하여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정기와 사기의 개념을 이용하여 병리기전을 설명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오랜 임상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한의학은 나름 ‘정확한’ 진단과 ‘믿을만한’ 치료법을 구축한 넓은 과학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한의학 그 자체로도 이미 과학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지요.

 

양의학의 ‘과학화’, 한의학의 ‘과학화’

 

이제 한의학의 과학성을 검증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양방의 과학성과 한방의 과학성의 성격이 각각 다르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양의학은 과학적 연구방법론, 한의학은 음양오행설, 기氣이론 등이 되겠네요 - 또한 다릅니다. 이 언어 간 번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 쪽의 언어로 다른 한 쪽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또한 그 부정확한 해석을 기준삼아 학문 간 비교우위를 논하는 것도 옳지 않겠지요. 다만 한의학계에서 이미 임상적 효능을 인정받은 시술이라든가, 특정 약재의 효능에 관심이 가지고 그것을 활용해보고자 연구하는 것은 양의학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의 과학화는 다른 학문의 성과를 활용하여 양의학을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의학자들 역시 과학화를 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대적 연구방법론과 첨단 기기를 이용하여 한의학의 ‘이상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과학화입니다. 보다 넓은 의미 과학화는 한의학 본연의 과학성을 찾아나가는 일입니다. 현재 한의학의 이론이 오랜 기간의 임상경험을 통해 그 정당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긴 하지만, 근본이론에 관한 연구가 좀 더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한의학의 근간이 되는 음양오행 이론이나 기氣, 경락, 경혈 등의 실체에 관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한의학은 남의 언어를 빌려 자신을 설명할 수밖에 없지요. 한의학 스스로가 자신을 명쾌하게 이해, 설명할 수 있어야 ‘믿을만한가’라는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록 과학화의 출발이 어느 한쪽의 비대칭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양쪽 의학의 대등한 발전에 그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한의학의 과학화가 각자가 서로의 과학성을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꾸준한 성장을 도모하는 계기로써 받아들여지길 기대하며 스터디를 마칩니다.

 

김정화 기자/한림

eudaimonia89@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