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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서의 저자들 : 제1회 - 닥터 아더 가이톤

 해리슨, 로빈스, 가이톤, 그리고 홍창의... 의대생이라면 누구나 봐야 하는 교과서들의 제목을 장식한 이 분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의대생신문에서는 올해 6회에 걸쳐 의학교과서의 저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파헤칩니다. 그 첫 번째 순서로 본과 진입과 함께 맞게 되는 생리학 교과서의 저자, 가이톤을 만나 봅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가이토니안

 황금 같은 예과 2년이 지나가고 이제 곧 진입하는 예비 본과생들의 앞날은 순탄치만은 않다. 개강 전부터 시간표와 과비에 놀라고 책값에는 경악을 한다. 그 중 절대 강자는 단연  가이톤의 의학생리학 교과서(Textbook of Medical Physiology)가 아닐까 한다. 10만원에 육박하는 고가이지만 의대생이라면 한권씩은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인지도 있는 책이다.
 보통의 다른 교과서적들은 저자 여러 명이 공동으로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가이톤의 의학생리학의 경우에는 근 8판까지는 모두 (9판부터는 홀과 함께 자필하였다) 가이톤 혼자서 집필하였다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1956년에 초판이 발행된 이후로 최신 11판까지 거의 내용이 바뀌지 않고 조금씩 덧대어 졌다는 점도 이 책의 정교함과 우수성을 입증해 준다. 현재는 15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대다수의 의대생들이 참고하는 필수 지침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렇게 자연스레 가이톤의 의학생리학 교과서를 접하지만 막상 가이톤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닥터 아더 가이톤의 인생을 간단하게나마 훑어 보았다.

 닥터 아더 가이톤은 1919년 9월 8일 옥스퍼드, 미시시피에서 태어났다. 이비인후과 의사이자 2년제 미시시피 대학 총장 아버지와 수학 및 물리 선생님 어머니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명석하여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1936년에 화학과 전공으로 입학한 미시시피 대학에서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그 후 하버드 의학 전문대학원에 입학, 그 곳에서 인생의 반려자 루쓰 위글을 만났다. 위글과는 1943년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열 명 모두 안과, 흉부외과, 류마티즘학과, 마취과 등 각종 의료 분야에서 유명한 의사가 되었다.

 외과에 흥미를 느껴 인턴과 레지던트 외과 과정을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받았다. 그러던 중, 1947년 세계2차 대전 발발로 2년간 메릴랜드 국립 해군병원에서 군복무를 치렀다. 여기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과 마주하게 된다. 소아바미에 걸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을 오른쪽 다리와 어깨에 장애를 안고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불행에도 굴하지 않고 9개월 동안의 재활을 견디어 냈다. 후에도 집을 직접 짓거나 갖가지 가구들을 스스로 고쳤을 뿐 아니라 회의에 참석하러 갈 때에도 그 넓은 공항을 휠체어 없이 꿋꿋이 걸어가는 것을 고집할 정도로 신체적 제약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보조기, 전동 휠체어와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 등을 발명하기도 했다.

 소아마비로 인해 가이톤은 더 이상 외과 과정을 계속할 수 없었고 불행인지 행운인지 덕분에 인류는 역사에 남을 생리학자를 얻게 되었다.
 그의 셀 수없이 많은 업적 중에서도 심박출량에 관한 실험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실험으로 심장이 심박출량을 결정한다는 통념을 깨고 몸의 조직이 얼마나 산소를 필요로 하느냐가 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 순환계를 컴퓨터 모델로 재현하여 신장이 장기적으로 혈압을 조절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 외에도 고혈압, 심부전, 부종 등에 관련하여 600개가 넘는 논문으로 심장생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닥터 가이톤은 이런 굵직굵직한 학문적 업적보다도 ‘가족’을 더 중요시하였다. 여기서 ‘가족’은 사랑하는 부인과 의사가 된 열 명의 아이들은 물론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그는 모든 제자들에게 단순한 생리학 교수를 넘어선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었다. 가이토니안(Guytonian, 가이톤의 연구철학 아래 훈련받은 학생들을 흔히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그들은 각종 의학 분야에서 저명한 학자가 대부분이다.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뿐 아니라 동료 과학자들과 의학자들에게도 가이톤의 철학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학생에게 가르칠 때와 동료 학자에게 도움을 줄 때 방식을 달리하여 상대방이 최대한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타고난 교육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닥터 가이톤의 가르침은 교과서를 통해, 그의 ‘가족’을 통해, ‘가족’의 제자들을 통해 계속되어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생리학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인생을 배웠거든요.’
- 존 홀(미시시피 대학 가이톤 후임자)
‘가이톤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의 의학 아버지이자, 우상이자, 빼어난 인격체로 기억될 것입니다’
‘가이토니안이라는 것을 항상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 조이 그레인저 (미시시피 대학 교수이자 가이톤의 제자)

 보통 가이톤과 같은 학문적 위치에 군림하는 사람들은 그 직위적인 위엄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힘들다. 하지만 닥터 가이톤은 달랐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으며 사람들을 놀리고 장난치는 것을 즐겼다.
한번은 닥터 가이톤이 학회에서 강의를 마친 후 한 학자가 질문을 했다. 강의를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물어볼 필요가 없는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가이톤은 강의가 끝난 후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 그 학자가 끝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다.

 하루는 생리학 부서에서 일하던 직장 동료가 행정부서로 옮겼을 때, 복도에서 큰 소리로 ‘적 편으로 넘어간 내 제자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하며 장난을 친 적도 있었다.
 
 언제는 이런 적도 있었다. 텍사스 의과 대학교 생리학 교수 닥터 그레인저와 혈류의 자가조절기능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닥터 가이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자신의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참고문헌으로 제시하자 닥터 그레인저는 객관적이지 못한 출처라며 화를 냈다. 순간 닥터 가이톤은 눈을 최대한 찌푸렸다 동시에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칫하면 동료 간의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을 재치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 또한 닥터 가이톤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가이톤의 의학생리학 교과서로 공부하는 우리는 어찌보면 가이톤의 가르침을 받는 가이토니안 인 셈이다. 각 분야의 최고가 되어 가이톤의 이름을 빛내는 전 세계 가이토니안 중 한 명으로 가이토니안의 긍지를 실천할 수 있다. 이렇게 닥터 가이톤의 철학은 앞으로도 전 세계 가이토니안들로 인해 계속 될 것이다.

문정민 기자/중앙
<jmmoon@e-mednews.com>