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Seriously! 150년?!

1858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15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개정판이 나오고 있다. 2008년 발행된 150주년 특별 기념 40번째 개정판은 무려 1576페이지에 4.7kg이나 된다. 150년이 넘게 장수한 책인지라 ‘그래이 해부학’의 저자 닥터 그래이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의대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닥터 헨리 그래이의 삶에 대해서는 이상하려니 만큼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심지어 닥터 그래이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단지 1827년 즈음되지 않을까하고 추측할 뿐이다. 1861년 천연두에 걸린 조카를 간병하다 자신도 천연두에 걸려 죽었는데 이 때 전염을 막기 위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닥터 그레이와 함께 ‘그레이 해부학’을 집필한 닥터 카터의 일기에 의해 알려졌다.

 

두 명의 저자

흔히들 ‘그래이 해부학’은 닥터 헨리 그레이 혼자서 집필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닥터 그래이는 각각에 대한 설명글만 작성하였다. 정작 큰 센세이션을 몰고 온 극사실주의적 그림들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닥터 헨리 밴다이크 카터가 그린 것이다. 당시에는 그림을 종이에 좌우가 뒤바뀌게 그리면 그 그림을 나무에 새겨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인쇄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그림이 왜곡되곤 했다. 그런데 닥터 카터는 자신이 직접 나무에 새겼기 때문에 그림이 더욱 사실적이고 정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의학을 공부했던 학생으로서의 경험과 교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대한 핵심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정리했다는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었다. 학생들을 위한 개념서였기 때문에 초판은 들고 다니기 쉽게 작고 가벼웠다고 한다. 더불어 가격도 학생들을 위해 저렴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정판이 발행되면서 점점 초판의 의도와는 많이 달라져 이제는 방대한 양의 절대적 참고문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상 영어가 아닌 상류층의 고급 영어로 쓰여서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해부학의 바이블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두 명의 저자 중에 유독 닥터 그래이 이름만 인용된 것일까. 아마도 닥터 그래이가 닥터 카터를 일러스트레이터로 고용한 것 추정된다. 책으로부터 나오는 인세 등의 모든 수입은 닥터 그레이가 취했고 닥터 카터는 그림을 그려주는 조건으로 한 달에 150파운드(약 30만원)을 받았다. 닥터 그레이에 비해 4살이나 어렸던 닥터 카터가 돈을 제때 받지 못해 마음고생을 한 흔적이 일기에 기록되어있다.

 

불사(不死)의, 불가지(不可知)의

원래 닥터 그래이가 31살에 낸 초판은 Anatomy, Descriptive and Surgical 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었다. 초판부터 해부학 교과서로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베스트 셀러였다. 그런데 3년 후인 1861년에 천연두로 사망하게 되면서 실제로는 제2판까지 밖에 집필을 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초판의 편집을 맡아주었던 친구, 홈즈를 시작으로 152년 동안 저자와 편집자들이 여러 번 바뀌며 계속해서 개정판을 발행해왔다. 지금의 그래이 해부학(Gray's Anatomy)이라는 책 이름은 1938년에 정식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유명한 책의 저자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책의 머리글에는 닥터 그레이의 부고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닥터 그래이의 친한 친구였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유명세를 시셈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공동 저자였던 닥터 카터가 유명세와 인세를 공평하게 누리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인도로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친구였던 홈즈도 우정보다는 라이벌의식이 강했던 것을 보면 닥터 그래이는 친구 복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미국의 소설가 싱클레어는 의사라면 꼭 읽어야 할 3가지로 성경,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래이 해부학을 꼽았다. 그 정도로 의학의 기본이 되는 해부학의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명서라 할 수 있다. 의사나 간호사 같은 의료 기관 종사자들 외에도 그레이 해부학을 통해서 인체 구조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고 예술적 영감을 얻어간 예술인들도 있다. 지금까지 150년 동안 명실상부한 해부학의 절대적 교과서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왔듯이 앞으로도 닥터 헨리 그래이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불사조처럼 그의 생애는 계속해서 베일에 가려져 있을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문정민 기자 / 중앙 

<moon_jm@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